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추지 않는 도전지상주의자 <데스노트> 한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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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한지상이 뮤지컬 <데스노트>로 돌아왔다. 자신이 믿는 정의를 위해 살인도 서슴지 않는 고등학생 라이토 역이다. 처음에는 순수하고 공부 잘 하는 모범생이었지만 데스노트에 이름을 적어 살인을 저지르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어둠에 잠식되는 입체적인 캐릭터다. 연기하기 만만치 않은 배역이지만 한지상은 자신만의 해석을 바탕으로 좀 더 설득력 있는 라이토를 만들어가고 있다. 작품에 대해 품어왔던 그동안의 생각들을 조근조근 풀어내는 한지상의 눈은 명석한 고등학생처럼 반짝거렸다.
 
<완득이>, <넥스트 투 노멀> 이후 세번째로 고등학생 역할을 맡았네요. 기분이 어떠세요?
올해 2000년생이 고2가 된다던데 저는 지금 그 나이의 두 배가 되어가네요.(웃음) 예전에 이순재 선생님 인터뷰를 봤는데 “할아버지 연기는 일단 할아버지 같아야 한다”고 하시더라고요. 너무나 자명한 거죠. 일단 딱 봤을 때 할아버지 같지 않으면 다른 디테일을 살려도 관객들은 몰입할 수 없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최대한 고등학생처럼 보일 수 있도록 노력했어요. 지금 제 키 평균 체중에 비해 11kg이 덜 나가는 상태고요. 메이크업과 헤어스타일에도 제 의견을 많이 반영하고자 했어요.
 
라이토를 표현하는 데에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이 있다면요?
한국 연출과 일본 연출부 분들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얘기가 “라이토는 순수한 고등학생에 불과하다”였어요. 라이토에게서 처음부터 악한 성격이 보이면 연기가 좀 더 쉬웠겠죠. 하지만 라이토는 백지처럼 순수했다가 살인마 키라로 변해가는 복합적인 인물이거든요.
 
원래 순수한 사람들이 무언가에 더 쉽게 빠져들잖아요. 평소 공명심, 정의감에 불타는 순수한 라이토는 데스노트를 갖게 되면서 자신이 지도자가 되어 진정한 정의를 구현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고 그것 때문에 결국 사신이 준 악의 세포에 완전 전이돼 버리죠. 이런 해석으로 첫 단추를 꿰었고 이후의 연기를 디자인 해 나갔어요. 연기도 일종의 디자인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번에 제가 잡은 연기 디자인 노선은 이래요.
 
라이토는 순수해서 미치기 쉬운 인물
허무주의적 메시지 두드러져


열두 권짜리 원작 만화를 3시간으로 줄이면서 작품의 메시지도 조금 달라진 것 같아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류크가 말해요. “라이토, 네가 특별해서 데스노트를 준 게 아니라 내가 심심해서 떨어뜨린 노트를 네가 우연히 주운거다.” 아주 염세적이고 허무주의적인 메시지죠. 결국 사신이 짜 놓은 판에 인간이 좌우된 거니까요. 이게 이 극의 철학이에요.

또 하나 중요한 포인트가 있는데, 1막 첫 장면에서 전 배우가 ‘키라, 키라!’하고 합창하거든요. 그 장면의 연출의도는 “어느 누구든 키라가 될 수 있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배우들이 갑자기 눈빛을 바꾸면서 ‘키라’를 외치며 키라가 된 연기를 하는 거죠. 결국 이 장면도 작품 전체의 메시지와 연결돼요. 수많은 지구인들 중 누구라도 키라가 될 수 있고 라이토는 그 중 한 명에 불과하다는 의미니까요. 첫 장면부터 결말까지 일관된 메시지를 말하고 있어요.
 
"제가 라이토라면 안 그랬을 것 같아 수정을 제안했죠"

초연과 달라진 장면이 있나요?

