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설명

예술인들의 호흡이 살아난 <격정만리> 격동의 세월 속에 사라져간 광대들의 발자취

작가의 말 中
...선택을 강요 당한 비극적 현실과 그 현실 속에서 대립하고 갈등 하는 예술가들의 삶은 오늘의 우리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내가 20여 년간 연극을 하면서 괴로워했던 문제들의 근원이 거기 있었고, 그 문제들을 붙들어 안고 싸우고 고민했던 동료, 선배, 후배들의 면면이 거기에 있었다...

연극 <격정만리>는 작가와 대다수의 연극인들이 고민하던 우리 연극의 현실에 기초해 만들어진 작품이다. 연극은 행동의 예술이며 배우의 언어와 몸짓을 통해 관객에게 직접적으로 전달되기에 호소력이나 설득력에 더하여 선동적인 면이 있다. 때문에 자유롭지 못한 시대의 연극은 권력층에 의한 탄압의 대상이 되거나 체재를 옹호하는 데에 선동되기도 한다. <격정만리>는 이월선과 홍종민을 중심으로 20년대에서부터 50년대 6.25를 전후로 남북이 갈라지기 전까지, 격동하는 역사와 함께 여러 차례 변해야 했던 예술인들의 삶, 배우였기 때문에 엇갈릴 수 밖에 없었던 두 남녀의 굴곡진 삶을 보여준다. 이들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놓쳐버린, 우리 연극의 역사들을 가슴 들뜨게 만난다. 그 숨가쁜 상황에서 행해졌던 연극을 재조명하고, 격정적인 인생을 살아갔던 연극인들의 이야기를 풀어내었다. 연극을 위해 치열하게 고민했고, 삶 속에서 예술을 펼쳤던 연극인들. 그래서 <격정만리>에는 연극인들의 다양한 군상들이 살아있다.

연극으로 보는 우리 연극 이야기

한국 연극사의 흐름을 한 눈에 굴곡진 광대의 삶을 다양한 극중극으로 풀어내
<격정만리>의 특징은 일제 강점기 시대에서부터 이념의 갈등이 심했던 남북 분단 시대까지 펼쳐졌던 다양한 연극 양식을 극중극으로 풀어냈다는 것이다. 창극, 신파극, 악극, 무성영화 등 한국 연극사에 있어서 중요한 작품들이 다양한 극중극으로 재현되었다. 동시에 이월선과 홍종민의 일생이 담긴40여 년의 세월 또한 훑을 수 있다. 그들은 배우였기에 인생에 있어 공연으로써 세월을 담아 보여줄 수 있었으며, 이 극중극들을 통해 한국 연극사의 흐름과 변천사를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다. 김명곤 연출은 이 극중극들을 단순히 연극사를 훑는 공연이 아니라 각각의 공연을 그대로 재현, 완성도 있는 공연을 만들고자 노력했다. 시대의 변화, 작품의 변화에 따라 감정과 동작의 섬세한 변화를 요구했으며, 음악과 안무 또한 치밀하게 그 시간들이 살아나도록 요구했다.

연극인의 눈으로 바라본 우리 연극의 현실
<격정만리>가 풀어놓은 극중극은 우리 연극사를 돌아보고 굴곡진 예술인들의 삶을 다양한시각에서 바라봄으로써 우리 선배 연극인들의 삶, 그들의 연극에 대한 열정, 우리 조상들의얼룩진 역사를 바로 담고자 했던 연극인들의 고뇌를 제대로 이해하고자 한다.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극중극과 코러스들이 풀어내는 노래는 홍종민과 이월선의 인생사 속에 피어난 사랑과 연극인들의 파란만장한 인생들을 드러낸다. 그렇기에 연극 속의 우리 연극 이야기 <격정만리>는 우리가 꼭 한번쯤은 만나야 하는, 연극인이라면 꼭 보아야 하는,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이라면 다시 만나보아야 하는 작품이다.


왜 <격정만리>인가?

1. 격정적인 삶을 살았던 광대들의 이야기!
1920년대에서 1950년대 한국전쟁까지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행해졌던 연극에 대한 재조명, 그리고 그 중심에서 격정적인 인생을 살아가며 사랑과 삶, 그리고 꿈을 이야기했던 연극인들의 이야기를 무대화한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러나 지금은 잊혀진 인물들이 무대에 되살아나 우리에게 다가온다.

2. 잃어버린 우리 연극의 맥을 이어가다
격동의 세월 속에 사라져간 광대들의 생애와 예술이 오늘날 우리 연극사에 거대한 뿌리로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그들의 삶과 그들이 만들어갔던 작품을 극중극의 형태로 만날 수 있다. 이 작품들은 그 시대 우리 민족의 아픔과 고민을 가장 잘 드러내주고 있으며, 한편 우리 연극의 다양한 모습들도 보게 해준다. 이렇게 근대적 시공간을 무대화하는 과정을 통해 잃어버린 혹은 망각해버린 시간들을 현재에 다시 끄집어내 일본의 침략으로 인해 사라져간 우리의 전통 연극에 대한 고찰을 하고자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우리 민족의 냄새”가 나는 연극은 무엇인가 고민해볼 수 있을 것이다.

