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설명

우리연극만들기, 열 세 번째 이야기
〈우리연극만들기〉는 1993년에 시작하여 올해까지 24년간 지속되어 온 대표적인 창작극 발굴 프로젝트이다. 지금까지 총 26명의 작가가 총 27편의 창작 초연작을 선보였을 뿐 아니라 기성 작가와 연출 중심의 기존 창작 작업에서 벗어나 무대미술, 드라마트루그, 배우들에 이르기까지 여러 공연 주체들의 공동작업, 열린 제작 과정을 통해 창작공연 제작의 새로운 방법론을 지향해왔다.
올해로 26년째가 되는 우리연극만들기는 2018년 작품 공모를 통해 두 작품이 선정되어 낭독공연으로 선보여 작품에 대한 의견들을 수렴하여 작품의 수정?보완에 극단 단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이를 올 11월에 선보이게 되었다. ‘한국연극평론가협회’ 특별상 수상을 수상한 바 있는 〈우리연극만들기〉는 오랜 기간 한국연극계에 희곡작가 발굴과 창작극 활성화를 위한 무대로 그 가치를 평가할 수 있다. 그 동안 이 무대를 거쳐간 작가들 또한 국내 연극계에 주목을 받으며 현재까지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2019년 ‘현재’, ‘우리’의 이야기로 만나는 창작 신작 2편
13번째 〈우리연극만들기〉는 우리 사회의 현실을 반영하는 두 작품, 〈첫째, 둘째, 셋째, 넷째〉와 〈신입사원〉을 공연한다. 전자의 공연은 현재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미처 돌아보지 못했던 삶의 따뜻함을, 후자의 공연은 우리가 외면하는 죄의식과 고통을 추적하면서 이를 왜, 어떻게 마주할 수 있는지 삶의 성찰을 불러일으킨다.
두 작품 모두 관객들에게 자신을 돌아보게 만든다는 공통점을 가졌다. 이러한 작품을 통해 맹목적으로 바쁘게 돌아가 가는 현실 속에서 잠시나마 우리의 삶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지 보여주고자 한다. 또한 우리가 망각하고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혹 현재 우리 삶의 불안함과 막연함이 이 외면하고 있는 ‘어떤 것’에 기인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관객들에게 작품을 통해 질문하고자 한다.

〈첫째, 둘째, 셋째, 넷째,〉 - 이정운 작, 최용훈 연출

〈첫째, 둘째, 셋째, 넷째〉는 각기 다른 시간대의 네 형제의 이야기로 ‘무책임한 어른들과, 준비되어 있지 않은 청년들’에 대한 이야기다.
‘살만한 세상’의 가면을 쓰고 우리를 설레게 했던 사회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좋은 세상이 올 줄 알았는데 삶은 끈질기게 팍팍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살만한 세상이 아니라고 절망할 필요는 없다. 작은 움직임의 기적을 이제는 알고 있으니까. 또 다시 촛불 하나하나가 모여 불가능한 꿈을 현실로 만들 날은 반드시 올 테니까. 나의 글이, 절망의 벽 앞에서도 다시 시작하길 원하는 이들에게 ‘용기’와 ‘위로’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여전히 이 세상은 살아내기 퍽퍽한 사막과 같다. 어른이지만 어른이 되지 못한, 그리고 어른이지만 어른답지 못한, 그런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언제나 거리를 두고 관조할 수 없는 삶 속에 치여서 굴러가는 우리의 모습들을 관객들이 마주대하고 자신만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고 이 세상 살아내는 것이 원래 그런 거라며 마음의 위안을 찾기를 바란다. 너무도 일상적인 삶의 모습과 연극적으로 비워진 공간, 환상처럼 시간의 간극을 뛰어넘어 마주 대하는 각자의 20대와 40대. 연극적인 연극을 지향해 본다.

줄거리

노모(老母)의 장례식장. 같은 공간 속에 다른 시간의 네 형제들이 있다. 20대와 40대의 네 형제들은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다. 노모의 죽음을 슬퍼하는 20대의 네 형제들과는 달리, 40대의 네 형제들은 호상(好喪)이라 말한다. 시공간이 열리면서 그들 각각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20대의 네 형제는 부모가 떠난 후 마땅한 대책도 없이 세상 밖으로 쫓겨나게 될 현실과 마주한다. 몸만 어른인 네 형제에게는 이 모든 상황은 역부족이다. 뒤늦게, 부모가 남겨놓은 보석함의 존재가 드러나게 되고 그들은 보석함 안에 많은 유산이 준비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희망에 부풀어 있는 것도 잠시. 그들은 재산 분배에 따른 이해관계에 부딪쳐, 결국 이기적인 야수성까지 드러낸다.
40대의 네 형제의 노모(老母)는, 잊을 만하면 죽을 것 같다며 가족들을 불러 모은다. 그렇게 어머니의 집으로 소환되었다가 다시 돌아가기를 반복하는 네 형제들은 이미 지쳐버린 지 오래다. 오늘도 같은 이유로 집에 모인 네 형제는 각자 서로 다른 이야기를 품고 있다.
다시, 노모의 장례식장. 같은 공간 속에 다른 시간의 네 형제들이 있다. 20대와 40대의 네 형제들은 서로와 마주한다. 서로를 알아보는 듯, 혹은 못 알아보는 듯. 여전히, 40대의 네 형제들은 노모의 죽음을 호상(好喪)이라 말한다. 그리고 20대의 네 형제들은 노모의 죽음을 호상이라고 말하는 그들의 아픔에 ‘괜찮아’라고 속삭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