죄송하지만 제 자랑 한번만 할게요. (웃음) 이건 원래 없었던 연출인데 도입부에서 라이토가 노트를 주웠다가 다시 노트를 버리는 장면은 제 아이디어로 수정된 장면이에요. 원래는 라이토가 노트를 주워 흉악범의 이름을 적은 후 우연히 들려오는 뉴스를 통해 사망사실을 알게 되기까지 노트를 손에 쥐고 있거든요. 근데 제 생각엔 보통 사람들이 길에서 주운 수상한 노트를 계속 쥐고 있을 것 같지 않더라고요. 동전 하나 주울 때도 고민하는데, 데스노트라고 쓰여있는 이상한 공책을 집에 가져가려는 사람은 없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리허설 때 “한번 보여드릴 게 있다”고 제안했죠.

노트에 이름을 적고 별 반응이 없으니 바로 버리고 지나쳐 가려는데 뉴스 소리가 라이토를  붙잡는 거죠. 깜짝 놀라 되돌아 뛰어가 다시 노트를 집어 들고 자신이 적은 인물이 죽은 걸 확인해요. 그 순간 “이 노트가 내 노트구나. 운명이구나”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짧은 대목이지만 라이토가 일반적인 반응을 보여야 관객들도 공감대를 가질 수 있게 되는 거라고 생각해서 수정을 제안했어요.
 
지상씨의 해석에 따라 라이토의 성격도 초연과는 조금 달라졌을 것 같은데요
제가 원작을 보면서 느낀 부분인데 라이토는 임기응변에 능한 연기자더라고요. 그런 면모를 라이토가 미사(벤 분)를 유혹하는 장면에서 드러냈어요. 원래 그 장면은 라이토가 미사에게 “내 여자친구가 되고 싶으면 내가 시키는대로 해 봐”라는 식으로 다소 상남자스럽게 다가가요. 하지만 저는 제가 라이토라면 그런 식으로 여자에게 접근하지는 않을 것 같다고 연출부에 얘기했어요. “나도 너랑 연애 시작하고 싶은데, 방해하려는 사람이 있어. 네 도움이 필요한데”라는 식으로 자상하게 접근해서 미사의 마음을 열어야죠. 그 다음 미사에게서 원하는 걸 얻어낸 다음 매몰차게 돌려보내는 순간부터 키라의 면모를 드러내도 돼요. 돌변하는 간극이 클수록 긴장감이 살아나니까요.
 
초연때부터 워낙 쟁쟁한 배우들이 출연했고 팬들도 많은 작품인데, 한지상만의 다른 점을 보여줘야겠다는 부담, 혹은 초연 라이토와 비교하는 시선 이런 것들이 느껴진 적은 없었나요?
이상할 정도로 저는 그런 의식은 안됐어요. 연기에 있어서 유일무이한 답은 있을 수 없는 거잖아요. 내가 구축하고 내가 디자인한 내 캐릭터도 답일 수 있다는 생각이에요. 다른 게 꼭 틀린 거 아니니까요. 관객분들이 그냥 넓게 봐주셨으면 하는 바람이죠.
 
김준수 씨와 투톱으로 극을 이끌어 나가잖아요. 둘이 호흡은 어때요?
제가 느낀 준수는 되게 순수한 사람이에요. 첫 음악연습 날부터 계속 귓속말로 곡 설명을 해주더라고요. 그게 되게 인상적이었어요. 그 때 이후로 작품에 대한 이야기들을 풍부하게 해주더라고요. 이야기 보따리가 이만큼 있는 느낌이랄까요?(웃음) 저도 준수 얘기를 듣는 게 재밌어요. 덕분에 준수가 해석한 L이 어떤 느낌인지 흠뻑 느꼈고 그에 맞는 연기적인 리액션을 만들었던 것 같아요.
 
라이토는 진정한 정의를 구현하는 데에 법이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고 L은 법과 절차를 무시한 키라의 심판은 살인행위일 뿐이라는 입장이잖아요. 지상씨는 라이토와 L 둘 중 어느쪽에 더 끌리셨나요? 
식상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라이토와 L을 섞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라이토의 사상은 엄청난 파퓰리즘이에요. 난세에는 영웅도 탄생하지만 영웅을 빙자한 위험인물도 탄생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라이토가 바로 그런 위험인물인거죠. 원작에서도 결국 키라 때문에 많은 이들이 죽고 나라가 엉망이 되잖아요. 범죄자는 무조건 죽이는 라이토의 강경한 정의구현 방식은 결국 더 큰 악을 초래할 뿐이라고 생각해요.
 
