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설명
세종이라는 맹꽁이, 한글이라는 혁명을 퍼 올리다
-소리극 <까막눈의 왕> 탄생기
사 성 구(중앙대학교 전통예술학부 겸임교수)
가끔 술에 취해 광화문에 서면 눈물이 난다. 왕답지 않은 왕을 둔다는 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왕다운 왕을 둔다는 건 얼마나 벅차게 행복한 일인가?
광화문에 앉아 계신 가슴 벅찬 왕, 세종대왕은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에 비유하자면, 수천 년 까막눈들의 어두운 강을 처음 밝히신 달이다. 그가 캄캄한 혼돈의 우물에서 퍼 올린 한글은 우리 민족에게 하늘 열리는 혁명이다. 끝없이 복 주는 화수분이고, 생각의 우주를 바꾸어 놓은 빅뱅(우리는 이렇게 외국어까지도 한글로 쉽게 쓸 수 있다)이다.
소리극 <까막눈의 왕>이라는 거대한 프로젝트는 본디 낯선 민요 한 곡에서 비롯되었다. 어느 더운 여름날로 기억한다. 한 명창께서 경기 민요 하나를 A4용지의 화두로 던져주고, 그 소리를 바탕으로 소소한 공연을 올리고 싶다고 하셨다.
가나다라마바사, 아자차, 잊었구나
가갸거겨 가문 높은 우리 님은 거룩하기 짝이 없네
나냐너녀 나래 위에다 임을 싣고 너울너울 날아나 볼까
다댜더뎌 다정할 손 우리 낭군 다닥다닥 다감한데
라랴러려 라귀채를 툭툭 쳐서 정든 임을 보고지고
‘국문뒤풀이’라는 그 민요 가사를 소리 내어 읽는 순간, 여름 번개에 정수리를 빗겨 맞은 느낌이 들었다. 래퍼들이 랩을 짤 때 라임을 맞추듯,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자유자재로 배열하는 그 재미난 놀라움이란. 세상 삼라만상을 세상 가장 손쉬운 자음과 모음으로 그려내는 저 한글의 경이로움이란. 공기의 소중함처럼 잊고 살던 한글의 위대함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비로소 ‘ㅎㅎ’하고 미소가 번졌다. ‘ㅋㅋ’하고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하물며 ‘ㅠㅠ’하고 울음을 터뜨리고, ‘ㅉㅉ’하고 혀를 찰 수 있는, 21세기 스마트폰 시대까지 내다본 저 위대한 글자, 이게 다 누구 덕이란 말인가?
그때, 인기척이 느껴져 뒤돌아보자, 세종대왕이 뒷짐을 지고 서 계셨다.
“나야, 임마!”
세종대왕께서 씩 웃으며 말씀하셨다. 인사를 꾸벅하고 집으로 돌아와, 그분이 그려진 만 원짜리를 책상머리에 붙여두고 5일 만에 일필휘지로 <까막눈의 왕> 대본을 완성했다. 작가가 대본을 쓸 때 흥이 나고 재미가 나서 몸서리치면, 그 공연판은 대부분 성공으로 몸서리치기 마련이다.
2011년 그해 가을, 국립국악원의 소리꾼과 악사들이 왜 당대 최고 소리꾼들이며 악사들인지 증명하는 초연 공연이 우면당에서 화려한 막을 올렸다. 다시 2012년 봄, 극의 몸집을 키워 국립국악원 브랜드공연이라는 찬사를 얻으며 <까막눈의 왕>은 예악당에서 눈부신 기립 박수를 받았다.
눈은 있으되 글을 읽을 줄 몰라 칠흑 같이 어두운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을 우리는 ‘까막눈’이라 부른다. 이 작품은 그런 까막눈들의 새까만 마음을 훤히 밝혀주신 ‘까막눈의 왕’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여정과 그 눈물겨운 성취를 오롯이 담아내고 있다.
