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설명

살다 보면 느리게 걷는 순간이 있다. 다리에 힘이 없어 무릎이 ‘퍽’하고 꺽이기도 하고, 목적지를 잃어버려 멍하니 서있기도 한다. <물의 정거장水の?>은 살면서 어쩔 수 없이 느리게 걷는 순간을 현미경처럼 세밀히 들여다 본 연극이다. 10명의 주인공들은 희망 때문에 걷지만, 바로 그 희망에 발목이 잡혀 절망하고 늪에 빠진다. 하지만, 늪에서 죽어버리는 게 아니라 다시 희망을 향해 나아간다. 그렇다고 동화처럼 행복하게 잘먹고 잘사는 결말이 아닌, 절망하고 일어서고를 반복하는 마치, 커다란 원을 빙글 빙글 도는 인생의 모습을 그려낸다.
인생의 어두운 단면을 포착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보인 중견 연출가 김아라가 30대 중반부터 40대 초반의, 살면서 무릎이 크게 꺽였던 경험을 가진 배우들을 선발, 워크숍을 통해 배우의 숨겨진 재능을 끌어냈다. 또한, 혜화동에 <물의 정거장水の?> 전용 소극장을 오픈, 우리 옛 마당극처럼 사방에 관객이 앉고 객석과 무대 구분이 없는 극장을 창조했다. 관객들은 들어오는 순간부터 배우 옆에 나란히 앉게 되고, 연극의 세계는 시작된다. <물의 정거장>은 오타 쇼고 원작의 3개의 정거장 시리즈 중 첫 번째 작품이며 오는 12월 아르코 극장에서 <모래의 정거장砂の?>, 내년 동굴에서 <땅의 정거장地の?>이 김아라 연출로 진행될 예정이다.

줄거리

손가방에 빨간 컵을 넣고 다니는 소녀. 로프에 묶인 빈 유모차를 끌고 가는 아내와 남편. 맨발에 양산을 쓰고 허공을 걷는 여자. 격렬히 키스하듯 뺏고 뺏으며 물을 마시는 남자들. 빨간 하이힐 한짝을 신고 우산을 짚은 노파. 상처 입은 짐승이 서로를 핧듯이 몸을 섞는 남자와 여자. 그리고, 손잡이가 부서진 수도꼭지에서 가늘게 흘러 나오는 물줄기. 10명의 인간 군상들은 수돗가 주변을 걸으며 물을 탐하고, 서로를 경계하며 훔쳐보고, 격렬히 빨래를 하기도 하고 몸을 섞기도 한다. 그리곤 각자가 짊어진 짐들을 버리고 길을 떠난다. 사람들이 스쳐 지나간 자리엔 버려진 물건들로 이루어진 검은 산.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물 떨어지는 소리와 침묵과 간혹 흐르는 음악이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