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설명
2018 Traditional & Contemporary ‘문 밖의 사람들 : 門外漢’
<안은미의 북한춤>
‘우리는 본래 같은 춤을 추지 않았을까?’
이 질문으로부터 시작된 <안은미의 북한춤>
미래지향적인 우리 몸짓을 말하다.
관습의 틀을 깨는 도발적인 춤꾼, 안은미
할머니와 아저씨 그리고 청소년, 평범한 우리네를 무대로 이끌며 막춤도 예술로 승화시킨 그가 북한의 몸짓을 주목, 전통적 움직임의 미래상을 그려낸다.
<안은미의 북한춤>은 오랜 금기를 깨고 ‘조선춤’의 정전이 되는 ‘조선민족무용기본’(최승희, 1958)에 기록된 탈춤?부채춤?칼춤 등 다양한 춤사위를 안은미만의 언어로 재해석, 전통춤의 어제와 오늘 나아가 남과 북을 잇는 무대다.
기획 의도
문 밖, 지금껏 우리가 느끼지 못한 새로운 세계가 있다!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의 2018 Traditional & Contemporary ‘문 밖의 사람들 : 門外漢’ is
전통예술의 확장성에 대한 실험무대다. ‘장르와 지역’, 두 영역의 경계를 넘어 무궁무진하게 뻗어나갈 전통예술의 동시대성을 그려보고자 전통예술계 밖, 국내공연계 너머 왕성한 활동을 펼치는 예술가들과 전통예술의 만남을 선보인다.
<안은미의 북한춤>
‘우리는 본래 같은 춤을 추지 않았을까?’
이 질문으로부터 시작된 <안은미의 북한춤>
미래지향적인 우리 몸짓을 말하다.
관습의 틀을 깨는 도발적인 춤꾼, 안은미
할머니와 아저씨 그리고 청소년, 평범한 우리네를 무대로 이끌며 막춤도 예술로 승화시킨 그가 북한의 몸짓을 주목, 전통적 움직임의 미래상을 그려낸다.
<안은미의 북한춤>은 오랜 금기를 깨고 ‘조선춤’의 정전이 되는 ‘조선민족무용기본’(최승희, 1958)에 기록된 탈춤?부채춤?칼춤 등 다양한 춤사위를 안은미만의 언어로 재해석, 전통춤의 어제와 오늘 나아가 남과 북을 잇는 무대다.
기획 의도
문 밖, 지금껏 우리가 느끼지 못한 새로운 세계가 있다!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의 2018 Traditional & Contemporary ‘문 밖의 사람들 : 門外漢’ is
전통예술의 확장성에 대한 실험무대다. ‘장르와 지역’, 두 영역의 경계를 넘어 무궁무진하게 뻗어나갈 전통예술의 동시대성을 그려보고자 전통예술계 밖, 국내공연계 너머 왕성한 활동을 펼치는 예술가들과 전통예술의 만남을 선보인다.
줄거리
분단이70년 남짓 흘러가는 동안 이산가족이 만나고 금강산 관광을 하고 개성에서 공산품이 만들어졌지만, 남과 북이 나란히 혹은 각각 어떻게 몸쓰는 맛을 느끼는지 유심하게 보아내지는 못했다. 가끔 만나는 남과 북의 사람들은 말을 주고받지만, 몸짓에 주목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몸짓이란 무엇인가. 북한은 고립된 조건에서20세기 한국에서 모던댄스나 포스트모던댄스 같은 춤의 타자 없이 자기충족적인 춤을 추구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때는 북한 사람들의 몸짓은 춤이라는 범주와 크게 다르지 않다. 절도있는 몸짓과 그 리듬은 마치 우주의 중심음이 모든 사회질서를 잡아줄 것이라는 공자의 음악적 견해처럼 체화되는 법이기 때문이다.
북한 사람들의 몸짓은 춤이라고 할 만큼 체화된 어떤 상태이다. 누군가는 거기서 주체사상의 체현을 볼 것이고, 또 누군가는 거기서 숨길 수 없는 북방적 기질과 타고난 태도를 볼 것이다. 좌우간 북한춤이란 어떤 형식의 너울처럼, 너울의 어떤 형식처럼 한번 걸러진 몸짓이다. 체제가 그러한 필터링의 압력을 가하고 있다. 이런 조건에서 안무가 안은미는 남과 북 사이에서 주체사상과 국가보안법이라는 이념적 중화기를 피해서 ‘북한춤’이라는 객관적 상관물로 접근하고자 한다.