전통 소리극은 민요 ‘아리랑’이 펼쳐내는 미학처럼, 엄숙한 비장함과 우스꽝스런 해학이 한판 구불구불 굽이쳐야 한다는 것이 작가로서 내 오랜 지론이다. 세종대왕의 고뇌에 찬 눈물을 고스란히 담아내면서도 따뜻한 웃음과 사랑을 통해 세상을 긍정하는 그분의 힘을 보여주는 것, 바로 이 작품을 쓰면서 가장 고민했던 부분이다. 오르막 눈물고개와 내리막 웃음고개를 통해 한글을 쏘아 올리신 세종대왕의 굽이굽이 그 뿌리 깊은 마음을 극으로 꽃피워보고 싶었다.
작가로서 <까막눈의 왕>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부분은 ‘맹꽁이가 등장하는 극중극’과 ‘들풀마마들’이라는 궁궐 마루 밑 귀신 캐릭터들이 극을 지탱하는 코러스 역할을 하는 대목이다. 맹꽁이가 등장하는 극중극을 집어넣은 이유는 세종대왕이야말로 ‘맹꽁이’ 같았을 거란 확신이 있어서다.
“위대한 중국 한자(漢字)가 있는데 왜 새 글자를 만들어? 왕이면 다야? 쓸 데 없이!”
사대주의에 쩌든 유림들이 악을 쓰며 지랄을 하고, 천조국을 자처하는 중국 놈들이 도끼눈을 뜨고 죽어라 간섭할 때, 대왕은 맹꽁이처럼 눈을 닫고 귀를 닫고 웅크리고 앉아 오로지 한글이라는 한 우물만 팠을 것이기 때문이다. 미련하게 백성만 생각한 당신, 세상 가장 거룩한 맹꽁이가 한글이라는 화수분을 만들어낸 것이다.
코러스 역할을 하는 ‘들풀마마들’은 경복궁 마루 밑에 사는 귀신들이다. 들에 핀 풀꽃처럼 짓밟히며 저마다 서러운 아픔을 품고 스러진 민초들이다. 귀신들이 춤추고 노래하며 극을 주도한다는 설정도 기발하지만, 왠지 세종대왕이라면 억울하고 불쌍한 귀신들의 목소리까지 커다란 귀로 듣고 따뜻한 손으로 보듬어주셨을 것 같다. 경복궁 말고 청와대 마루 밑에도 들풀마마들이 있었더라면,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람이 단 한사람이라도 있었더라면, 하는 마음, 금할 수 없다. 이제라도 청와대 도입이 시급하다.
한글 창제와 관련하여 내가 이 작품에 부각시키고자 했던 두 가지는 ‘불교’와 ‘민요’다. 세종대왕이 불교신자였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한글 창제에 스님들이 지대한 공을 세웠다는 것을 아는 사람도 많지 않다. 세종대왕이 쓴 첫 한글 서사시가 부처님을 찬양한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임을 아는 이는 과연 많던가? 세간에 한글과 불교의 관계가 쉬쉬대며 감춰져 왔기에 불교와 스님들의 역할을 이 극에 ‘염화시중의 미소’처럼 녹여 넣었다.
물 긷는 아낙의 노래, 쟁기질 하는 농부의 소리, 민중들의 진솔한 삶을 담은 민요가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에 기여했으리라는 것은 역사 기록에 없는 순전히 나의 상상이며 픽션이다. 그러나 민중을 위한 글자를 만들면서 민중의 노랫소리에 대왕이 귀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을 나는 오히려 상상할 수 없다. 정사에 기록된 세종의 절대 음감과 우리 음악에 대한 집요한 애정과 관심으로 봤을 때, 한글과 민요의 연결 고리가 픽션이 아니라 그 개연성이 차고 넘침을 관객들이 알아줬으면 좋겠다.
2018년은 세종대왕 즉위 600주년이다. 6년 만에 국립국악원에서 다시 공연을 올린다 하여, 기쁜 마음으로 대본을 더 멋지게 다듬었다. 이번엔 온양관광호텔에 묵으면서 대본 작업을 했다. 거기엔 비석이 있다. 이 호텔이 세종대왕이 한글 창제에 지쳐 목욕하며 힘내시던 바로 그 온천 자리이다. 창작곡을 더 추가했으며, 대사는 훨씬 간결하게 다듬었다. 늘어지는 장면도 에너지 있게 휘어잡았다.
