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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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짓을 해서라도 보시길 권합니다"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리뷰  

160분이 눈깜짝할 사이에 지나갑니다. 고전을 재해석한 연극이라기에 그것도 중국고전이라니, 극장에 들어가기 전에는 이상한 거리감이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제 아무리 고선웅 연출이라지만 고전은 고전 아니겠습니까. 막이 열리고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최면에 걸리듯 극 속으로 몰입되었습니다. 고선웅 연출의 특유의 리듬감과 <아리랑>과 <푸르른 날에>서도 보여준 비극 속에서 웃음을 잃지 않는 애이불비, 복수를 주제로 한 장엄한 원작이 만나 연극적 에너지가 폭발하는 느낌입니다.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중국의 4대 비극 조씨고아를 고선웅 연출이 각색한 작품입니다. 원작은 중국 사마천의 사기에 수록된 춘추시대 조씨 가문의 역사적 사건을 원나라 작가 기군상이 재구성한 작품으로 서양에서도 가장 많이 알려진 동양고전이라네요. 이미 1755년 볼테르는 5막 비극 <중국고아>로 개작하여 파리에서 상영했고 비교적 최근에는 첸카이거 감독의 영화로도 나올 만큼 중국인들에게는 익숙한 이야기입니다.

이야기의 골계는 복수의 대서사시입니다. 권력에 눈이 먼 무인 도안고(장두이)는 문인 조순을 질투하고 조씨 가문을 멸족하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조씨일가 300명이 몰살 당하고 조순의 손자이자 공주의 아들인 조씨고아만이 필부 정영에 의해 살아남습니다. 약제를 파는 평범한 필부 정영(하성광)은 막 아기를 순산한 공주에게 약제를 주러 갔다가 조씨 집안의 마지막 생명, 조씨고아를 살려야 하는 가혹한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립니다. 도안고는 조씨고아를 죽이기 위해 온 나라의 갖난아기를 잡아드리라 하고 정영은 마흔다섯살에 얻은 소중한 자신의 아기를 조씨고아와 바꾸며까지 조씨 집안의 마지막 핏줄을 살려냅니다. 조씨고아의 부모와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결하거나 죽임을 당하며 정영에게 20년이 지나 아이가 어른이 되면 복수를 해달라고 하고, 정영은 그 약속을 지켜냅니다. 하지만 20년을 기다린 복수의 끝은 통쾌하지도 시원하지도 않습니다.
 
복수의 끝이 주는 공허함으로 가득한 2막 마지막의 울림은 길고 감동적입니다. 울림의 중심에는 필부 정영을 맡은 하성광 배우의 역할이 큽니다. 1막의 마지막 자기 아이를 희생하면서 조씨고아를 지킨 정영의 절규, “이까짓 게 무어라고” 아이를 들어올리는 장면은 눈물을 참기 힘듭니다. 미물 하나 죽이지 못하는 소심한 정영이 단 한마디의 말,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감내하는 희생과 공허함은 배우 하성광의 섬세한 연기를 통해 설득력을 지니고 절절하게 와 닿습니다.

붉은 커튼만이 드리운 미니멀한 무대와 간단한 오브제들은 배우들과 이야기의 주제에 더욱 효과적으로 몰입시킵니다. 또한 조순이 나뭇가지를 사타구니에 끼고 사뿐사뿐 말을 타는 장면이나 조삭이 죽기 전 유언을 남기며 춤을 추는 듯한 동작, 부채를 담장 삼아 넘어가는 움직임 등 물 흐르듯 유연하고 탄성이 느껴지는 자유로운 연출이 돋보입니다.  

이토록 아름답고 배우의 힘이 강렬하게 남는 연극은 참으로 오랜만입니다. 공연은 2월 12일까지 명동예술극장 
 
글: 김선경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uncanny@interpark.com) 
사진 : 기준서 (www.studiocho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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