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설명

소통의 부재, 처방전이 필요해 - 연극 <나쁜 엄마를 위한 변명>

가족 간 소통의 부재가 문제다. 치유와 회복이 필요하다. 길 위에 선 가족, 그 우울의 시대, 사회적 우울증을 진단하고 처방을 내리는 한 편의 연극이 무대에 올려진다.
<나쁜 엄마를 위한 변명> 올해로 창단 39주년을 맞는 극단 <맥토>의 시대를 위한 전언이다.
모든 가족이 겪었거나 겪고 있는 소통 부재의 문제에 돋보기를 들이대며 일상 속으로 들어간다. 그들이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각자 자기 삶을 짊어지기에도 버거워 다른 사람의 아픔과 문제를 들여다볼 수 없었을 뿐이다. 다른 사람 이야기가 아닌 나의 이야기, 우리 가족의 이야기를 무대에 올려놓은 듯 현실감을 드러냄으로써 스스로를 투영하도록 초청한다. 이 연극, 가족이 함께 보아야 할 이유가 거기 있다.

1. 관계를 이야기하다. - 어째서 <나쁜 엄마를 위한 변명>인가.
부르기만 해도 눈물이 핑 도는 이름 <엄마>.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라는 말을 인터넷 검색창에 적어 넣으면 이런 말들이 가장 많이 떠오른다. [엄마 때문에 못 살겠어요.][엄마 때문에 짜증나서 미치겠어요.][엄마 때문에 난 죽고 싶어요.] 아이들은 엄마를 좋아하지만 좋아하지 않는다. 그 아이들이 자라 엄마가 된다. 많은 엄마들이 스스로를 나쁜 엄마라고 여기며 살아간다. 그러나 어떤 엄마가 나쁜 엄마이고 싶으랴. 엄마도 누군가에게 이해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사람일 뿐이다.

2. 소통을 이야기하다. - 사랑도 때로는 폭력이 된다.
부모와 자식, 특히 엄마와 딸은 가장 가까우면서 가장 멀리 있는, 가장 사랑하면서 가장 상처를 많이 주고받는 사이다. 잘하려고 시작한 일이 오해가 되어 야단만 치고 있다거나 서로 대화가 안 되는 경우도 엄마와 딸 사이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다. 백번 천번 마음을 다잡아도 욱하는 마음 한 번에 모든 게 틀어지기도 한다. 부부 사이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하란 말이야?”“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지겨워, 지긋지긋해.”“지쳤어. 그만 할래.”그들, 서로를 이해하지 못 한다. 하고 싶었던 말을 그렇게 대신한다. 그러나, 사랑이 사랑이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다. 팔을 뻗어 하트를 그리려는 노력, 서로의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일, 미안하다고 사랑한다고 고맙다고 말하는 일. 이 단순한 일들이 왜 그리 어려운 것인지.

이야기의 목표는 누구나 나름의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고 있지만 서로 그것을 알아주고 짐을 나누어지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이야기하는 데 있다. 물론 이야기는 인물들 간의 화해를 향해 달려간다. 지극히 소소한 데서 가족 간의 갈등이 시작되는 것처럼 화해도 지극히 작은 하나의 몸짓으로 가능한데 .... 용서와 치유와 화해를 위해 손만 조금 내밀어도 되는 것을 ...

누가 가족을, 어머니를, 무조건적 사랑의 존재라 하였던가? 가족이라는 이름은 오랫동안 연극의 주요 화두였다. 가족이라는 이름이 절망적인 세상의 희망과 치유가 되기를. 그러나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한 공간 안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라도, 그의 이름이 어머니 혹은 엄마이거나 아빠일지라도 정작 각자의 관심은 자기 자신에게만 향하여 있는 것을. 누구라도 자기 아픔에만 함몰되어 다른 이의 아픔은 들여다볼 줄 모르는 것을.

인물간의 관계를 중심으로 보면

젊어 과부가 된 할머니 미순, 드라마 작가인 그녀의 딸 혜원 ; 한 번도 서로를 따뜻하게 대해본 일이 없는 모녀간이다. 엄마에게는 엄마대로의 상처가 있고 딸에게는 딸대로의 상처가 있다. 서로는 상대의 상처를 독하게 파헤치기만 할 뿐 보듬어줄 줄 모른다.
이혼한 싱글맘 혜원과 사춘기 소녀 하늬 ; 혜원의 일방적 사랑, 폭포 같은 사랑이 하늬에게는 폭력으로 느껴진다. 엄마는 딸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고 딸은 엄마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다. 그냥 서로 지겨워할 뿐, 어떻게 나를 이해시키고 상대를 이해해야 하는지 알지 못 한다. 대화의 시도는 늘 언쟁으로 끝나고 마음의 갑갑함만 더해갈 뿐.
미순과 하늬의 사이는 그런대로 괜찮은데 각각의 모녀 사이에는 왜 관계를 풀어줄 실마리가 눈에 띄지 않는지 알 수 없다.

하늬와 혜원 사이에 이혼한 아버지 진욱이 있다. 진욱은 이미 그녀들에게 가족이 아니다. 미안함조차 없는 건 아니지만 지금은 지금의 가정에 충실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진욱으로서는 미안함이 너무 커서 미안하다고 말할 수 없는 마음이고,

옆집 순규네는 입만 벌리면 자식 자랑이다. 알고 보면 순규네는 현대판 고려장, 순대국 팔아 자식 키운 어머니를 미국 가 성공한 아들 순규에게서 버림을 받은 셈이다. 자식에 대한 외곬의 사랑을 바쳤을 뿐인데. 부끄러운 어머니라고.... 순규네는 미순의 가족을 자신의 가족처럼 여기며 살아왔지만 하늬네 가족들이 하늬의 가출 문제로 분주한 사이, 급성 폐렴에 걸려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것이 사람이다. 참으로 사람은, ....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결국 이 이야기는, 가족이지만 가족이 못 되는 사람들, 그러나 마침내 진정한 가족이 되는 이야기.
우리의 삶이 지치고 고단할 때, 마음 둘 데 없을 때 우리의 피로한 희망은 평온을 찾아 가정으로 되돌아온다던 영국 극작가 올리버 골드스미스의 말처럼.

객석과의 소통을 부수적 목적으로 하는 이 작품에는 이야기꾼이 등장한다.
이야기꾼의 등장이 이 연극을 완전히 열린 연극이 되게 기능하는 것은 아니나 객석의 시선을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여 극중 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하도록 유도하는 역할을 한다. 이야기가 끝나고 이야기꾼은 객석의 이야기를 무대 위로 끌어올린다. 이야기 속 사람들이 미처 하지 못 한 이야기들, 엄마가 딸에게 딸이 엄마에게 서로를 사랑한다고, 혹은 미안하다고 말 건네는 짧은 사연을 읽어주고 서로를 포옹하게 한다. 이 작은 이벤트를 위하여 연극이 시작되기 전 관객들은 사연을 적어내도록 유도된다, 이 또한 연극의 소통이라고 하는 사회적 역할을 확장함으로써 연극 문화의 저변을 확대하는 데에 그 목표가 있다. 연극이 삶에의 지향을 드높이는 교육적 역할을 당의로써 감싼 채 객석에 전달할 수 있는 매체임을 활용하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