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이 사라져간 군인들,<벙커 트릴로지> 배우와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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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벙커 트릴로지>(이하 <벙커>)는 지난해 한국에서 초연 무대를 펼쳤던 <카포네 트릴로지>(이하 <카포네>)에 이어, 관객과의 거리가 매우 가까운 것이 특징인 작품이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벙커 속에서 벌어지는 세 가지 에피소드(맥베스, 아가멤논, 모르가나)를 다룬다. 지난 금요일,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에 자리 잡은 지하 벙커에서 30여 명의 관객과 함께 김태형 연출과 배우 박훈, 오종혁, 그리고 원작자 제스로 컴튼을 만났다. 이날 행사는 사전에 준비한 질문과 함께 <벙커>에 대한 관객들의 궁금증을 해소하는 문답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Q. <벙커 트릴로지>는 어떻게 만들게 되었나.
제스로 컴튼: 지금처럼 구체화하지는 않았지만 2012년부터 작은 규모의 공연을 구상했다. 그때부터 배우가 관객 가까이에서 공연하는 환경에 익숙해져 있었고, 그런 형식에 잘 어울리는 장소를 생각하던 중 (벙커를) 떠올리게 되었다. 지하에 있는 벙커는 폐소 공포증을 유발하기에 적합한 장소였고, 그 비주얼에 어울리는 시기가 제1차 세계대전이라고 생각해 자연스럽게 배경이 정해졌다.
 
Q. 이렇게 관객과 거리가 가까운, 좁은 공간을 정할 때 특정한 기준이 있었나?
제스로 컴튼: 영화에서 영향을 받은 것들이 많다. 내 고향은 공연이 활성화가 되어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래서 영화나 TV를 통해 경험한 것이 많아 항상 영화적 요소나 이미지에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좁은 공간에서 연기하다 보면 배우들이 ‘내 소리가 들릴까?’ 하는 걱정을 안해도 된다. 영화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느낌과 유사하다. 영국에서는 실제 무대 규모가 한국보다 작아서, 속삭이는 장면을 보여줄 때 정말 속삭여도 들리는 정도의 규모였다.
 
Q. <벙커>의 첫인상은 어땠나.
김태형: 에든버러 축제에서 <카포네>를 먼저 만났다. 배우와 관객이 좁은 공간에서 가까이에 있는 게 마치 연습실에서 배우들과 만드는 그대로 무대에 펼쳐지는 것 같아 (작품이) 욕심났다. 공연이 끝난 후에 반대편에 앉아있던 젊은 한국인 친구들 표정이 ‘대단하다, 놀랍다’로 가득했다. 그 느낌을 한국 관객들에게 전하고 싶었다.
 
Q. 트릴로지 시리즈에 처음 합류했는데, 연습이 굉장히 고됐다고.
박훈: 연습은 즐거웠다. (웃음) 연습을 한 달 정도만 더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연습이 너무 즐거워서 연습을 가는 시간 만큼은 너무나 즐겁고 재미있었지만 다른 일정이 있어 많이 참여하지 못해서 아쉬웠다. 사실 태형이 형과 작업할 때는 늘 즐거웠던 것 같다. ‘공연할 때 언제 제일 즐거웠어요?’ 하고 물어보면 단연코 <모범생들> 할 때가 가장 즐거웠다. 지금 이 시간도 돌이켜봤을 때 굉장히 좋은 시간일 것 같다.

다만 이 작품의 컨셉이 전쟁이다 보니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감정을 표현해야 해 부담스럽고 어려울 때가 많다. 그런데도 함께 하는 배우들이 서로 힘이 되어주어서 좋았다. 특히 이석준 형에게는 큰절해야 한다. 항상 다른 배우들 배려해주고 사랑해주는 형 덕분에 연습 과정이 내내 즐거웠다.
 
