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설명

인간 누구나 본능적으로 최고선상에서 품고 있는 가치, 사랑

유행가 가사처럼 사랑에 웃고 사랑에 운다는 것과 같이 인간의 감정을 이리저리 휘두를 수 있는 무언의 힘이 바로 사랑이 아닐까?
끊임없이 갈구하고 만족 할 만큼 채워지지 않는다면, 뼈 속 깊이까지 갈증을 느끼는 그것.
자연의 순리와 같이 어느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사랑의 에너지를 그 누가 감히 빼앗을 수 있단 말인가?
<우물>에서는 자연의 원초적 구성요소인 ‘물’과 인간의 원초적 감정인 ‘사랑’을 동일선상에 두고 본능적인 갈증에 대한 탐구를 해보고자 한다.


<작가의 글>

작가 이인수

<우물>은 어느 날 갑자기 먹먹하고 애틋해서 눈물이 날 것 같은 어떤 느낌의 덩어리로 내게 찾아온 이미지였다. 사랑을 거절당하고 죽은 여인, 그 여인의 혼이 떠나지 못하고 머물러 헤매고 있는 커다랗지만 비어있는 듯 한 냉랭한 집안, 그 집 한 가운데에 있는 우물, 그리고 그 우물에서 끊임없이 넘쳐흐르는 물, 그 물로 인해 온통 진창이 되어 버린 집의 마당. 나는 그 느낌과 그 이미지를 붙들고, 내 마음 속에 간직했고, 그것은 어느 날 <우물>이라고 내가 나중에 이름 지은 이 희곡이 되었다. <우물>을 쓰면서 나는 환희를 느꼈다. 유학 생활, 매일 매일 긴장 속에서 정해진 일과를 좇아서 과제를 완수해야 하는 숨 가쁜 생활 속에서, <우물>은 내 안에 잠자고 있던 감각과 사랑에 대한 그리움을 토해내듯 써내려 갈 수 있도록 해 주었기 때문이다. 관객들 역시 <우물>을 보면서, 일상 속에서 일상을 살아가기 위해 덮어 버리고 없는 듯 살아야 했던 사랑이 있다면, 그 아름다움에 대해 소리 높여 부르고 싶었던 노래가 있다면, 그 기쁨을 그 환희를 다시 한 번 되살려내고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우물>이 관객들과 만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박재완 선생님, 꼼꼼히 정확하게 작품을 읽어 주어 작품을 다듬는데 큰 도움을 주신 드라마 투르그 주소형 선생님, 내 마음 속에 예쁜 보석 승빈이, 언제나 감싸주고 격려해준 나의 연인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연출의 글>


연출 박재완

연출해석 사랑에의 갈증을 전 근대적 몸짓으로 읽는다

1. <오이디푸스 왕> 식 구성 논리
말라버린 사랑에서 비롯된‘갈증’과 그 원인을 추적하는 과정, 이것이 <우물>의 맥락으로 보인다. 그런데 갈증의 원인은 이미 극 이전에 전제됐다는 점이나 원인을 쫓는 핵심인물이 실은 원인으로 설정돼 있다는 점, 그리고 몇 인물은 이미 답을 알면서도 공포로 함구하거나 악착같이 단속 해 비밀로 묻으려한다는 점에서도 <우물>은 영락없이 <오이디푸스 왕>을 차용하고 있다. 인물구성형식도 그렇게 읽힌다.
갈증의 주체인 여성은 극 바깥에서 신처럼 지켜보고 있고, 무지無知한 채 말라버린 사랑의 올가미를 뒤집어 쓴 남성(남편)은 극 안에서 오이디푸스처럼 자신을 찾아 헤매고 있다. 나머지 모든 인물은 오직 이 사건에만 집중한다. 여기서 나는 인물의 전 근대성(탈 인간성, 혹은 집요한 극적 기능성)만을 포착한다. 그런데 물론 여기서 종치면 <우물>은 표절시비를 받을 수도 있겠지만, 이쯤에서 <우물>은 다른 획을 긋는다.
<검찰관>에는 검찰관과 하인처럼 <우물>에는 조사관과 하인이 등장한다. 이들은 앞의 인물들과는 다르게 우스꽝스럽고 우둔하게 굴지만 밉지는 않다. 지극히 인간적인데, 작품의 기능상으로는 약방의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해내 자칫 무거울 수 있는 작품의 분위기를 무거움의 우물에서 건져낸다.

