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설명

피아졸라의 회상 (피아졸라 탱고음악회) 
피아졸라는 1921년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 남부의 마르 델 플라타에서 이탈리아계 이민자 가정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1929년 아버지가 반도네온을 물려주면서 처음으로 음악을 시작하였다. 1930년 그는 부모를 따라 유년기를 미국 뉴욕에서 보냈다. 이 당시 그는 탱고보다는 재즈와 클래식 음악을 주로 듣고, 바흐, 슈만의 음악과 유행하던 재즈 음악을 반도네온으로 연주하길 좋아했는데, 이는 그가 주로 하던 탱고와 다른 장르의 음악 사이의 크로스오버에도 영향을 미친다. 피아졸라는 열세 살때 당대 탱고의 거장 카를로스 가르델을 만나고, 그의 앞에서 연주할 기회를 갖게 된다. 이때 가르델은 그에게 '연주 실력은 훌룡하지만, 탱고를 양놈[3]처럼 연주한다'는 평을 했는데, 그 당시 피아졸라가 재즈, 클래식에 관심이 많았으므로 정확한 지적이었고, 나중에 피아졸라가 정통 탱고에서 벗어난 것을 생각하면 수십년 후를 예언한 평이었다. 한편으로 가르델은 피아졸라의 연주 실력을 눈여겨보고 자신의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할 기회를 주기도 했고, 자신의 연주 여행에 함께할 것을 권했다. 하지만 피아졸라의 아버지가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반대했는데, 가르델과 그의 악단은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훗날 피아졸라는 인터뷰에서 '내가 그때 간다고 우겼거나 아버지가 허락했으면, 반도네온 대신 구름 위에서 하프를 뜯고 있었겠지…'라는 말을 했다. 

1936년, 아르헨티나의 고향으로 가족과 돌아오면서 피아졸라는 여러 탱고 오케스트라에서 연주자로 활동했다. 이 당시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은 바르다로의 6중주단이었다. 이 당시 탱고는 빅 밴드 오케스트라가 주로 연주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실내악 탱고는 그에게 신선한 충격이었으며, 피아졸라도 이후 이에 영향을 받아 실내악단 '부에노스 아이레스 8중주단'을 결성한다. 그의 나이 17살 때, 피아졸라는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상경해 당시 최고의 탱고 악단이었던 아니발 트로일로의 악단에 연주자로 들어간다. 피아졸라는 그 곳에서 월 240달러를 받으며 반도네온 연주 외에도 편곡, 피아노 연주 등을 맡으며 재능을 드러냈지만, 본인은 '카바레는 매음굴이었다'고 회상하면서 그 시절에 대해 넌더리를 내었다. 그의 회상에 의하면 숙소는 개판이었고, 여러 동료들 중 약 안 빨고, 여자랑 안 논 것도 그뿐이었다고. 

그러던 중 1941년, 아르헨티나를 방문한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을 찾아가 자신의 피아노 협주곡을 평해달라고 요청하는 패기를 보였고, 루빈스타인은 이 부탁을 너그러이 받아들이면서 피아노 파트를 연주하고서는 '다 좋은데, 오케스트라 파트는 어디 있나?'라고 물었다. 그런데 그게 없었다. 음악이론이 부족했던 피아졸라는 피아노 독주곡을 쓰고는 협주곡이라고 이름을 붙였던 것이다. 루빈스타인은 그럼에도 그의 재능을 눈여겨 보고 작곡가 알베르토 히나스테라[4]를 사사할 기회를 주었다. 

이후 피아졸라는 히나스테라의 밑에서 음악 이론을 배우고, 문학, 미술 등 교양을 쌓으면서 탱고 연주자로도 활동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첫 아내 데데와 결혼하여 1남 1녀를 두었다. 6년간 히나스테라에게 배우면서 첫 클래식 작품을 발표하기도 한 피아졸라는 점점 기성 탱고 음악계와 갈등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작품 편곡을 놓고 팔리게 만들려는 트로일로에게 반발을 맞기도 했고, 피아졸라도 맘에 안드는 동료나 공연 와서 들으라는 음악은 안듣고 염장질이나 하던[5] 손님들에게 폭죽이나 쓰레기를 던졌다고 한다. 결국 이런저런 문제가 쌓인 끝에 그는 1944년 트로일로의 악단을 떠나 1946년 자신만의 악단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오르케스타[6] 티피카'(이하 티피카)를 결성하고, 작품을 발표하면서 독립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