<여신님…> 뛰어넘는 흥행 예감 <레드북> 한정석&이선영 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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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뮤지컬 <여신님이 보고 계셔>를 탄생시킨 한정석 작가, 이선영 작곡가 콤비가 4년 만에 신작 뮤지컬 <레드북>으로 돌아온다. 여성이 자신의 신체를 언급하는 것조차 금기시하던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에서 성적 경험을 다룬 소설을 쓰며 사회적 편견에 맞서는 작가 ‘안나’의 이야기다. 지난 6월 2016 공연예술 창작산실 시범공연에서 넘버 6개를 선보인 결과가 좋았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제작지원을 받아 2017년 1월에 본공연을 올리게 된 것. 시범공연 30분 동안 본 <레드북>은 결코 가볍지 않은 메시지를 위트있게 풀어낸 대사와 아기자기한 동화적 색채가 살아있는 멜로디가 무척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인터뷰 장소인 대학로의 한 카페에 들어선 한정석, 이선영 콤비는 작품의 분위기와 닮은 구석이 있었다. 동갑내기인 두 창작자는 웃음이 많았고 작품의 메시지에 대한 진지한 얘기를 할 때도 무게를 잡기보다는 농담을 섞었다. ‘있어 보이려’ 노력하지 않는 그들의 모습에서 뮤지컬 <레드북>에 대한 자신감이 느껴졌다.

 
Q. <여신님이 보고 계셔> 초연 이후 4년 만에 신작을 발표하네요. <레드북>을 구상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이 : 2015년 3월경에 우란문화재단에서 진행하는 ‘시야 플랫폼 : 작곡가와 작가’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그 쪽에서 ‘작품 하나 개발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했어요. 그때부터 구상에 들어갔죠.

한 : 같이 무슨 작품을 하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작가 얘기를 하면 좋겠다고 제안했어요. 저희도 작가니까 편하게 쓸 수 있고 요새 하는 고민들을 담아낼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작가 얘기를 쓰기로 정하고 나서 캐릭터에 살을 붙이기 시작했어요. ‘기왕 작가로 할 거면 야한 얘기를 쓰는 작가면 어떨까?’, ‘여자가 야한 얘기를 쓰다 보면 분명히 사회적인 시선이나 환경의 방해에 부딪히겠지?’로 생각이 이어졌고요.

이 : 그런 방해가 가장 심했을 법한 시대는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라고 저희의 생각이 모아졌죠. 아주 보수적인 사회분위기를 가진 시대였으니까요.

한 : ‘주인공 여성작가와 함께 이야기를 풀어나갈 상대 캐릭터는 어떤 사람이 좋을까?’ 고민하다가 그 시대의 보수적인 가치관을 가장 잘 대변할 수 있는 신사 중의 신사로 만들어보자고 결정했죠. 그렇게 해서 브라운이라는 남자주인공이 탄생했어요. 저희는 거의 매일 통화하고 대화하면서 “이 인물에 이런 이름은 어때? 직업은 이게 어떨까?”하면서 의견을 주고 받았던 것 같아요.
 
Q. <레드북>은 사회적 편견에 맞서는 ‘여성’의 이야기잖아요. 남성 작가로서 여성이 느끼는 차별과 편견을 이해하는 것이 어려웠을 수도 있을 텐데요.  
한 : 그걸 이해하기 위해서 진짜 열심히 공부했어요. 사회적 비난에 맞서 신념을 지켜가는 여자주인공이고 또 그 여자가 자신의 성경험에 대해 얘기한다는 점이 조심스럽게 느껴졌어요. 로맨틱 코미디 장르지만 그 안에서 여성의 인권이나 소수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부분은 좀 더 신중하고 책임감 있게 접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더 열심히 공부하고 보완할 점은 없는지 계속 신경쓰고 있어요. 선영이한테도 여성의 시점에서 걸리는 부분은 없는지 많이 물어봤고,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다른 친구들에게도 의견을 구했어요.

이 : 저보다 정석이가 여성에 대한 편견이나 차별에 대해 훨씬 민감해요. 사실 <레드북>은 여성에만 초점을 맞췄다기보다는 좀 더 넓은 범주에서 조금 ‘다른’ 사람들에 대한 얘기에 가까워요. 우리 사회에서는 조금만 달라도 이상하게 바라보는 경향이 있잖아요.

제가 여섯 살 때 유치원에서 장래희망을 얘기하는 시간이 있었어요. 다들 대통령이나 과학자를 얘기했고 특히 여자아이들은 간호사를 많이 얘기하더라고요. 근데 저는 마라톤 선수가 꿈이었어요. 하지만 다른 애들이 다 비슷한 꿈을 이야기하니까 진짜 제 꿈은 얘기할 수 없더라고요. 울먹이다가 결국 ‘저는… 간호사가… 되고 싶습니다.’하고 얼른 내려왔던 기억이 지금까지도 강렬하게 남아있어요. 남들과는 좀 달라도 자기 자신을 얘기할 수 있고 그걸 인정하는 분위기가 소중하다는 점을 짚어내고 싶었어요.

