쟈쟈 바냐
- 장르
- 연극 - 연극
- 일시
- 2010.04.29 ~ 2010.05.16
- 장소
- 대학로 게릴라 극장
- 관람시간
- 0분
- 관람등급
- 전체관람가
전문가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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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설명
진정한 코메디의 진수를 보여주는 체홉 연극!
안톤체홉이 스스로 자신의 작품을 “코메디”라 명했듯이
체홉의 연극은 진한 감동 속에 묻혀있는 인생의 아이러니가
숨겨져 있습니다.
극단 <지구연극>의 「쟈쟈 바냐」는 재산 분배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가족 간의 갈등구조 속에서, 진정한 사랑과 우정
그리고 연민에 대한 심도 깊은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가슴 아픈 코메디를 선사할 것입니다.
안톤 체홉 탄생 150주년 기념 헌정 연극
2010년은 러시아 사실주의 작가 안톤체홉의 턴생
150주년 되는 해입니다. 체홉의 연극은 러시아뿐만 아니라
한국,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 사랑 받는
인류의 문화유산입니다.
게릴라 극장과 함께하는 쟈쟈 바냐는
국내 마스터들이 “명작의 재탄생”
이라는 슬로건으로 체홉에게 헌정하는 연극입니다.
극단 지구연극 창단 10주년 기념연극
10년간 작품의 완성도와 예술적 깊이를 찾아내려는
마스터 들의 집요한 연극정신! - 「쟈쟈 바냐」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1860_1904)
러시아남부의 항도 타간로크에서 출생하였다. 잡화상의 아들로, 조부는 지주에게 돈을 주고 해방된 농노였다. 16세 때 아버지의 파산으로 중학을 고학으로 마쳤다. 당시 러시아에는 다위니즘 ·실증주의 ·유물론 등이 속속 소개되었고 국내에서도 뛰어난 의사가 배출된 시기여서 그는 이에 영향을 받아 1879년에 모스크바대학 의학부에 입학하였는데, 그와 동시에 가족의 생계를 위하여 단편소설을 오락잡지에 기고하기 시작하였다.
남작(濫作)과 검열과 잡지사(社)의 무리한 요구 등에도 불구하고 1880년대 전반 수년 동안에 《관리의 죽음》(1883) 《카멜레온》(1884) 《하사관 프리시베예프》(85) 《슬픔》(1885) 등과 같은 풍자와 유머와 애수가 담긴 뛰어난 단편을 많이 남졌다. 1884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된 젊은 체호프의 생활에 전기를 가져오게 한 것은 작가 D.V.그리고로비치가 1886년에 그에게 보낸 편지였다. 재능을 낭비하지 말라는 충고를 담은 편지에 감동한 그는 작가로서의 자각을 새로이 하여 희곡 《이바노프 Ivanov》(1887 초연), 야심적인 중편 소설 《대초원(大草原)》(1888)을 썼다.
폐결핵 증세가 악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890년에는 단신으로 죄수들의 유형지인 극동의 사할린섬으로 갔다. 정신적인 정체를 해소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으나, 그보다는 제정 러시아의 감옥제도의 실태를 조사하는 것이 더 큰 목적이었다. 사할린 여행에서 돌아온 후 집필한 르포르타주 《사할린섬 Ostrov Sakhalin》(1895)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유형지에서》(1892)와 《6호실 Palata No.6》(1892) 등에서 볼 수 있듯이 그 후에는 톨스토이즘이나 스토아철학의 영향에 의한 금욕적이고도 자폐증적(自閉症的)인 세계관에서 벗어나, 인간의 본연을 인정하기 위한 인간성 해방에 눈을 돌렸다.
1899년에 결핵 요양을 위하여 크림반도의 얄타 교외로 옮겨갈 때까지 소설 《결투 Duel’》(1892) 《흑의의 사제 Chorny monakh》(1894) 《귀여운 여인 Dushechka》(1899) 《개를 데리고 있는 부인 Dama s sobachkoy》(1899) 《골짜기에서 V ovrage》(1899) 등과 희곡 《갈매기 Chaika》(1896 발표, 1898 초연) 《바냐 아저씨 Dyadya Vanya》(1897 발표, 1899 초연) 등을 집필하였다..
그의 4대 희곡의 하나인 《갈매기》가 상연되었을 때 전례를 볼 수 없을 만큼 혹평을 받았으나, 항시 새로운 실험을 시도해 온 그는 그 아픔을 딛고 서서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양해 아래 선구적인 근대 연극의 무대화에 성공하였다. 주제와 줄거리의 생략이라든지 무대에서의 사건의 후퇴, 사소한 일상사(日常事)의 재현에 의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인생의 진실과 미(美)를 시의 경지에까지 끌어올린 희곡으로서 이 밖에 《세 자매 Tri sestry》(1901 초연)와 《벚꽃 동산 Vishnyovy sad》(1904 초연)을 완성하였다. M.고리키가 당국에 의하여 아카데미 회원 자격을 박탈당하였을 때 그는 V.G.코롤렌코와 함께 당국의 처사에 대한 항의의 뜻으로 아카데미 회원 자격을 반납하였다. 이처럼 혁명 전야에 그 정세를 정확히 판단하였던 그는 앞에서 든 만년의 희곡과 소설로써 새로운 시대의 숨결을 올바로 전달하였고, 또 동시에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한 인간의 눈으로 인생의 깊은 기조를 꿰뚫어 보았다. 예술극장의 여배우 올리가 크니페르와 1901년 결혼하고, 3년 후 독일의 요양지 바덴바덴에서 세상을 떠났다.
오늘날에도 그의 작품이 널리 애독되는 것은 그의 작품이 속악(俗惡)과 허위를 싫어하고 인간과 근로(勤勞)에 대한 애정을 북돋우어 밝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독자의 가슴속에 심어 주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