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껏 빚은 마음을 담아, <맨 끝줄 소년> 전박찬

  • like9
  • like9
  • share
공부도, 놀이도, 무엇에도 흥미가 없는 소년 클라우디오는 교실 맨 끝 줄에 앉아 하루를 보낸다. 그의 눈길을 끄는 것은 자신과 전혀 다른 친구 ‘라파’ 가족의 일상뿐이다. 소년은 문학 수업 과제를 대신해 자신이 훔쳐본 라파 가족의 일상을 글로 써내려 가고, 그의 글을 눈여겨본 문학 교사에게 디킨스, 체홉, 세르반테스의 책을 빌려 읽으며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게 된다. 외롭고 무료한 이 소년은 글쓰기를 통해 텅 빈 마음을 채우고 성장할 수 있을까?
 
삼십 대의 배우 전박찬은 재작년 <맨 끝줄 소년>의 국내 초연에서 완연한 소년이 되어 관객들을 클라우디오가 써내려 가는 글 속으로 이끌었다. 서늘하고 비밀스런 그의 눈빛은 무대 곳곳을 촘촘히 채우며 여운을 남겼다. 이제 두 번째 공연을 앞둔 지금, 그는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모습’으로 클라우디오를 연기하겠다고 말한다. <맨 끝줄 소년>은 그가 몇 차례 눈을 붉히며 떠올렸던 故 김동현 연출의 유작이기도 하다. 여러 의미에서 이번 무대에서는 그가 더욱 정성스레 빚어낸 마음을 만날 수 있을 듯하다.
 
Q 초연 때 공연을 봤는데, <맨 끝줄 소년>은 해석의 갈래가 무척 풍부한 작품 같습니다. 이 작품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 가장 어려웠던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초연 때는 클라우디오의 순수한 글쓰기와 욕망, 도덕 사이에서 굉장히 어려운 시간들을 보냈어요. 그 때는 그런 것들에 너무 감정적으로 다가갔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번에는 그 글쓰기라는 것을 좀 더 세밀하게 들여다보고 있어요.
 
클라우디오라는, 어떤 것에도 흥미가 없고 결핍이 있는 소년이 우연히 문학 숙제를 하면서 헤르만 선생님을 만나고 자기 글을 써내려 가잖아요. 처음에는 자신이 본 것을 쓰지만, 나중에는 그의 관점도 들어가게 되죠. 그 글쓰기의 큰 틀은 바뀌지 않지만, 초연 때는 ‘보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면 지금은 ‘쓰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요. 그 때는 ‘보는 것’이 너무 위험해 보였다면 이번에는 연습하면서 ‘쓰는 것’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누구나 (타인의 삶을) 볼 수 있죠. 거기서 그치면 괜찮지만, 클라우디오는 그것을 자신의 관점으로 써내려 가니까요. 그 차이가 이번에 연습하면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에요.
 
Q 초연 당시 무대에서 느껴졌던 객석의 분위기나 반응은 어땠나요.
기대 이상으로 굉장히 잘 봐주셨어요. 걱정했던 대로 클라우디오를 싸이코패스로 보신 분들도 있어서 제가 과했다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제가 공연하면서 굉장히 신이 났거든요. 스스로를 좀 다잡아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 같아요.
 
1년 반이 지나고 다시 연습하며 발견하는 것들이 많아요. 그때는 그때 할 수 있는 최선을 해봤으니 지금 할 수 있는 또다른 몫이 생긴 것 같아요. 분명 초연 때와는 다른 접근을 하고 있고, 그걸 보시는 관객들이 클라우디오라는 인물을 또 다르게 받아들이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어요.
 
Q 클라우디오에게 글쓰기라는 행위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클라우디오는 철학을 잘 못하는 아이에요. 원래 문과적 재능이 있는 사람들은 철학을 잘 하고 수학을 못 하는데, 클라우디오는 반대로 철학은 못하고 수학을 잘해요. 그런데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글쓰기가 라파 가족에게 주는 끔찍함을 보게 되고, 그러면서 그가 철학도 이해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결국 클라우디오에게 글쓰기는 소년에서 어른으로 성장하는 과정 같아요.
 
Q 클라우디오에게 글쓰기가 갖는 의미, 그리고 전박찬 배우에게 연기가 갖는 의미가 서로 맞닿는 지점이 있나요?
클라우디오는 글쓰기를 하면서 헤르만 선생님에게 많은 책과 지도를 받죠. 헤르만 선생님과 관점에 대해, 갈등이나 반전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요. 저도 연극을 연습하면서 그런 것들을 계속 생각해요. 어떤 대본을 처음 읽었을 때, 같이 공연하는 사람들과 읽었을 때, 그리고 연습을 해나갈 때마다 제 관점도 계속 바뀌거든요. 클라우디오가 많은 문학을 접하면서 바뀌어가는 것처럼 저도 여러 역할을 접하고 시간을 가지면서 조금씩 성숙해가는 것 같아요.
 
