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설명

핀터의 세계는 냉혹하고 허무한 현대 사회의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때는...> 는 부부 사이와 친구 사이를 조망한다. 그러나 이들 관계는 통념 상 가장 가까워야 하는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간에 권력 다툼이 팽팽하게 이루어진다. 또한 친구와 남편 또는 아내는 자신이 그 동안 상상하지도 못했던 낯선 존재로 다가온다. 이들은 서로의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해 마치 영화에서의 카메라의 시선과 같이, 응시를 통해서 상대방을 제압한다. 또한 감독이 영화를 편집하고 재구성하듯 자신의 현실 상황과 과거의 기억마저도 편집해서 자신에게 유리한 그림으로 만들고자 한다. 결국 과거의 진실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상태에서 진실이란 현재 파워가 있는 사람이 만들어 놓은 그림일 뿐이라는 인식이 강하게 여운으로 남게 된다.

어느새 현대인에게 영화는 '현실의 모방'이라는 위치를 전복하고, 오히려 현실이 영화를 반영하는 추세가 강해지고 있다. 점차 현실과 영화가 그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인간은 자신의 삶을 영화적으로 구성하고 영화의 인물과 동일시한다. 카메라의 시선은 여성의 몸을 관음증적으로 응시하면서 관객을 공범으로 만든다. 관객은 감독과 같이 또는 극중의 남성인물과 같이 여성을 객체로 만들어서 신비롭게 여기거나 지배의 대상으로 바라본다.

인간은 과거의 사건 역시 영화적으로 편집하고 현재의 자신의 의도에 따라 각색하고는 자신도 모르게 어느새 그것을 진실로 믿어버린다. 그래서 사람들은 각각 다른 기억을 가지게 되는데, 어느 것이 진실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역사는 살아있는 사람의 것이며, 강자의 언술이 진실이 되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번 공연은 서로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는 '진실과 권력의 관계'를 미시권력적인 관점으로 조명하고 있다.

이번 공연의 컨셉은 어느 것이 영화이고 현실인가를 구분할 수 없는 경계의 지점에서 살고 있는 현대인의 자화상이다. 영화와 현실의 경계가 모호한 것처럼 인간의 기억과 현재는 그 경계가 구분되어지지 않은 채, 기억마저도 현실의 파워게임의 수단이 되고 있음을 시각적으로 형상하고자 한다. 그래서 가장 친밀한 관계여야 하는 부부와 친구 사이에서 너무나 큰 허공의 간극이 존재하는 현대인의 실존상황을 그려내고자 한다.

줄거리

딜리와 케이트는 20년이 된 부부 사이이다. 이들에게 20년 만에 케이트의 룸메이트였던 친구 애나가 찾아오면서 극이 시작된다. 그러나 애나는 과연 단순한 친구였을까 아니면 애나와 케이트는 다른 관계였을까 또한 딜리와 애나는 정말 모르는 사이였을까 아니면 이들의 관계 역시 케이트는 모르는 관계였을까 애나는 실존인물인가 아니면 이들 부부가 환상으로 만들어낸 가공의 인물인가 등등의 의문의 여지를 남긴다. 단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케이트를 놓고 딜리와 애나가 끊임없이 파워게임을 벌이고, 결국 케이트는 이들의 욕구를 무시한 채 스스로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정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