한 : <여신님이 보고 계셔>에도 소외받는 사람들에 대한 목소리가 담겨 있었어요. 여신님은 거창한 신적 존재가 아니었어요. 작품 속에서 창섭어머니, 주화 여동생 같은 여성은 그 시대에 천대받을 수도 있는 평범하고 소외된 여성이었지만 등장인물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존재였기에 여신님으로 투영됐죠. 그런 면에서 소외받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저희에게 낯설지 않은, 계속 얘기해왔던 화두였던 셈이죠.
 
Q. 주인공 ‘안나’는 당차고 똑똑하고 설득력 있고 참 매력적인 인물이에요. 캐릭터 설정에 참고한 인물이 있나요?
한 : 선영이의 성격에서 영감을 얻은 부분도 있어요. 선영이는 늘 말을 당차고 시원시원하게 하고 지루하거나 흥미 없는 얘기는 한 귀로 듣고 흘려버리는 경향이 있어요. (이선영 : 푸하하) 안나도 극중에서 본인이 동의할 수 없는 이야기를 남자들이 하면 말을 잘라버리곤 하거든요. 자기 소신을 지켜가면서 대화하는 방식을 닮게 그려냈죠.

이 : 정석이가 “이런 상황에서 네가 안나라면 어떤 말을 할 것 같아?”하고 의견을 많이 물어보곤 했어요. 근데 제 아이디어의 수위가 너무 세서 대사로는 못 쓴 경우도 있어요.(웃음)
 
Q. 안나는 ‘나는 내가 아는 이야기만 쓴다’고 얘기하잖아요. 왠지 이 대사는 작가님 본인의 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작품에 본인의 경험이 녹아든 부분이 있다면요?
한 : 안나가 소설을 쓸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여성 문학회 ‘로렐라이 언덕’은 제 지인들의 모임과 좀 닮았어요. 주변에 만화 좋아하는 친구들도 좀 있고 마니아 친구들이 좀 있거든요. 그런 친구들과 모여서 수다 떨 때 재밌는 분위기가 만들어져요. 남들에게는 이상해보일지 몰라도 그들끼리는 서로 아끼고 즐거운, 따뜻한 느낌이 나는 거죠. 그게 로렐라이 언덕 문학회의 분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또 변태 문학평론가 존슨이 안나를 추행하려는 장면은 제 대학시절 경험과 닿아 있어요. 엉큼한 속셈을 숨기고 ‘너를 진정한 작가로 만들어 주겠다’고 합리화 하며 접근하는 존슨은 제가 학교 다니면서 봤던 수많은 비호감 선배들의 요소를 모아놓은 캐릭터에요. 그런 선배들이 했던 말 중에 기억에 남는 것들을 대사로 녹여냈죠.

이 : "진정한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이런 경험도 해야 해." 이런 논리를 펼치는 사람들이 있죠.

한 : 작가가 되려면 극단적인 경험을 많이 해야 하는 것처럼 겁을 주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다행히 제가 고집이 세고 겁이 많아서 그들의 말을 안 들었어요. 근데 그런 센 경험 일부러 안해도 이렇게 작가 됐잖아요. (웃음)
 
Q. 올빼미, 딕존슨, 파슬리, 오레가노…. 등장인물 이름들이 재밌어요. 캐릭터 작명에 숨은 뜻이 있나요?
이 : 주인공 안나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인물이 되었으면 해서 친근하고 쉬운 이름으로 정했어요. ‘안나’는 영어권에서도 쓰이지만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쓰는 이름이니까요.

한 : 보수적인 남자 주인공 ‘브라운’은 어딘가 ‘레드’스러운 안나에 대비되는 색으로 이름지었어요. 같은 붉은 계열의 색이지만 약간 딱딱한 느낌이 드니까요. 단역들 이름은 디저트, 샐러드 소스, 특히 허브티 이름에서 골랐어요. 어감, 글자수, 허브의 효능까지 고려해서 이름 붙였죠.(웃음) 단역들 이름이 어려우면 극의 흐름이 끊기길래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외래어로 하고 싶었거든요.
 
Q. 이선영 작곡가의 곡에는 배우들을 긴장하게 만드는 고음이 좀 있잖아요. <레드북> 넘버에도 고음이 많나요?
이 : <여신님이 보고 계셔>에서는 남자배우들의 고음이 많았는데 이번 <레드북>에서는 여자배우들에게 고음이 많아요. 안나 노래는 정말 높거든요. ‘나는 야한 여자’같은 곡은 ‘파샵’ 음까지 진성으로 내야 해요. 그래서 캐스팅 할 때도 정말 힘들었어요. 그 정도 노래를 소화할 수 있는 배우는 손에 꼽기도 어려웠거든요. 음역대가 넓은 유리아 배우를 만나서 정말 다행이죠.
 
