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영이별 영이별

장르
연극 - 연극
일시
2005.11.24 ~ 2006.02.19
장소
산울림 소극장
관람시간
0분
관람등급
만 11세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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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설명

우리 역사의 일부이면서도 우리가 잊고 있었던 역사 속 인물을 생생하게 되살린 참으로 아름답고 슬픈 작품!
왕비에서 서인으로, 걸인, 날품팔이꾼, 뒷방 늙은이가 되기까지 열여덟에 남편을 잃고도 끈질기게 여든두 해를 살아낸 한 여인의 모진 운명...... 그녀에게 삶은 사랑이었고, 사랑은 삶이었으며, 삶은 치욕이면서 복수이면서, 기어이 살아내라는 생명의 준엄한 명령이었다!
<영영이별 영이별>의 모티프는 청계천 복원사업으로 50년 만에 제 자리를 찾은 영도교(永渡橋). 1457년 조선 역사에서 가장 비운의 임금으로 불려지는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돼 영월로 귀양갈 때 정순왕후가 가슴을 쥐어뜯으며 정인의 뒷모습을 마지막으로 바라보던 곳이다. 단종과 정순왕후가 영영 이별한 곳이라 하여 영이별다리, 영이별교, 영영건넌다리로 불렸다는 슬픈 전설이 깃든 다리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로 귀양길을 떠나던 단종과 부인 정순왕후가 영도교 위에서 눈물로 이별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영도교는 정순왕후가 귀양가는 단종을 배웅할 수 있는 최대한의 거리였다.
정순왕후 송씨는 열다섯의 나이에 한 살 어린 단종과의 정략혼사로 왕비가 되지만 1년 6개월 뒤,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자 의덕왕대비가 되고, 영월로 귀양을 간 단종이 다섯 달 만에 사사당하자 홀로 남아 여든둘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가혹한 운명을 살아간 여인. 열여덟에 단종과 헤어져 홀로 살아남은 정순왕후의 예순다섯 해는 긴 세월이었다. 홍장을 한 열다섯 살의 신부를 파파노인으로 만들고, 삼단 같던 머리를 백발로 만들고, 팽팽한 뺨에 주름으로 골을 파도록. 네 명의 왕이 죽고 다섯 명의 왕(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 중종)이 등극하고, 거듭된 사화와 살육전에 숱한 목숨이 초개처럼 버려지도록. 강산을 바꾸고, 사람들의 성정마저 바꿀 정도로.
한 나라의 국모에서 서인에서 걸인, 날품팔이꾼, 뒷방 늙은이로 전락하면서도 정순왕후는 왜 자결하지 않고, 욕된 목숨을 모질게 이어간 걸까. ‘내게 죽음을 요구하는 세상의 눈초리까 따가워질수록 나는 더욱 이 불가해한 삶을 끝까지 견디고 싶었습니다. 이상스러운 빛으로 번쩍이는 나의 생애에, 마지막 목격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인생을 주체적으로 개척하는 것 이상으로 고된 일상을 견디는 힘 또한 우리네 삶의 원형임을 보여준다. “나는 우는 듯 웃으며 죽었습니다.”로 시작하는 이 연극은 세상을 떠난 정순왕후의 혼백이 죽는 날까지 침묵해야 했던 기구하고 애달픈 사연을 죽어서야 단종에게 굽이굽이 털어놓는 형식의 모노 드라마. 정순왕후의 회상은 때론 참을 수 없는 치욕과 분노로 뜨겁게 달아오르고, 때론 무상한 삶에 대한 체념의 어조로 가라앉기도 하며, 지아비와의 못 다한 사랑에 애달파하기도 한다.
■ 관객들의 심금을 울릴 아름답고 슬픈 대사들
▶나는 우는 듯 웃으며 죽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이라곤 당신이 계신 그곳으로 갈 일밖에 없네요. 깊고 어두운 숲을 지나고 안개 자욱한 강을 건너는 머나먼 길이라지만 흔연한 마음에 한달음에라도 달려갈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다만 심사에 깃드는 걱정은 헤어진 지 꼬박 예순다섯 해, 이제는 여든두 살의 백발노인이 되어버린 나를 행여 당신이 알아보지 못할까 하는 것뿐입니다.
▶나는 바랄 수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단 한 가지만을 바랐습니다. 내가 바라는 백만 가지를 그에 대신할 수 있다면, 기꺼이 백만을 버리고 하나만을 택하고자 하였습니다. 그 하나가 바로 어딘가에 처참히 버려져 있을 당신의 주검을 찾아 고이고이 묻어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은 결국 힘에 밀리어 그토록 자닝스러운 환란을 겪으시고야 말았습니다. 행여 자책감에 괴로워하지 마시어요. 당신의 죄가 아닙니다. 어린 나이가 죄였습니다. 바람막이를 첩첩이 세워두지 못한 것이 죄였습니다. 다만 홀로 외로이 높았던 것이, 그 고독한 운명이 죄였습니다.
▶나는 여주인이 되어 대궐에 자리를 잡고 들어앉았습니다. 차마 선왕의 상이 끝나기 전에는 당신을 쫓아내고 즉위할 수 없었던 수양대군의 음모와 흉계로, 나는 당신의 짝이 되어 당신의 등을 떠미는 꼴이 되었습니다. 당신은 과연 이런 나를 사랑할 수 있으셨는지요?
▶(단종) 당신이 낯선 궁내에 들어 나날이 얼굴이 까칠해지니 내 마음이 편치 않소. 부부가 정애로 서로 함께하며 한 끼의 밥이나마 오붓하게 나눌 수 있다면 반찬 없는 밥이라도 능히 살이 되고 피가 될 것임에, 어찌 국부와 국모로서의 법도만을 내세우겠소? 고기를 즐기시오? 나물이 입에 맞소?