이 북한춤을 들여다보는 대롱 같은 터널시야는 단연 최승희라는 걸출한 안무가를 거쳐야 한다. 분단 시대의 마지막 춤꾼 최승희는 아직 남과 북이 그의 춤 유산을 충분히 상속받지 못한 거인이자 지금도 여전히 남과 북을 연결하는 매개자이기도 하다. ‘신무용’이라는 근대적 안무의 주창자였지만, 그 스스로는 제도로서의 ‘신무용’ 체제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우화등선하는 영혼이었다. 최승희는 동아시아, 북아시아, 남아시아를 두루 섭렵하면서 각 지역춤에 더해 유럽의 춤 관념을 종합한 안무가였다. 북한에서 이 춤의 종합이자 안무적 합성 작업이 북한춤에 끼친 영향은 막대하지만, 그 영향의 범위와 심도가 어느 정도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안은미는 영화<사도성 이야기>처럼 최승희가 과거 직접적인 안무를 행사한 북한춤의 흔적과 과정을 더듬지만, 일단은 남과 북이 요동치는 국제적 정서와 무관하게 북한 사람들의 춤을 탐문하고자 한다. 최승희를 경유하지만, 그의 춤을 모방하려는 것이 아니라 북한 사회 내부에서 자가발전해온 그 흐름을 존중하려는 것이다. 나아가 안은미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이 불가지론의 춤을 인정하고, 자기준거 없이도 ‘북한춤’이라는 가상적이면서도 실재적인 춤세계를 안무하고자 한다.
탈북자의 춤을 재현하지도, 최승희의 위대한 유산을 반복하지도 않으면서 최승희의 자유혼처럼 현재 세계적으로 가장 핫한 안무가의 직관과 통찰로 ‘북한춤’에 접근하고자 하는 것이다. 연변을 우회하여 북한춤을 배우던 세기말과 세기초의 한국에는 기계처럼 다이내믹한 춤사위가 대유행했고, 이유가 없었던 만큼 역시 성찰하려는 태도나 깊이가 확보되지 못하고 사라져갔다. 총련계 재일교포 무용가는 최승희류의 춤을 배워서 일본을 통해 국내에서 포스트최승희댄스를 시연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역사적 흐름에서 무엇인가 현실적인 변화가 제거된 느낌이었다. 이른바 살아서 꿈틀대는 애벌레 같은 ‘북한춤’의 형태는 간파와 가늠의 영역에서만 알 수 있게 되는 시점이다.
지난 평창올림픽의 북한팀 참가 해프닝에서 보여준 한국의 젊은 세대의 대북한 인식은 과거 직접 당사자였던 장년과 노년 세대보다 현저히 현실주의적이다. 되레 이러한 현실인식이야말로 한국전쟁, 주사파 논쟁, 종북 및 친북 논쟁, 색깔론 같은 북한을 둘러싼 한국 내부의 이념적 분열상으로부터 떠날 수 있는 토대가 되는지도 모른다. 정직한 현실로부터 필요와 소통에 의해 통일의 가능성이 새롭게 열릴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열림의 임계점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몸과 몸짓을 통한 믿음이다. 몸을 통한 체험적 진실, 이것은 속고 속이기를 반복해온 한반도의 두 당사국이 거부하기 쉽지 않다. 안은미는 “체험을 사랑하는 체험”으로서 ‘북한춤 되기’로 나아가 이념과 상관없이 북한의 무용적 감흥을 느껴보라고 권한다.
그것은 오히려 ‘북한춤’이라는 리얼리티를 다소 결여한, 무엇인가 재현의 부담을 떨쳐낸 일종의 시뮬레이션 댄스에 가까운 안무적 시도가 될 것이다. 지나치게 실현된 ‘북한춤’은 북한춤이 아니라는 역설이다. 기묘하게도 클로즈업으로 접근하는 리얼리티는 극장국가 북한에 대해 맺혀지는 상은 아니다. 안은미는 이러한 역설에 주목하여 남한에서 상상력과 ?되기의 힘을 살린 안무적 시도를 취하고 있다. ‘북한춤’이고자 하는 북한춤이자 ‘북한춤’보다 더욱 더 북한춤이면서 동시에 ‘북한춤’과는 하등 관련이 없는 춤. 우리에게 북한은 이제 새로운 국면으로 눈 앞에 도래해 있어서 마치 눈 그 자체가 눈을 못 보듯이 북한은 콱 육박해오고 있다.
북한 사람들의 몸짓은 춤이라고 할 만큼 체화된 어떤 상태이다. 누군가는 거기서 주체사상의 체현을 볼 것이고, 또 누군가는 거기서 숨길 수 없는 북방적 기질과 타고난 태도를 볼 것이다. 좌우간 북한춤이란 어떤 형식의 너울처럼, 너울의 어떤 형식처럼 한번 걸러진 몸짓이다. 체제가 그러한 필터링의 압력을 가하고 있다. 이런 조건에서 안무가 안은미는 남과 북 사이에서 주체사상과 국가보안법이라는 이념적 중화기를 피해서 ‘북한춤’이라는 객관적 상관물로 접근하고자 한다.