Q 연습 과정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수학과외를 받았다고 들었어요.
극 중 여러가지 수학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방정식, 허수, 적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요. 그런데 관객 분들이 공연을 보실 때 수학을 공부하실 필요는 없어요. 여기서 다뤄지는 수학은 좌표 평면 위에 숫자들이 있는 것처럼 ‘그냥’ 존재하는 것이거든요.
 
아마 관객들이 가장 고민하시는 부분이 ‘허수’일 거에요. 허수는 영어로 ‘imaginary number’라고 하더라고요. 상상할 수 있는 수. 저도 사실 공부할 때 그 개념이 너무 어려웠는데 그냥 받아들이라는 말을 듣고 고민이 풀렸어요. 어떤 수학적 이론으로 이해하시기보다 그냥 상상하실 수 있는 숫자로 받아들이시면 편할 것 같아요.
 
Q 작품엔 나오지 않지만, 클라우디오는 자라서 어떤 어른이 되었을까요?
고민을 참 많이 했어요. 클라우디오가 글을 계속 썼을까? 아니면 여기서 멈췄을까? 그런데 클라우디오는 그 글쓰기를 완성한 후에도 글을 썼을 것 같아요. 이번이 과제로서의 글쓰기였다면, 다음에는 자기만의 소설을 썼겠죠. 그러면서 자신의 결핍을 채울 수 있었을 것 같아요. 그만큼 성장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자신이 본 것을 썼다면, 이후에는 보고 나서, 혹은 보지 않고도 자신이 상상한 것들로 다양하게 글을 쓰는 작가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Q <맨 끝줄 소년>은 김동현 연출의 유작이기도 합니다. 연습하시면서 연출님이 많이 생각나실 것 같아요.
순간순간 많이 생각나요. 제가 2007년에 처음 선생님을 만났고, 선생님과 같이 연극을 한 지 올해로 10년째에요. 재작년 <맨 끝줄 소년>이 마지막으로 같이 했던 작품이긴 하지만, 지금도 저는 선생님과 마지막으로 같이 하는 공연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또는 다른 마지막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 리메이크 연출을 맡은 손원정 선생님은 김동현 선생님과 부부였고, 초연 때는 드라마터그로 작업을 같이 하셨어요. 지금 손원정 연출님이 말씀하시는 것들이 제겐 김동현 선생님이 해주셨던 말과 다르지 않아요.
 
김동현 선생님은…제가 연극을 할 수 있게 만들어주신, 어떻게 하면 배우가 될 수 있을지를 고민하게 해주신, 그리고 제가 고달픈 시간 동안 스스로와의 싸움을 버티게 해주신 고마운 스승이시죠. 제가 (대학교) 3학년 2학기 즈음에 선생님과 첫 작품을 했어요. 선생님이 너무 어렵고 긴장돼서 두통약과 소화제를 하루 몇 알씩 먹을 때였어요. 어느 날 선생님이 저를 따로 부르시더니 “넌 앞으로 너의 배우로서의 연기 세계관을 어떻게 갖고 있니?”라고 물으시더라고요.
 
잠시 생각을 하고 나서 “앞으로 제가 뭘 할 수 있을지, 뭘 해야 하는지를 알고 졸업하는 게 목표에요”라고 말씀드렸더니 한참 저를 쳐다보시고는…말씀하시더라고요. “너 그거 알 때까지 나랑 놀래?”라고.
 
그때가 선생님이 제게 처음으로 연극을 ‘함께’ 하자고 손을 내미신 순간 같아요. 그 이후 매년 선생님과 작업을 했어요. 힘든 순간도 많았지만 늘 저를 꽉 붙잡아 주시는 느낌이었죠. 제가 연기를 정말 못 하고 너무 괴로워서 매일 극장 지하에 있는 화장실에 가서 울 때도, 절대 저를 포기하지 않으시더라고요. 한 번도 저를 놓지 않으셨어요. 많은 순간순간 선생님 생각이 나죠. 어떻게 생각이 안 나겠어요.
 