Q. 시범공연 영상이 공개된 넘버 ‘낡은 침대를 타고’를 들어보니 구성이 되게 다채롭더라고요.
이: 제3세계 음악이 섞였죠.(웃음) 그 넘버는 안나와 첫사랑 소년 올빼미가 낡은 침대에 앉아서 상상놀이를 하는 장면인데요. 상상 속에서 정말 다양한 나라의 다양한 캐릭터로 변신해요. 타잔도 됐다가 들판을 달리다가 해적도 되고 바닷속의 미역이 되기도 하죠. 너무 다른 공간과 환경을 한 곡에 어떻게 담아내야 하나 고민이 많았죠. 5분 남짓한 넘버 안에 서로 다른 분위기의 멜로디가 너무 많이 들어가면 정신 없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메인 멜로디를 정해두고서 상상 속의 공간이 달라질 때마다 리듬이나 음계만 조금씩 변주시켜서 그 공간의 특성을 표현했죠.

침대를 타고 날아다닌다는 판타지적인 느낌을 잘 표현하려면 일단 판타지적인 것들로 제 몸에 물들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디즈니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엄청 봤어요. 주인공들이 진짜 침대를 타고 날아다니는 <리틀 네모>, <마법의 빗자루>같은 애니메이션을 찾아보기도 했죠. 아무튼 날아다니는 건 다 본 것 같아요.(웃음)
 

▲ 이선영 작곡가가 참고한 애니메이션 <리틀네모>(1989)
 

Q. 장르적으로, 악기 구성에 있어서는 어떤 스타일인가요?
이 :  일단 밴드에다가 바이올린과 첼로가 더해져서 클래식하면서 어쿠스틱한 분위기가 있어요. 브라운처럼 보수적이고 고리타분한 인물의 넘버는 패턴화된 반주 위에 멜로디를 얹어서 클래식한 느낌을 살렸고요. 자유분방한 안나는 좀 더 팝적인 넘버로 표현했어요.
 
Q. 곡에 따라 작업환경을 바꾸시기도 한다고 들었어요. 어두운 분위기의 곡을 쓸 때는 작업실에촛 불만 켜두기도 한다면서요. <레드북> 작업할 때는 어떤 환경으로 꾸미셨나요?
한 : 히피 집시 점쟁이의 집 같던데요? (웃음) 되게 아기자기하고 알록달록하고.

이 : 딱히 작품에 맞춰서 바꿔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아니었는데 작년 초부터 예쁜 장식품들, 인형, 포스터, 사진들 같은 걸 조금씩 갖다 놓다보니 이제는 뭐 들어갈 공간이 없을 정도로 쌓였어요. 그래도 이번에는 촛불은 켠 적 없어요. <레드북>에는 어둠 속으로 빠져드는 곡이 없어서 제 안의 밝은 에너지는 모두 끌어내 썼어요. 제가 평소에 혼자 쓰던 곡들은 그리 밝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정말 너무나도 밝은 곡을 많이 써야 해서 LED조명을 환하게 켜 뒀죠.

한 : 미러볼만 없고 다 있는 것 같다니까요.(웃음)
 
Q.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두 분의 호흡이 굉장히 중요하잖아요.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셨을 것 같아요.
한 : 뭐, 저희가 딱히 노력이 필요한 사이는 아닌 것 같아서 감사해요. 친구니까 그냥 불만 있으면 바로 얘기하는 편이라서…. 그리고 한번에 설득이 안되면 두 번 세 번 얘기하고 그런 과정에서 타협하고 인정하고 설득 당하고… 그렇게 작업해요.

이 :  <여신님이 보고 계셔> 만들 때는 진짜 많이 싸웠어요. 근데 싸움의 횟수가 점점 줄어드는 것 같아요. <레드북>이 저희가 같이 쓰는 세번째 작품이다보니 어떻게 커뮤니케이션 해야 하는지 서로 익숙해진 것 같아요. 음악적인 부분과 드라마적인 부분에서 서로의 영역을 존중해주려고 노력하죠. 이번에 <레드북>하면서는 그렇게 의견 차이가 많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한 : 다른 창작자나 파트너들은 싸우는 걸 두려워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어요. 싸운 후 관계 회복이 어려울까봐 서로 참고 넘어간다는데 저희는 그런걸 무서워 하는 관계는 아닌 것 같아요. 싸웠다가도 빠르면 그날 저녁만 돼도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거든요. 가족끼리는 대판 싸우고도 식사 때가 되면 “밥 먹어!”라고 툴툴대면서 챙기잖아요. 그런 느낌이에요.
 
Q. 앞으로의 작품 계획이 있다면요?
한 : 같이 쓰자고 얘기했던 소재가 두 세개 정도 있어요. 저희는 인간에 관심이 많아요. ‘인간은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어떻게 사랑하는가.’ 이런 화두를 둘이 계속 생각해왔어요. 쇼케이스까지만 보여드리고 본공연은 올리지 못했던 <카인과 아벨>도 내년에는 구체적인 그림이 그려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글: 김대열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kmdae@interpark.com)
사진 : 배경훈 (Mr.Hodol@Mr-Hod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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