"무대를 사랑하지만 다양한 분야 도전하고파"

잠시 뮤지컬 무대를 떠나 120부작 드라마 <워킹맘 육아대디>에 출연하셨잖아요. 어떤 점이 수확이고 어떤 점이 힘드셨나요?

대학교에서 연기를 전공할 때부터 목표 삼았던 ‘연기자로서의 성장’을 추구할 수 있는 장이 열렸다는 점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기회이자 순간들이었죠. 전 무대를 너무나 사랑하지만 연기자로서 연기를 할 수 있는 곳이라면 분야를 가리지 않고 도전하고 싶은 욕망이 있어요. 저 말고도 다른 많은 배우들이 그런 포부를 갖고 있을 거에요.
 
드라마와 뮤지컬은 제작 시스템도, 연기 방식도 다르잖아요. 힘들지 않으셨나요?
그렇죠. 드라마는 아무래도 카메라 예술이니까 좀 더 클로즈업되고 일상적이고, 무엇보다 리허설을 거의 안해요. 해봤자 테크 리허설, 카메라 리허설 한 번 하고 그냥 찍는 거에요. 뮤지컬 할 때는 리허설을 연습이라는 개념으로 다같이 모여서 두 달 넘게 하잖아요. 두 달을 리허설하는 무대 예술과 당일 오전에 리허설 한 번 하거나 시간이 없으면 못하는 드라마는 큰 차이가 있죠.
 
전 연습을 정말 좋아하는 편이에요. <데스노트> 연습기간에는 연습실이 너무 좋아서 퇴근 러시도 피할 겸 매일 한두시간 더 연습했어요. 그 정도로 저는 연습을 좋아하는데 리허설 없이 바로 촬영에 들어가는게 생소했죠. 시스템의 문제라기보다는 저 스스로 준비되지 않은 면들을 발견해서 힘들었던 거죠 뭐. 그래도 120부중에 70~80부 넘어가니까 조금은 나아지는 모습이 보이더라고요. 무대에 선 지 올해로 13년째 되는데 무대가 편하게 느껴진 건 7~8년차였던 것 같아요. 드라마 연기도 그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편해질 거라고 예상하며 기다리고 있어요.
 
정상급 뮤지컬 배우로서 대우받으며 작품활동 할 수 있는데 굳이 왜 드라마까지 하면서 사서 고생하는지 의아해 하는 시선도 있어요.
저는 바닥부터 다시 시작한다 해도 도전 지상주의예요. 저는 일적인 부분에서는 지나칠 정도로 진보적인 태도를 갖고 있어요. 어떻게든 쇄신할 수 있고 도전할 수 있다면 그 방향이 옳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특별히 보컬 레슨 안 받고 가창력을 발전시킨 배우로 유명하시잖아요. 뮤지컬 배우를 꿈꾸는 후배들을 위해 노래 잘하는 팁을 주신다면요?

일단 성악을 전공한 분을 찾아가서 아주 베이직한 면들을 배워야해요. 사실 저는 어깨너머로 혼자 배웠지만 무대에 서기 위해 기본적인 성악발성은 제대로 익혀두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자기 소리를 계속 모니터링 해야 해요. 녹음을 해서 들어보면서 자신을 파악해야 하죠. 저는 항상 제 소리를 녹음해 들으면서 연습했어요. 마지막으로 좋은 뮤지컬 배우가 되기 위해선 평소에 듣는 음악도 장르를 가리지 말라고 조언해주고 싶어요. 좋아하는 아티스트는 다를 수 있겠지만 특정 장르만 듣지는 말라고 조언해주고 싶어요.



글: 김대열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kmdae@interpark.com)
사진 : 기준서(www.studiocho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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