Q 어떤 계기로 연기자의 길로 들어서게 됐나요.  
저도 학창시절에 클라우디오처럼 흥미거리를 찾지 못했어요.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그냥 시키는 대로만 하는 착한 학생이었죠. 공부도 재미없고, 모든 게 다 지루하더라고요. 그 즈음 우연한 기회에 연극을 봤는데, 너무너무 재미있고 해보고 싶은 거에요. 그래서 연극 반에 들어가서 연극을 하고, 용돈이 생기는 대로 대학로에 연극을 보러 갔어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재수할 때까지 거의 6년간 일주일에 두 편씩 연극을 본 것 같아요. 돈이 정말 없을 때는 교복 입고 극장 앞에 가서 “연극을 너무 보고 싶은데 돈이 없어요”라고 얘기하기도 했어요. 그때는 그러면 들여 보내줬어요. 너무 감사하죠. 그때 좋은 연극을 많이 볼 수 있었어요.
 
그러면서 연극을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처음엔 배우가 아니라 그냥 ‘연극’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연출이나 이론 전공은 입시가 좀 어려워서(웃음) 연기로 입시 준비를 했죠. 대학에 들어간 후에도 연극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지, 훌륭한 배우가 되겠다는 생각은 안 했어요. 그러다 어느 순간 ‘어떻게 하면 배우가 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시기가 찾아왔죠.
 
Q 지금은 어떤 것들을 고민하는 시기인가요.
올해가 정식으로 대학로에 나온 지 10년째에요. 어렸을 때는 뭘 몰라서 연기를 괴롭게 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 어느 시점에 연극하는 즐거움이 다가왔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또 제가 너무 까부는 것 같더라고요. 부모님 앞이나 친구들 앞에선 까불 수 있지만 무대라는 곳은 너무나 무서운 공간이거든요. 그곳에서 두 다리를 잘 붙이고 서 있으려면 마냥 까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은 관객 분들이 무대에 있는 제 모습을 보며 어떤 것들을 가져가실 수 있을지를 좀 더 깊게 고민하는 때가 된 것 같아요.
 
부끄럽지만 과거에는 무대에서 매력적으로 보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어요. 모델이나 배우처럼 멋있고 섹시해 보였으면 좋겠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기도 했죠(웃음). 그런데 그러다 보면 그 인물을 100% 연기할 수 없거든요. 그래서 지금은 다 깨끗이 내려놓으려고 하고 있어요. 그래야 관객들이 공감하고 안아줄 수 있는 인물을 만들 수 있을 테니까요. 그걸 찾아가는 과정이 지금은 너무 힘들어요.
 
이제 <맨 끝줄 소년>으로 관객 분들을 만나잖아요. 지금까지 제가 무대에서 한 번도 보여주지 못한 모습,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어떤 것들을 보여드릴 텐데 그 발걸음이 너무 두렵고 심장이 터질 것 같아요. 어떻게 봐 주실지 너무 궁금해요.
 
Q <맨 끝줄 소년> 중 “인간의 고통, 이면에 존재하는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 그게 진정한 예술의 경지야”라는 대사가 있죠. 진정한 연극, 혹은 진정한 배우란 어떤 존재라고 생각하시나요?
제가 졸업한 학교의 교가에 “이 세상에 보람 있는 일들이 많지만 마음 만드는 것보다 값진 일이 없다”는 가사가 있어요. 이어령 선생님이 쓰신 시인데, 그 가사를 곰곰 생각해보니 연극은 결국 마음을 만드는 일 같더라고요. 정성스럽게 만들어진 마음을 관객과 나누고 그 마음을 통해 위로를 전할 수도, 삶의 중요한 고민들을 하게 할 수도, 스트레스를 풀게 할 수도 있는. 제가 무대에서 그렇게 정성스럽게 마음을 만들어서 관객 분들과 나눌 수 있다면 좋겠죠.
 
Q 끝으로, 많은 분들이 동안 유지 비결을 궁금해하세요(웃음).
일단 제가 동안이 아니에요. 눈에도, 이마에도 주름이 많고 팔자 주름도 있어요(웃음). 근데 제가 나이 든 역할을 할 때는 면도도 안 하고 대충 로션만 바르는데, 이런 공연을 할 때는 적어도 예의를 지켜요. 세수나 운동도 열심히 하고, 팩도 열심히 해요(웃음). 그 모든 것이 조금은 도움이 되겠죠. 그런데 결국 관객 분들이 무대 위의 저를 보고 어리다고 생각해주시는 데는 함께 공연을 만드는 분들의 정성이 들어가 있어요. 의상, 분장, 조명 등이 다 어우러져서 클라우디오라는 인물이 만들어지니까요. 관객 분들도 함께 공연을 만들어 주시고요. 서른 여섯인 저를 소년으로 만들어주시는 관객 분들께 감사하죠.
 
글: 박인아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iapark@interpark.com)
사진: 기준서(www.studiochoon.com)
 

[ⓒ 플레이DB m.playdb.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 인물

#관련 공연

#다른 콘텐츠 보기

가장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