소리극 <까막눈의 왕>을 왜 봐야하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우선 귀가 즐겁고, 눈이 즐거우며, 결정적으로 마음이 즐겁기에 꼭 봐야한다고 말하고 싶다. 대한민국 최고의 절창, 국립국악원 명창들의 소리와 김성국 작곡가의 아름다운 선율이 휘몰아쳐 귀가 즐겁다. 정호붕 연출가의 역동적인 연출력과 김봉순 무용가의 화려한 안무가 어우러져 부시게 눈이 즐겁다. 무엇보다 세종이라는 맹꽁이 왕이 한글이라는 혁명을 퍼 올리는 격정적 그 순간에, 울컥하면서도 마음이 벅차게 즐겁다. 무료 초대권을 기대할 생각을 절대 말고, 서둘러 국립국악원 <까막눈의 왕> 공연 티켓을 예매해야 하는 절대적 이유다. 아이들이 게임이나 웹툰에 눈 팔려 이 공연을 안 본다고 떼쓰면, 귀를 잡아당기거나 등짝을 패서라도 반드시 <까막눈의 왕>을 보게 해야 하는 이유이다.
만 원짜리 지폐에 그분의 얼굴이 환하게 그려진 것은 그 빚을 두고두고 갚으라는 절절한 메시지인지도 모른다. 너무 크고 넓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소리극 <까막눈의 왕>을 통해 관객들이 그간 잊고 살던 세종대왕의 위대함과 한글의 소중함을 잠시라도 느낄 수 있다면, 대왕 덕택에 먹고 사는 작가로서 그분께 천 원어치라도 빚을 갚을 듯하다. 세종대왕께서 평소 그토록 고기를 좋아하시고 맛있게 드셨다 하니, 오늘 밤 한우 꽃등심과 차돌박이 한 상에 소주 한 잔 그득 올리고 싶다.
국악누리 2018, 9+10월 호 특집기사 中
-소리극 <까막눈의 왕> 탄생기
사 성 구(중앙대학교 전통예술학부 겸임교수)
가끔 술에 취해 광화문에 서면 눈물이 난다. 왕답지 않은 왕을 둔다는 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왕다운 왕을 둔다는 건 얼마나 벅차게 행복한 일인가?
광화문에 앉아 계신 가슴 벅찬 왕, 세종대왕은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에 비유하자면, 수천 년 까막눈들의 어두운 강을 처음 밝히신 달이다. 그가 캄캄한 혼돈의 우물에서 퍼 올린 한글은 우리 민족에게 하늘 열리는 혁명이다. 끝없이 복 주는 화수분이고, 생각의 우주를 바꾸어 놓은 빅뱅(우리는 이렇게 외국어까지도 한글로 쉽게 쓸 수 있다)이다.
소리극 <까막눈의 왕>이라는 거대한 프로젝트는 본디 낯선 민요 한 곡에서 비롯되었다. 어느 더운 여름날로 기억한다. 한 명창께서 경기 민요 하나를 A4용지의 화두로 던져주고, 그 소리를 바탕으로 소소한 공연을 올리고 싶다고 하셨다.
가나다라마바사, 아자차, 잊었구나
가갸거겨 가문 높은 우리 님은 거룩하기 짝이 없네
나냐너녀 나래 위에다 임을 싣고 너울너울 날아나 볼까
다댜더뎌 다정할 손 우리 낭군 다닥다닥 다감한데
라랴러려 라귀채를 툭툭 쳐서 정든 임을 보고지고
‘국문뒤풀이’라는 그 민요 가사를 소리 내어 읽는 순간, 여름 번개에 정수리를 빗겨 맞은 느낌이 들었다. 래퍼들이 랩을 짤 때 라임을 맞추듯,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자유자재로 배열하는 그 재미난 놀라움이란. 세상 삼라만상을 세상 가장 손쉬운 자음과 모음으로 그려내는 저 한글의 경이로움이란. 공기의 소중함처럼 잊고 살던 한글의 위대함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비로소 ‘ㅎㅎ’하고 미소가 번졌다. ‘ㅋㅋ’하고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하물며 ‘ㅠㅠ’하고 울음을 터뜨리고, ‘ㅉㅉ’하고 혀를 찰 수 있는, 21세기 스마트폰 시대까지 내다본 저 위대한 글자, 이게 다 누구 덕이란 말인가?
