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설명
한국에서 처음 만나는 세르비아의 보석 같은 작품
‘스테리야상’에 빛나는 “유랑극단 쇼팔로비치”의 한국 초연
명동예술극장이 소개하고자 하는 많은 작품 중 동유럽권 작품의 첫 번째로 선택된 작품은 바로 세르비아(구. 유고연방) 최고의 작가 류보미르 시모비치의 <유랑극단 쇼팔로비치>이다.
1958년 시인으로 등단해 호평 속에 활동하던 작가는 1986년 이 작품으로 당시 유고슬라비아에서 가장 훌륭한 극작가에게 수여하던 문학상인 ‘스테리야상’을 수상했다. 시모비치의 작품에는 언제나 꿈을 좇는 이상주의적 염원이 나타나며, 어떤 역경과 시련 속에서도 꿈과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이상이 등장인물들에 표현되어 나타나곤 한다(번역자 주). 이러한 작가의 이상은 어김없이 <유랑극단 쇼팔로비치>에도 나타나 있다.
연극, 그리고 예술의 의미와 존재가치에 대한 물음
“빵 굽는 사람은 어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죠” “어디긴요 그야 빵가게죠!”
... “그럼, 배우는 어디 있어야 할까요” “... 극장에 있어야겠지요!”
<유랑극단 쇼팔로비치>은 전쟁 중에도 사람들에게 꿈과 이상,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배우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동시에 먹고 살기에도 힘든, 그래서 자신과는 다른 배우들을 탐탁치 않아 하는 마을 사람들이 등장한다. 극 초반 극단의 배우들과 공연을 제재하려는 독일군의 대립구도처럼 보이지만 극이 진행되면서, 실제로는 극단 사람들과 마을 사람들의 갈등이라는 것이 나타난다.
극중 전쟁 중에 남편을 잃은 젊은 미망인은 불쑥 배우들에게 의문을 제기한다. 사람이 죽고 다치고, 총성이 울리는 전쟁 중에 화려한 의상을 입고, 화장을 하고, 연기를 하는 것이 “잘 모르겠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바르다, 그르다’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혼란스러운 것이다. 그녀의 ‘혼란’에서 시작된 그들의 대화를 보면, 그녀로 대표되는 대중의 의견과 배우가 직업인 이들의 다각적인 의견이 등장한다. 심지어 극단의 배우들조차 ‘연극’에 대한 관점과 해석은 모두 다르다.
이들의 삶과 현실에 대한 인식 차이를 통해 우리는 더욱더 현실 속 예술의 의미에 대해 질문하게 된다. 무엇이 옳고 그름을 떠나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이상향에 대한 염원이 존재하는 것이다. 예술에 대해 어떤 질문을 할 것인가, 그리고 그에 대한 어떤 판단을 내릴 것인지에 대해서는 오롯이 관객의 몫으로 남겨둔다.
2차 세계대전 중인 세르비아의 작은 마을 우지체
그곳에서 벌어지는 ‘삶과 예술의 한판승부’
우지체에서 발견할 수 있는 한국, 우리의 모습
세르비아의 역사를 살펴보면, 한반도와의 유사한 점을 여럿 찾아볼 수 있다. 주위 강대국과의 갈등관계, 큰 전쟁의 경험, 다른 나라의 지배를 당하고, 이념 갈등과 민주화투쟁 등이 그러하다. 때문에 비록 낯선 언어의 작품이지만, <유랑극단 쇼팔로비치>은 한국인의 감수성을 자극할 수 있는 요소를 충분히 가지고 있다.
전쟁을 겪은 세대, 인간의 비이성을 눈으로 겪은 세대, 배고픔의 고통을 겪어본 세대. 그런 경험을 직접 하지 않았더라도, 그런 세대를 할아버지, 아버지로 둔 요즘 젊은이들. 그리고 자신의 시대를 살고 현실을 헤쳐 나가면서, 예술의 혼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는 예술을 사랑하는 이들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이 될 것이다. 시공간을 뛰어넘어 모두의 공감과 소통을 이끌어 내는 것이 연극이라면, <유랑극단 쇼팔로비치>은 그 어떤 작품보다도 연극의 역할에 충실한 공연이 될 것이다.
‘스테리야상’에 빛나는 “유랑극단 쇼팔로비치”의 한국 초연
명동예술극장이 소개하고자 하는 많은 작품 중 동유럽권 작품의 첫 번째로 선택된 작품은 바로 세르비아(구. 유고연방) 최고의 작가 류보미르 시모비치의 <유랑극단 쇼팔로비치>이다.