이 북한춤을 들여다보는 대롱 같은 터널시야는 단연 최승희라는 걸출한 안무가를 거쳐야 한다. 분단 시대의 마지막 춤꾼 최승희는 아직 남과 북이 그의 춤 유산을 충분히 상속받지 못한 거인이자 지금도 여전히 남과 북을 연결하는 매개자이기도 하다. ‘신무용’이라는 근대적 안무의 주창자였지만, 그 스스로는 제도로서의 ‘신무용’ 체제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우화등선하는 영혼이었다. 최승희는 동아시아, 북아시아, 남아시아를 두루 섭렵하면서 각 지역춤에 더해 유럽의 춤 관념을 종합한 안무가였다. 북한에서 이 춤의 종합이자 안무적 합성 작업이 북한춤에 끼친 영향은 막대하지만, 그 영향의 범위와 심도가 어느 정도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안은미는 영화<사도성 이야기>처럼 최승희가 과거 직접적인 안무를 행사한 북한춤의 흔적과 과정을 더듬지만, 일단은 남과 북이 요동치는 국제적 정서와 무관하게 북한 사람들의 춤을 탐문하고자 한다. 최승희를 경유하지만, 그의 춤을 모방하려는 것이 아니라 북한 사회 내부에서 자가발전해온 그 흐름을 존중하려는 것이다. 나아가 안은미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이 불가지론의 춤을 인정하고, 자기준거 없이도 ‘북한춤’이라는 가상적이면서도 실재적인 춤세계를 안무하고자 한다.
탈북자의 춤을 재현하지도, 최승희의 위대한 유산을 반복하지도 않으면서 최승희의 자유혼처럼 현재 세계적으로 가장 핫한 안무가의 직관과 통찰로 ‘북한춤’에 접근하고자 하는 것이다. 연변을 우회하여 북한춤을 배우던 세기말과 세기초의 한국에는 기계처럼 다이내믹한 춤사위가 대유행했고, 이유가 없었던 만큼 역시 성찰하려는 태도나 깊이가 확보되지 못하고 사라져갔다. 총련계 재일교포 무용가는 최승희류의 춤을 배워서 일본을 통해 국내에서 포스트최승희댄스를 시연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역사적 흐름에서 무엇인가 현실적인 변화가 제거된 느낌이었다. 이른바 살아서 꿈틀대는 애벌레 같은 ‘북한춤’의 형태는 간파와 가늠의 영역에서만 알 수 있게 되는 시점이다.
지난 평창올림픽의 북한팀 참가 해프닝에서 보여준 한국의 젊은 세대의 대북한 인식은 과거 직접 당사자였던 장년과 노년 세대보다 현저히 현실주의적이다. 되레 이러한 현실인식이야말로 한국전쟁, 주사파 논쟁, 종북 및 친북 논쟁, 색깔론 같은 북한을 둘러싼 한국 내부의 이념적 분열상으로부터 떠날 수 있는 토대가 되는지도 모른다. 정직한 현실로부터 필요와 소통에 의해 통일의 가능성이 새롭게 열릴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열림의 임계점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몸과 몸짓을 통한 믿음이다. 몸을 통한 체험적 진실, 이것은 속고 속이기를 반복해온 한반도의 두 당사국이 거부하기 쉽지 않다. 안은미는 “체험을 사랑하는 체험”으로서 ‘북한춤 되기’로 나아가 이념과 상관없이 북한의 무용적 감흥을 느껴보라고 권한다.
그것은 오히려 ‘북한춤’이라는 리얼리티를 다소 결여한, 무엇인가 재현의 부담을 떨쳐낸 일종의 시뮬레이션 댄스에 가까운 안무적 시도가 될 것이다. 지나치게 실현된 ‘북한춤’은 북한춤이 아니라는 역설이다. 기묘하게도 클로즈업으로 접근하는 리얼리티는 극장국가 북한에 대해 맺혀지는 상은 아니다. 안은미는 이러한 역설에 주목하여 남한에서 상상력과 ?되기의 힘을 살린 안무적 시도를 취하고 있다. ‘북한춤’이고자 하는 북한춤이자 ‘북한춤’보다 더욱 더 북한춤이면서 동시에 ‘북한춤’과는 하등 관련이 없는 춤. 우리에게 북한은 이제 새로운 국면으로 눈 앞에 도래해 있어서 마치 눈 그 자체가 눈을 못 보듯이 북한은 콱 육박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