그때, 인기척이 느껴져 뒤돌아보자, 세종대왕이 뒷짐을 지고 서 계셨다.
“나야, 임마!”
세종대왕께서 씩 웃으며 말씀하셨다. 인사를 꾸벅하고 집으로 돌아와, 그분이 그려진 만 원짜리를 책상머리에 붙여두고 5일 만에 일필휘지로 <까막눈의 왕> 대본을 완성했다. 작가가 대본을 쓸 때 흥이 나고 재미가 나서 몸서리치면, 그 공연판은 대부분 성공으로 몸서리치기 마련이다.
2011년 그해 가을, 국립국악원의 소리꾼과 악사들이 왜 당대 최고 소리꾼들이며 악사들인지 증명하는 초연 공연이 우면당에서 화려한 막을 올렸다. 다시 2012년 봄, 극의 몸집을 키워 국립국악원 브랜드공연이라는 찬사를 얻으며 <까막눈의 왕>은 예악당에서 눈부신 기립 박수를 받았다.
눈은 있으되 글을 읽을 줄 몰라 칠흑 같이 어두운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을 우리는 ‘까막눈’이라 부른다. 이 작품은 그런 까막눈들의 새까만 마음을 훤히 밝혀주신 ‘까막눈의 왕’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여정과 그 눈물겨운 성취를 오롯이 담아내고 있다.
전통 소리극은 민요 ‘아리랑’이 펼쳐내는 미학처럼, 엄숙한 비장함과 우스꽝스런 해학이 한판 구불구불 굽이쳐야 한다는 것이 작가로서 내 오랜 지론이다. 세종대왕의 고뇌에 찬 눈물을 고스란히 담아내면서도 따뜻한 웃음과 사랑을 통해 세상을 긍정하는 그분의 힘을 보여주는 것, 바로 이 작품을 쓰면서 가장 고민했던 부분이다. 오르막 눈물고개와 내리막 웃음고개를 통해 한글을 쏘아 올리신 세종대왕의 굽이굽이 그 뿌리 깊은 마음을 극으로 꽃피워보고 싶었다.
작가로서 <까막눈의 왕>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부분은 ‘맹꽁이가 등장하는 극중극’과 ‘들풀마마들’이라는 궁궐 마루 밑 귀신 캐릭터들이 극을 지탱하는 코러스 역할을 하는 대목이다. 맹꽁이가 등장하는 극중극을 집어넣은 이유는 세종대왕이야말로 ‘맹꽁이’ 같았을 거란 확신이 있어서다.
“위대한 중국 한자(漢字)가 있는데 왜 새 글자를 만들어? 왕이면 다야? 쓸 데 없이!”
사대주의에 쩌든 유림들이 악을 쓰며 지랄을 하고, 천조국을 자처하는 중국 놈들이 도끼눈을 뜨고 죽어라 간섭할 때, 대왕은 맹꽁이처럼 눈을 닫고 귀를 닫고 웅크리고 앉아 오로지 한글이라는 한 우물만 팠을 것이기 때문이다. 미련하게 백성만 생각한 당신, 세상 가장 거룩한 맹꽁이가 한글이라는 화수분을 만들어낸 것이다.
코러스 역할을 하는 ‘들풀마마들’은 경복궁 마루 밑에 사는 귀신들이다. 들에 핀 풀꽃처럼 짓밟히며 저마다 서러운 아픔을 품고 스러진 민초들이다. 귀신들이 춤추고 노래하며 극을 주도한다는 설정도 기발하지만, 왠지 세종대왕이라면 억울하고 불쌍한 귀신들의 목소리까지 커다란 귀로 듣고 따뜻한 손으로 보듬어주셨을 것 같다. 경복궁 말고 청와대 마루 밑에도 들풀마마들이 있었더라면,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람이 단 한사람이라도 있었더라면, 하는 마음, 금할 수 없다. 이제라도 청와대 도입이 시급하다.