▶당신과 헤어져 보낸 예순다섯 해의 세월은 부덕을 지키기 위해 수절한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다만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고자 했던 것뿐입니다. 잊지 않고자 했던 것뿐입니다. 밥그릇 하나에 소복이 담겼던 따끈하고 들큼한 은애의 기억을, 백척간두에 내몰려서도 포기할 수 없었던 소박하고 천진한 한 조각의 붉은 사랑을.
▶날로 울울창창해지는 초록이 두려웠습니다. 당신은 점차 헌칠한 대장부가 되어 가시는데, 도끼 자루를 빼앗긴 처지에서는 미끈한 풍채와 감실감실 돋아오르는 코밑수염마저도 그냥 반길 수 없는 위태로운 성장의 표지였습니다. 중년의 신왕과 젊은 상왕, 그 어울리지 않는 지위가 기묘하고 아슬아슬하기만 하였습니다.
▶우리는 성장할 수 없었습니다. 어른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냉혹한 현실로부터 도피하려는 듯 당신이 필사적으로 내 좁은 품을 파고들 때면, 부끄럽기에 앞서 안쓰럽고 즐겁기보다 서러웠습니다. 우리는 사면초가의 형국에서 더욱 의지하며 열렬히 사랑하게 되었지만, 사랑할수록 그리운 서로를 보듬는 일을 꺼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사랑했습니다. 어느 왕과 왕비보다도, 남편과 아내보다도, 열에 들떠 뜨거운 정인들보다도. 하지만 그래도 더 사랑해야 했습니다. 고작 두 해 남짓의 짧은 동거가 백 년, 천 년까지도 대신하도록 하루하루를 잘게 쪼개어 사랑하여 보듬고 위로하여야 했습니다.
▶당신을 태운 사인교가 다리를 건너 멀어져갈 때 나는 차마 안녕이란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못 다한 사랑이 서럽고 아쉬워 발을 동동 구르며 울었지요. 끝끝내 이별의 인사를 건네지 못한 채, 우리는 영원히 열일곱의 소년과 열여덟의 소녀로 붙박여 버렸습니다. 사람들은 이 다리를 영이별 다리라고 부른답니다. 당신과 내가 영영 이별하였다 하여 영영 건넌다리, 영도교라고 부른답니다.
▶태어난 지 삼 일 만에 모후를 여의고 서조모 혜빈의 손에서 자라나 열두 살에 조선의 여섯 번째 왕으로 즉위하신 당신. 그로부터 삼 년 후 열다섯 살에 상왕으로 물러나시고 다시 이태 후 영월로 귀양 가시어, 결국 그 해를 넘기지 못하고 다섯 달 만에 유배지에서 사사 당하신 당신.
▶나는 그때 이미 한 번 죽었습니다. 당신과 함께 죽음을 맞았습니다. 산 채로 지옥을 겪었습니다. 하늘과 땅이 뒤집혀 거꾸로 선 듯하였습니다. 누군가 내 머리채를 움켜잡고 질질 끌고 가는 듯하였습니다. 누군가 촘촘히 바늘로 지은 옷을 내게 입히고 동아줄로 친친 옭아 묶는 듯하였습니다. 머리를 풀고 소복을 입은 채 짐승처럼 산을 기어올랐습니다.
▶왜 자진하지 않는가?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끈질기게 살아남아 있는가? 내게 죽음을 요구하는 세상의 눈초리가 따가워질수록 나는 더욱 이 불가해한 삶을 끝까지 견디고 싶어졌습니다. 이상스런 빛으로 번쩍이는 나의 생애에, 마지막 목격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예순다섯 해를 한결같이 눈물과 한숨 속에서 보냈다는 건 사정 모르는 남들이 믿고파 하는 착한 거짓의 소문이에요. 기필코 살아내라는 생의 명령에 복종하며 나는 누추하고 비굴한 일상을 달게 받아들였습니다. 나는 먹었습니다. 나는 잤습니다. 가증스럽게도 염치없이도 살고자 하였습니다.
▶나는 국모를 자처하는 동안에도 그들처럼 가난하고 비천한 이들이 나를 도울 수 있다곤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여전히 오만했든가 봅니다. 나는 백성들과 함께 먹고 함께 굶었습니다. 그리하여 비로소 말뿐이 아닌 만백성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나는 가장 낮고 초라한 자리에서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나라의 어머니가 될 수 있었습니다.
▶당신, 나를 다시 만나면 칭찬해 주셔요. 왜 이제야 왔나 탓하지 마시고 그동안 수고했다 애썼다 다독다독 어깨를 두들겨 주셔요. 나는 죽지 않았습니다. 죽을 수가 없었습니다. 삶의 아름다움을 칭송할 수는 없을지언정 질기고 모진 목숨을 이어 이만큼이나 오래 살아내고야 만 것이, 결국 내게 허락된 유일한 복수였으니까요.
▶나는 향그럽고 아름다워 더욱 슬픈 전설 속의 당신 곁에서 그림자로 살았습니다. 어루만지고 더듬고 쓸어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당신은 내 곁에 계셨습니다. 나는 세상에 떠도는 당신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자라나는 귀를 기울이며, 신비를 믿는 어리석지만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때 나는 너무 순진했지요. 왕과 왕비로 산다는 것이 정녕 무엇인지 몰랐지요. 당신은 세상의 모두를 향해 웃음 짓고, 나는 당신을 향해서만 웃음 지으면 그만일 줄 알았더이다. 그런데 당신은 세상의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던 눈물을 내 앞에서 흘리더이다. 웃음보다는 울음을, 미소보다는 눈물을 함께 나눌 수밖에 없는 것이 금생에서 맺어진 우리의 인연이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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