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용범 인터뷰① 좋은 작품이 관객을 부른다는 믿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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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일 진행된 왕용범 연출과의 인터뷰는 그에 대한 많은 오해를 본격적으로 파헤치고 풀어낸 자리였다. 때로는 상업적 요구와 타협하며, 때로는 억울함을 다스리며 고군분투한 끝에 세상에 자신의 진가를 알린 한 창작자의 오랜 투쟁기를 듣는 자리이기도 했다. 스물 다섯 살에 입봉해 <삼총사><잭 더 리퍼>등을 거쳐 창작뮤지컬 <프랑켄슈타인>으로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실력을 인정받은 왕용범 연출. 인터뷰의 첫 번째 순서로 그의 지난 히스토리를 몇 가지 키워드로 돌아봤다.
 
청춘의 열정 바친 <뮤지컬 밑바닥에서>
그는 어려서부터 천상 연출이었다. 장기자랑을 해도, 합창 대회에 나가도 늘 지휘하고 연출하는 역할을 맡았다. 자연스레 대학교 전공도 연극영화과로 정했다. 죽도록 맞을 각오를 하고 부모님께 그 생각을 밝혔는데, 아버지가 덤덤히 “한 놈 나올 줄 알았다”고 말씀하셨다. 알고 보니 집안 어른들 중에 영화 조연출, 모델, 가수 등 ‘끼’ 있는 분들이 많았던 것.
 
<밑바닥에서>는 그에게 여러 모로 각별한 작품이다. 대학교 1학년, 교수님이 건네준 <밑바닥에서> 대본을 들고 김수로, 이종혁 등 서울예대 93학번 동기들과 노숙까지 해가며 작품 속에 푹 빠져 지냈다. 순수하고 뜨거운 열정을 다 바쳤던 그때의 추억 때문에 십여 년 후, 공연을 그만둬야 하는 상황에서 <밑바닥에서>를 떠올렸다고.  
 
“집 사정이 안 좋아져서 제가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이 됐어요. 남동생이 저한테 ‘돈은 내가 벌 테니 형은 연극을 해’라고 하는 거에요. 그 말을 듣고 오히려 연극을 그만하기로 했어요. 장남인 제가 돈을 벌어야겠다 싶었죠. 그때 마지막으로 했던 게 <뮤지컬 밑바닥에서>였어요. 문예진흥기금 1000만원을 받아서 500만원은 대관료로 내고 500만원으로 티켓을 찍었죠.”
 
주위에선 다들 의아해했다. 왜 그런 비극을 뮤지컬로 만드냐고 했다. 당시 뮤지컬은 밝고 즐거운 작품 밖에 없었다. 그러나 왕용범은 그저 만들고 싶은 대로 작품을 만들었다. 어차피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으니 무서울 것도 없었다. 막이 오르자, 80석 규모의 소극장에 매일같이 120명의 관객들이 모여들었다. 소극장 뮤지컬로서는 이례적으로 한국뮤지컬대상 4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됐고, 음악상도 수상했다. 대성공이었다.
 
현실의 쓴맛 맛본 <카르멘>
그러나 이어진 일들은 그로 하여금 현실의 쓴맛을 톡톡히 맛보게 했다. <뮤지컬 밑바닥에서>가 성공하자 여러 제작사가 그를 찾았고, 왕용범 연출은 공연을 그만두려던 생각을 접고 몇몇 작품을 맡았다. 그 중 하나가 뮤지컬 <카르멘>이었다.
 
“개막 45일 전에 연락이 왔어요. 그 단체가 다른 작품을 준비하다 엎어져서 저한테 급하게 연락을 한 거에요. 그래서 계약서를 쓰고 45일만에 공연을 올렸어요. 무대 제작비를 2천만원 밖에 못 받았지만, 젊었을 때니까 그냥 감수하고 열심히 했죠. 공연도 어쨌든 잘 됐어요. 근데 큰 투자자 한 사람이 공연을 보러 와서 한 마디 한 거에요. ‘연출이 좌파야?’라고.”
 
스스로 ‘병’이라고 할 정도로, 왕용범 연출은 어떤 작품을 맡든 그 안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재창작해내는 버릇(?)이 있다. 그때도 그는 <카르멘> 이면에 있는 스페인 소수민족의 아픔에 주목하고 그들의 투쟁기를 그렸는데, 그 내용이 투자자의 눈에 거슬렸던 것. 결국 왕용범 연출은 투자자의 압력에 못 이겨 중요한 장면을 삭제해야 했다. 그 사건으로 그는 원하는 작품을 만들려면 ‘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칼’ 갈며 실력 키운 <삼총사><잭 더 리퍼>
힘을 키우기 위해, 그는 일단 작품이 들어오는 대로 연출을 맡았다. 그리고 실력을 쌓아나갔다. <삼총사>는 음원 라이선스만 들여와 대본을 새로 썼고, <잭 더 리퍼>도 아예 새로 썼다. 체코로 날아가 현지 스텝들과 장장 30여시간 회의하며 그들을 설득했고, 그들의 인정을 받아냈다. 그래도 <삼총사>나 <잭 더 리퍼>는 일반 관객들의 인식 속에서 여전히 ‘라이선스 뮤지컬’이었다.
 