Q. 한국공연을 본 소감은 어떤가?
제스로 컴튼: 4년간 작업해서 굉장히 잘 알고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했지만, 서울의 새로운 프로덕션이 만든 작품을 보니 잘 알면서도 다른 부분이 있어 인상 깊었다. 너무 익숙해지다 보니 다르게 만들 가능성을 간과하고 있었던 것 같다. 다른 시각으로 내 공연을 볼 수 있어서 재미있었다. 그리고 영국에서는 더블 캐스팅 시스템이 없고, 매일 같은 배우가 같은 공연을 해도 일관성을 유지기가 쉽지 않다. 한국에서는 다른 배역들이 공연하는데도 그 조합이 일관되어 같은 사람이 공연하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하는지 정말 모르겠다 (웃음)
 
Q. 이번 작품은 각색을 많이 했다는데, 어떤 점이 바뀌었는지?
김태형: <벙커>를 준비하면서, <카포네>보다 훨씬 많은 각색을 거쳤다. <벙커>는 <카포네>에 비해 더 익숙하지 않은 경험이나 감성을 다루고 있는데, 특히 ‘모르가나’ 같은 경우에는 한국인들이 잘 모르는 아더왕 전설과 모르가나의 존재를 다루고 있다. 아가멤논이나 맥베스 역시 익숙하지만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판단이 어려운 부분들이 있었다.

수정이 많아질 것 같아 고민하던 중 제스로 컴튼과 화상대화를 한 적이 있었다. ‘우리 <카포네>도 그랬지만 <벙커>도 각색을 많이 할 예정이다. 원작자로서 괜찮겠냐’ 하고 물어봤는데 시대가 달라지고 국가가 달라졌기 때문에 상황에 맞게 가는 것이 훨씬 좋다고 이야기했다. 그래서 ‘원작에 대한 존중을 지키면서 한국에 맞게 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보자’ 하고 시작했다. <카포네>보다 훨씬 어려웠고, 훨씬 많이 바꿨다. 아가멤논이나 맥베스는 제목과 컨셉 정도만 유지하고 전체적인 드라마를 많이 수정했고, 모르가나는 원작의 이야기를 많이 가져온 편이지만 그래도 전반적으로 바뀌었다.

Q. 원작자 입장에서 보았을 때, 바뀐 부분 중 어떤 점이 가장 인상 깊었나?
제스로 컴튼: 아가멤논의 배경을 영국에서 독일로 바꿨다는 점이 신선했다. 배경이 바뀌면서 남자 주인공의 국적 역시 영국에서 독일로 변경되었는데, 영국 배우들과 공연을 했다면 그런 변화를 만들지 못했을 거다. 그랬다면 영국배우들이 어색한 독일 액센트를 썼을 텐데 드라마에 전혀 도움이 안 될 것 같다. (웃음)

이 작품은 제1차 세계 대전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전쟁이란 일반적인 테마이기 때문에 실제로 배경이 어떤 전쟁인지 무관하다고 생각한다. (한국 공연에서) 주인공의 국적을 독일군으로 바꾸면서 영국사람 혹은 독일 사람의 관점이 아닌 ‘인간’이 전쟁을 보는 관점을 그린다는 내 견해를 도와준 것 같아 감명을 받았다.
 
Q. 두 배우 모두 첫 공연을 마무리한 소감은?
오종혁: 기억이 없다. (웃음) 그렇게 석준이 형이 ‘흥분하지 마라, 70%만 해라’ 하셨는데 미쳐서 날뛰었다. 남아있는 공연 기간에 다듬어 가야 할 것 같다. 빨리 다듬어져서 더 좋은 상태의 연기를 보여드릴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게 바람이다.

박훈: 이틀 동안 전 배역을 만나고 3개 에피소드를 끝냈더니 처음으로 발 뻗고 잤다. 그전에는 너무 불안해서 (잘 못 잤다). 전쟁에 갇혀있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이 작품 오래간만에 엄청나게 고민했다. 많은 분들에게 도움을 받았고, 그러면서도 내 색깔을 유지할 방법과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생각을 많이 했다. 일단은 큰 사고 없이 잘 올렸고, 보시는 분들이 큰 불편이 없었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프리뷰 기간에 바꿔 나가면서, 완성도 있는 공연을 보여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Q. 트릴로지의 특징은 좁고 사방이 막혀있는 무대이다. 배우로서 처음 공연장에서 연기할 때 소감은 어땠는지?
오종혁: 첫 공연의 첫 등장이 나였는데 숨이 안 쉬어졌다. 새삼 ‘이렇게 가깝구나’ 하고 다시 느꼈다. 연습 때는 스탭들이 관객 역을 해주셔도 한계가 있어 가깝다는 느낌을 못 느끼다가 공연 때 한 발 딛는 순간 중압감이 나를 꽉 누르고 있어서 숨 쉬는 게 어려웠다. 많은 작품을 해보지는 않았지만, 정말 숨결이 닿을 정도의 거리라는 게 놀라웠다.