3. 연극인이 그리는 우리 연극사
2006년 공연되는 <격정만리>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공동 주최하여 공연된다. 아르코 예술극장은 극장 창립 25주년을 맞아 기획 프로그램 “극장만세-떼아뜨르 파라다이스”로 연극을 다룬 연극 3편을 준비하였으며 그 중 연극인이 그린 연극의 근현대사를 이 작품이 이야기하게 된다. 이 작품은 초연 당시 한국연극사에 대한 재조명과 표현의 자유라는 두 가지 쟁점을 핵으로 예술계에 가장 뜨거운 논란의 중심에 위치하였다. 그리고 15년이 지난 오늘, <격정만리>가 다시 무대에 오른다. 당시 논란으로 인해 제대로 평가되고 이해되지 못했던 부분의 아쉬움과 그때와는 달라진 상황에서 <격정만리>는 ‘연극인이 그리는 우리 연극 이야기’로서 사회적으로, 그리고 연극인 개개인에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갈 것이다.


극단 아리랑 20주년을 맞다 선배 광대들에게 올리는 <격정만리>

아리랑 억척 항해기
1986년 8월 22일 신촌의 미리내 소극장 분장실. 공연을 앞두고 배우와 스탭이 모여 있다. ‘아리랑’을 극단 이름으로 걸고 ‘아리랑’이라는 연극을 공연하는 첫 날. 공연 준비를 마친 이들은 흥분된 심정으로 마지막 점검을 하고 있다. 서른 다섯 살의 대표 김명곤은 단원들 앞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아리랑’이라는 조각배를 바다에 띄운다. 그 조각배가 순조롭게 떠갈지, 암초에 부딪칠지, 폭풍우에 뒤집힐지 모르는 일이나 선원 모두가 익사할 때까지 우리의 항해는 계속될 것이다.” 20년이 지난 지금 다행히 조각배는 많은 모험을 겪으면서도 좌초하지 않았고 굳건히 항해를 계속하고 있다.


선배 광대에게 바치는 헌정공연
“20주년이라고 화려한 프로젝트를 자랑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건강한 저희들을 보여 드리고 싶었고, 격랑을 헤치셨던 선배 연극인들에게 술 한잔 올리고 싶었습니다.” 극단 아리랑 방은미 대표는 <격정만리>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전통 문화의 기반 위에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작품을 공연하는 극단 아리랑이 20주년을 맞아 <격정만리>를 무대에 올리는 솔직한 이유이다. 극단 아리랑은 창단 공연인 <아리랑> (작 김명곤/ 연출 조항용, 1986)부터 <격정만리>와 <유랑의 노래> (작/연출 김명곤, 1998)에 이르기까지 광대의 이야기를 소재로 공연한 바 있다. 광대를 사회의 거울이자 샤먼으로 생각하고, 광대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치유하고자 하는 과정을 연극이라고 보았다. 광대가 그러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이때에 다시금 선배 광대들이 생각난 것. 이들이 20주년을 맞는 심정은 이래서 겸허하다.

줄거리

노인이 된 이월선이 옛 동료인 박철을 만나 딸 선화의 소식을 전해 듣고 지난 삶을 회고하면서 극은 시작된다. 1928년, 이월선과 홍종민은 <조선신파 북극성> 유랑극단에서 만나 ‘장한몽’의 신연극을 하면서 사랑을 키워간다. 새시대 새로운 연극을 위해 뜻을 모은 이월선, 홍종민, 심영복, 진경숙, 송진섭, 박철은 북극성을 탈퇴하고 연극을 민족운동, 사회운동으로 연결한 <개벽좌>로 들어가 ‘아리랑 고개’를 공연한다. 그러나 나라 잃은 민족의 아픔을 노래한‘아리랑 고개’ 공연장은 광주학생의거를 외치며 뛰어든 청년에 의해 아수라장이 된다. 한편 이월선은 동경 유학생 노승철과 함께 ‘인형의 집’을 연습하며 신파극에 대해 기피하고 서양연극에 깊이 빠지게 된다. 그런 이월선이 못마땅한 홍종민, 그녀의 과거가 드러나면서 이별의 수순을 밟게 된다. 심영복과 진경숙의 결혼 축하피로연에서 홍종민은 신파극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카프>와 논쟁을 하게 되고, <신천지> 단원들은 ‘호신술’의 일부분을 연기하며 연극이 노동자, 농민의 무기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홍종민은 신파극을 민족의 연극으로 부흥, “조선냄새 나는 위대한 예술을 하고 싶은” 속마음을 토로한다. 이월선이 떠나고 홍종민은 그의 뜻대로 신파극 배우가 되어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공연을 하게 된다. 그러던 중, <카프>의 일원이었던 진경숙으로부터 이월선이 노승철을 떠나 <동방 창극단>에서 지방 순회를 떠났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1945년, 해방 후 소군정과 미군정의 혼란 속에서 집으로 돌아온 홍종민은 이월선과 딸 선화와 상봉한다. 딸 선화는 좌익연극에 가담하여 ‘서울 갔던 아버지’를 공연하고, 심영복과 진경숙은 그에게 <혁명극단>에서 함께 할 것을 권유한다. 그러나 홍종민은 진정한 해방이 되지 않은 현실에서 힘을 합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편, 송진섭은 미군정과 협력하여 <극예술협회>에 가입, 계몽선전단을 조직하고자 하나 홍종민은 이를 거절한다. 이렇게 혼란한 사회 속에서 그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