1958년 시인으로 등단해 호평 속에 활동하던 작가는 1986년 이 작품으로 당시 유고슬라비아에서 가장 훌륭한 극작가에게 수여하던 문학상인 ‘스테리야상’을 수상했다. 시모비치의 작품에는 언제나 꿈을 좇는 이상주의적 염원이 나타나며, 어떤 역경과 시련 속에서도 꿈과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이상이 등장인물들에 표현되어 나타나곤 한다(번역자 주). 이러한 작가의 이상은 어김없이 <유랑극단 쇼팔로비치>에도 나타나 있다.
연극, 그리고 예술의 의미와 존재가치에 대한 물음
“빵 굽는 사람은 어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죠” “어디긴요 그야 빵가게죠!”
... “그럼, 배우는 어디 있어야 할까요” “... 극장에 있어야겠지요!”
<유랑극단 쇼팔로비치>은 전쟁 중에도 사람들에게 꿈과 이상,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배우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동시에 먹고 살기에도 힘든, 그래서 자신과는 다른 배우들을 탐탁치 않아 하는 마을 사람들이 등장한다. 극 초반 극단의 배우들과 공연을 제재하려는 독일군의 대립구도처럼 보이지만 극이 진행되면서, 실제로는 극단 사람들과 마을 사람들의 갈등이라는 것이 나타난다.
극중 전쟁 중에 남편을 잃은 젊은 미망인은 불쑥 배우들에게 의문을 제기한다. 사람이 죽고 다치고, 총성이 울리는 전쟁 중에 화려한 의상을 입고, 화장을 하고, 연기를 하는 것이 “잘 모르겠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바르다, 그르다’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혼란스러운 것이다. 그녀의 ‘혼란’에서 시작된 그들의 대화를 보면, 그녀로 대표되는 대중의 의견과 배우가 직업인 이들의 다각적인 의견이 등장한다. 심지어 극단의 배우들조차 ‘연극’에 대한 관점과 해석은 모두 다르다.
이들의 삶과 현실에 대한 인식 차이를 통해 우리는 더욱더 현실 속 예술의 의미에 대해 질문하게 된다. 무엇이 옳고 그름을 떠나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이상향에 대한 염원이 존재하는 것이다. 예술에 대해 어떤 질문을 할 것인가, 그리고 그에 대한 어떤 판단을 내릴 것인지에 대해서는 오롯이 관객의 몫으로 남겨둔다.
2차 세계대전 중인 세르비아의 작은 마을 우지체
그곳에서 벌어지는 ‘삶과 예술의 한판승부’
우지체에서 발견할 수 있는 한국, 우리의 모습
세르비아의 역사를 살펴보면, 한반도와의 유사한 점을 여럿 찾아볼 수 있다. 주위 강대국과의 갈등관계, 큰 전쟁의 경험, 다른 나라의 지배를 당하고, 이념 갈등과 민주화투쟁 등이 그러하다. 때문에 비록 낯선 언어의 작품이지만, <유랑극단 쇼팔로비치>은 한국인의 감수성을 자극할 수 있는 요소를 충분히 가지고 있다.
전쟁을 겪은 세대, 인간의 비이성을 눈으로 겪은 세대, 배고픔의 고통을 겪어본 세대. 그런 경험을 직접 하지 않았더라도, 그런 세대를 할아버지, 아버지로 둔 요즘 젊은이들. 그리고 자신의 시대를 살고 현실을 헤쳐 나가면서, 예술의 혼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는 예술을 사랑하는 이들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이 될 것이다. 시공간을 뛰어넘어 모두의 공감과 소통을 이끌어 내는 것이 연극이라면, <유랑극단 쇼팔로비치>은 그 어떤 작품보다도 연극의 역할에 충실한 공연이 될 것이다.
줄거리
<줄거리> 2차 세계대전 중 세르비야의 작은 마을, 찌는 듯한 여름날. 여자들만 있는, 남자라고는 나이든 술주정뱅이와 끔찍한 점령군만이 있는 마을에 유랑극단이 찾아온다. 공연을 홍보하던 배우들은 소동을 피운다며 경찰서로 끌려가고 그들의 화려하고 자유로운 행동을 마땅찮아하던 마을사람들은 속시원해한다. 연극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경찰들은 극과 현실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들에게 더욱 화가 나지만 공연허가증을 보고 할 수 없이 보내준다. 전쟁에서 남편을 잃은 미망인 심카는 삶과 죽음의 기로에 있는 전쟁 중에도 공연을 하는 의미를 묻지만, 배우들은 배우이기 때문에 공연을 할 뿐이라며 당연하다는 듯 답한다. 그날 오후, 경찰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공연허가증을 찢어서 먹어버린 후 배우들에게 공연금지를 선언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