박훈: 이 정도 거리에서는 안전상의 문제나 시각적인 문제가 발생한다. 가까이서 보면 좋은 건 있지만, 전체가 안 보인다. 우리가 프로시니엄 무대를 평범하게 생각하지만, 그 무대는 거리가 있어 전체를 볼 수 있다. 반면 이 작품의 매력은 어느 정도의 시각성을 포기하더라도 배우가 가지고 있는 미묘한 심리나 표정이 하나하나 보인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무대는 포탄 소리가 나면 바닥이 울리더라. 포병 출신이라 울림을 어느 정도는 아는데, 우퍼 진동과 포탄 진동이 거의 유사해 공간이 주는 힘에 압도당했다. 대신 공간이 좁으니 집중은 잘된다.
 
Q. 공연 마지막에 군번줄을 걸면서 막을 내리는 이유는?
김태훈: 사실 군번줄은 소속을 나타내는 줄이고, 죽었을 때 시체가 누구인지 확인하려는 목적으로 남북전쟁에 먼저 개발된 거라고 한다. 그 이후 전쟁에서 ‘아, 이게 유용하다, 죽은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다’ 해서 전 세계적으로 사용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너무 끔찍한 이야기다. 그럼 그전까지는 신원을 어떻게 파악한 걸까 고민하다가 문득 <히스토리 보이즈>라는 공연을 할 때 ‘옛날에는 시체를 비료로 썼다’는 대목이 생각났다. 죽으면 인간으로 존중받지 못하는, 고깃덩어리로만 남게 되던 시대에서 그래도 그나마 사람으로 존재할 수 있는, 이름이라도 알려줄 수 있는 의도로 군번줄이 개발된 것 같다.

우리 작품에서도 캐릭터가 참 많이 죽는다. 어느 날 우리가 죽음을 너무 가볍게 다루는 건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지만, 1차 대전을 포함해 죽은 수많은 군인에게 바치는 헌정과 경배의 의미로 군번줄을 놓고 돌아가고 있다. 무대 위에서 군인으로 존재하다가, 공연이 끝나면 내려놓고 무대 밖을 빠져나가는 의미이기도 하다.
 
Q. ‘맥베스’에서 극의 내용이 셰익스피어의 연극(극중극으로 삽입)과 전쟁 중 내용이 중첩되어 진행된다. 결말까지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비틀어볼 생각은 없었는지?
김태훈: ‘맥베스’를 어떻게 각색할지 마지막까지 고민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처음에는 러시아로 바꾸려고 생각했다. 영국, 독일, 러시아 순으로. 러시아의 차르(tsar)가 무너지고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공화정이 되었다가 다시 레닌이 혁명을 일으켰던 이야기를 ‘맥베스’에 담자, 했는데 러시아 군복을 또 사야 하나…고민이 되더라. 돈도 많이 들고 (웃음)

여러 가지 고민 끝에 지이선 작가가 참호 안에서 벌어지는 극중극으로 진행을 해보겠다고 했다. 그런 와중에도 계속 고민을 했는데, 어느 날 ‘맥베스 역을 하게 된 배우 마크 장군을 죽이자’고 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과는 비슷하지만, 결말은 매우 다르다. ‘맥베스’는 그 당시 맥베스가 죽고 덩컨이 왕이 되어 스튜어트 왕조가 이어진다. 그러니까 맥베스의 아픔도 다뤄지지만 그의 비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면서 지금 왕조를 칭송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반면에 우리의 ‘맥베스’는 자신이 총살당할 것을 각오하고 다른 병사들을 죽음으로 내몬 마크 테일러라는 장군을 처형하는 민중들의 이야기다. 쿠데타에서 시작해 왕정의 몰락, 공화정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유럽 여러 국가에서 빈번하게 일어났던 일이었고, 우리 작품에서는 그 상황을 다루고자 했다. 그래서 극중극인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와 <벙커>는 비슷한 형태로 가고 있지만 전혀 다른 결말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Q. 한국 공연에서 이렇게 ‘맥베스’에 새로운 시선을 담았는데, 원작은 어떤 이야기였는지?
제스로 컴튼: 영국에서는 셰익스피어의 대사를 그대로 인용해서 활용했다. 네 배우가 나오는 공연이다 보니 네 캐릭터만 나올 수 있게 정리했던 정도였다. 전투에서 공연이 시작되어 한 병사가 전쟁의 트라우마로 환각을 보고, 참호 안에서 아내를 죽이게 되는 원래 (셰익스피어) 이야기와 같았다.