한글 창제와 관련하여 내가 이 작품에 부각시키고자 했던 두 가지는 ‘불교’와 ‘민요’다. 세종대왕이 불교신자였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한글 창제에 스님들이 지대한 공을 세웠다는 것을 아는 사람도 많지 않다. 세종대왕이 쓴 첫 한글 서사시가 부처님을 찬양한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임을 아는 이는 과연 많던가? 세간에 한글과 불교의 관계가 쉬쉬대며 감춰져 왔기에 불교와 스님들의 역할을 이 극에 ‘염화시중의 미소’처럼 녹여 넣었다.
물 긷는 아낙의 노래, 쟁기질 하는 농부의 소리, 민중들의 진솔한 삶을 담은 민요가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에 기여했으리라는 것은 역사 기록에 없는 순전히 나의 상상이며 픽션이다. 그러나 민중을 위한 글자를 만들면서 민중의 노랫소리에 대왕이 귀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을 나는 오히려 상상할 수 없다. 정사에 기록된 세종의 절대 음감과 우리 음악에 대한 집요한 애정과 관심으로 봤을 때, 한글과 민요의 연결 고리가 픽션이 아니라 그 개연성이 차고 넘침을 관객들이 알아줬으면 좋겠다.
2018년은 세종대왕 즉위 600주년이다. 6년 만에 국립국악원에서 다시 공연을 올린다 하여, 기쁜 마음으로 대본을 더 멋지게 다듬었다. 이번엔 온양관광호텔에 묵으면서 대본 작업을 했다. 거기엔 비석이 있다. 이 호텔이 세종대왕이 한글 창제에 지쳐 목욕하며 힘내시던 바로 그 온천 자리이다. 창작곡을 더 추가했으며, 대사는 훨씬 간결하게 다듬었다. 늘어지는 장면도 에너지 있게 휘어잡았다.
소리극 <까막눈의 왕>을 왜 봐야하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우선 귀가 즐겁고, 눈이 즐거우며, 결정적으로 마음이 즐겁기에 꼭 봐야한다고 말하고 싶다. 대한민국 최고의 절창, 국립국악원 명창들의 소리와 김성국 작곡가의 아름다운 선율이 휘몰아쳐 귀가 즐겁다. 정호붕 연출가의 역동적인 연출력과 김봉순 무용가의 화려한 안무가 어우러져 부시게 눈이 즐겁다. 무엇보다 세종이라는 맹꽁이 왕이 한글이라는 혁명을 퍼 올리는 격정적 그 순간에, 울컥하면서도 마음이 벅차게 즐겁다. 무료 초대권을 기대할 생각을 절대 말고, 서둘러 국립국악원 <까막눈의 왕> 공연 티켓을 예매해야 하는 절대적 이유다. 아이들이 게임이나 웹툰에 눈 팔려 이 공연을 안 본다고 떼쓰면, 귀를 잡아당기거나 등짝을 패서라도 반드시 <까막눈의 왕>을 보게 해야 하는 이유이다.
만 원짜리 지폐에 그분의 얼굴이 환하게 그려진 것은 그 빚을 두고두고 갚으라는 절절한 메시지인지도 모른다. 너무 크고 넓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소리극 <까막눈의 왕>을 통해 관객들이 그간 잊고 살던 세종대왕의 위대함과 한글의 소중함을 잠시라도 느낄 수 있다면, 대왕 덕택에 먹고 사는 작가로서 그분께 천 원어치라도 빚을 갚을 듯하다. 세종대왕께서 평소 그토록 고기를 좋아하시고 맛있게 드셨다 하니, 오늘 밤 한우 꽃등심과 차돌박이 한 상에 소주 한 잔 그득 올리고 싶다.
국악누리 2018, 9+10월 호 특집기사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