“그냥 ‘체코 뮤지컬’로만 작품을 홍보한 거죠. 극본은 다 제가 썼지만. 그래도 아무튼 저한테는 행운이었어요. 작업을 많이 해볼 수 있었으니까. 제 나이로 보면 정말 많이 한 것 같아요. 그건 정말 운이 좋았죠. 감사하고.”
 
그리하여 2011년, 창작뮤지컬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위해 그는 왕용범프로덕션을 만들고 사무실을 차렸다. 그리고 창작뮤지컬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프로덕션이 많이 생겼지만, 그 때는 아무도 창작에 투자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내가 해야겠다, 하고 그때까지 번 돈을 다 부어서 만든 게 <프랑켄슈타인>이었죠.”
 
뮤지컬 <잭 더 리퍼>

좋은 작품이 관객을 부른다 <프랑켄슈타인>
<프랑켄슈타인>을 완성하는 데는 꼬박 3년이 걸렸다. 그 동안 수많은 연구논문을 읽으며 공부한 분량만 2천 장이 넘는다고. 초연 당시 제작비가 부족하다는 제작사의 말에 그는 연출료도 받지 않았다. 그 돈을 무대에 써달라고 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작품의 완성도였다.

그리고 모두가 알고 있듯, 2014년 첫 무대에 오른 <프랑켄슈타인>은 큰 성공을 거뒀다. 제8회 더뮤지컬어워즈 9개 부문을 비롯해 대부분의 뮤지컬상을 휩쓸었고, 흥행에도 성공했다. 대극장 공연으로는 처음으로 일본에 수출됐고, 올해 초 열린 도쿄 공연은 공연이 끝나기도 전에 앵콜 공연이 결정됐다. 무엇보다 그를 기쁘게 한 것은 ‘좋은 작품은 관객을 부른다’는 믿음이 증명됐다는 것이다.
 
뮤지컬 <프랑켄슈타인>

“제가 경험하고 나니까 옛말이 틀리지 않은 것 같아요. 결국은 좋은 작품이 많은 관객을 부르는 것 같아요. 사실 한일 관계가 안 좋다 보니 일본 관객들이 한국 작가의 작품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걱정했어요. 근데 일본 공연의 유료 관객 점유율이 95%이상이었어요. 2주차부터는 다 매진된 거죠. 공연 전회를 보고 대본을 다 받아쓴 관객도 있어요. 우리가 일본을 쉽게 이야기하지만, 일본은 전세계에서 공연 시장이 세 번째로 큰 나라에요. 그런 나라에서 공연이 잘 됐다는 것이 너무나 감격적이죠.”

다시 처음으로 <뮤지컬 밑바닥에서>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의 성공, 그리고 상업적 요구와 타협했던 지난날에 대한 반성은 그를 다시 <뮤지컬 밑바닥에서>로 이끌었다.
 
“작년과 올해 <프랑켄슈타인>로 행복했던 반면에, 상업주의 뮤지컬들이 무너지는 걸 보면서 만감이 교차했어요. 우리나라 뮤지컬 시장에서 가장 큰 문제가 일부 투자금이 건전한 투자가 아니었다는 거에요. 거기에 대해 제작사가 현명하게 대처하지 못해서 빚이 더 커지고, 캐스팅비는 커지는데 작품에 대한 투자는 줄고. 가장 힘든 건 함께 하는 앙상블들, 크루들이 돈을 제대로 못 받는 거였어요. 내가 그분들께 꼭 같이하자고 한 건 아니었지만, 너무 미안한 거죠. 그래서 이제 그런 작업은 못하겠다고 생각했어요. 초심으로 돌아가자, 그래서 <뮤지컬 밑바닥에서>를 하게 된 거에요.
 
<뮤지컬 밑바닥에서>는 업계에 제 이름을 알린 첫 작품이기도 하지만, 타협 없이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을 쫓았던 젊은 시절의 영혼이 담긴 작품이에요. 십 몇 년 만에 대본을 다시 꺼내서 보니 ‘내가 이걸 어떻게 썼지?’하는 부분들이 있어요. 저도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타협하고, 그 타협했던 것들 때문에 스스로 상처받는 시간들을 보냈잖아요. 그랬는데 지금 와서 그때의 대본을 보니까 너무 용기 있는 거에요. 그래서 젊은 날의 저한테 많이 배워요.”
 
* 관련기사 - 왕용범 인터뷰② “관객 악평도 이해…10년치 공연 계획 있어”

글: 박인아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iapark@interpark.com)
사진: 기준서 (www.studiocho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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