사실 (영국 작품에) 아쉬움이 많이 남았었는데, 원래 ‘아가멤논’, ‘모르가나’처럼 재해석을 하는 게 ‘트릴로지’에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영국에서는 ‘맥베스’라는 이름을 걸고 공연을 하면 사람들이 당연하게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기대하기 때문에 바꿀 수 있는 여지가 적었다.
 
Q. ‘모르가나’ 에피소드에서 랜슬롯의 이름은 윌리엄인 것 같은데, 아더와 가웨인은 이름이 설정되어 있지 않은 건가. (해당 에피소드에서는 각 캐릭터가 이름이 아닌 성, 혹은 별명 위주로 불린다)
김태형: 원래 지이선 작가가 랜슬롯, 아더, 가웨인, 가레스의 이름을 주지 않았다. ‘왜 이들의 이름을 주지 않느냐’고 물어봤더니 ‘‘모르가나’에 나오는 병사들에게는 이름을 주고 싶지 않다. 가장 밑바닥에 있는 병사들이 이름 없이 희생되어 왔기 때문에 이름을 주지 않겠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이름을 짓겠다고 했지만, 사실 극 중에서는 (이름을) 거의 부르지 않는다. 마지막까지 지이선 작가는 이름을 부르는 것에 대해서 의문을 품긴 했지만, 다 같이 조율한 뒤에 극 후반 아더가 랜슬럿에게 ‘윌리엄’이라는 이름으로 한 번 부른다. 그러다 마지막에 아더가 군번줄을 보면서 친구들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기 시작한다. 이런 장면을 통해 그들의 진짜 이름이 잊혀 간다는 걸 표현하고 싶었다.

박훈: 마지막에 불리는 이름은 실제 전사자들의 명단에 있는 이름이다.
김태형: 이름을 그냥 지으면 안되겠다 해서, 사백몇십만 명의 전사자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웹사이트에서 흔한 이름을 뽑았다. 그중 성민이가 12명의 이름을 골라 순서대로 불러준다.

Q. 앞으로 관객들에게 어떤 작품으로 기억되고 싶은지?
김태형: 좁은 공간, 한정된 객석, 가까운 거리, 몰입되는 이야기를 통해 관객들이 이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을 강렬하게 체험할 수 있도록 만들고 싶었다. <벙커>에서는 <카포네>보다 더욱 격한 감정과 정서를 경험하실 수 있을 것 같다. 전쟁의 참혹함이나 비인간성, 그것에 매몰된 사람들의 희생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마냥 편하지는 않을 수 있지만, 각자 삶에서 원동력이 되거나 반성이 되거나 비판 거리가 되어 생각하고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시간이 될 거라고 믿는다.
 
<벙커 트릴로지>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었던 이날 배우와의 만남은 <벙커 트릴로지> 가족들의 소감과 다짐을 끝으로 마무리되었다.
 
“항상 이런 자리에서 말을 못하는 편이지만, 주위 분들이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해주셔서 다행이다. 앞으로 열심히 공연하겠다.” (오종혁)
“피로가 누적된 사람들의 이야기라 관객들이 지치실까 봐 걱정된다. 저희도 최대한 메시지를 똑바로 전달해서 좋은 작품으로 보답하겠다.” (박훈)
 “공연을 봐주시는 관객들만으로도 감사한데, 이런 자리를 마련해주셔서 감사하다. 여러분에게 이 공연이 의미가 있다는 게 너무나 값지다. (제스로 컴튼)”
“전쟁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전쟁을 핑계로 정권을 연장하는 이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그런 생각들을 공유할 수 있는 경험이 되셨으면 좋겠다. (김태형)”



글: 조경은 기자 (매거진 플레이디비 kejo@interpark.com)
사진: 기준서 (www.studiocho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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