2. 물신주의의 성향과 무당 굿 판 분위기
신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나는 인간, 운명예정설에 체포된 인간을 그린 <오이디푸스 왕>을 물어뜯기라도 하듯이 <우물>은 물신주의를 간판으로 내걸고 무당 굿 판을 벌이고 있다. 신 대신 자연에 귀의하겠다는 의사표시를 한다는 것. 이 굿판은 신명날 수도 있겠지만, <우물>에서는 준엄하게 그리고 일종의 ‘탁한 신선함’으로 진행되리란 예상을 해본다. 게다가, 이게 작가의도인지 정확히 알 바야 없지만 내가 읽기로, 작가는 인물에 전형성을 넣다 못해 아예 인간을 원초적, 원형적 물질로 간주하려는 느낌이 짙다. 물질은 신을 모르지 않는가. 갈증을 일으키는 물이 일본어로 ‘미주’이고 미주는 구성 상 오이디푸스의 신 대신 자리하고 있다. 또 미주는 죽은 아내 이름이면서 동시에 갈증으로 생명을 다한 ‘사랑’이니까 결국 죽은 사랑과 마른 우물, 그리고 죽은 인간이 모두 자연의 원초적 구성요소인 ‘물’로 등식을 만들고 있다. 한편 억압받아 짓눌린 인물, ‘바람’ 또한 문자 그대로 바람이니 이것을 나는 단순한 비유로 보기보다는 주제의식과 관련된 비유적 통찰력으로 받아들이고 등장인물 모두를 물질화(즉, 육화)시킬 근거로 간주하고자 한다. (개인적으로는 육화를 매개로 한 객관적 연기를 실험하고 선보일 수 있는 호기로 삼겠다.)

따라서 나는 ‘오이디푸스 식 신의 구성논리에 물신주의적 굿판을 파행적 섞어 넣음으로써 결과적으로 사랑에 관한 어떤 생소한 우화가 생산되는지’ 지켜보는 게 흥미로울 뿐이다.


연출 김창화

이 작품은 우리의 기억에 관한 공연입니다.
일상의 상실과 비 일상에 대한 경험이 기억이라는 장치를 통해 우리들에게 사랑과 증오에 대한 감각을 되살려줍니다.
우리의 기억이 우리들 경험의 경계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와 성찰의 시간을 되돌려 줄지 공연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줄거리

먼 옛날, 물이 귀한 마을에 하나 뿐인 우물이 멈춰버렸다. 그로 인해 고통을 겪고 있는 마을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도시에서 조사관과 보좌관이 파견된다. 그들은 우물가에서 한 소녀를 만난다. 무언가 그들에게 말을 하고자 하나, 하지 못하는 그녀에게 호기심이 생긴 조사관은 그녀의 집을 찾아간다. 그 소녀는 마을의 유지인 프락 공 집의 하녀 채송이다. 1년 전 그녀의 주인이자 프락의 아내인 미주가 죽은 후, 프락의 어머니인 카미르의 싸늘한 감시 속에서 살고 있다. 프락 역시 조사관을 도우라는 왕의 명령으로 고향에 돌아온다. 갑자기 고향을 떠나고 싶다는 카미르의 고집에 우물이 멈춘 것 외에도 무언가 다른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게 된다. 더욱이, 아내의 죽음에도 침착을 유지했건만, 자신도 모르게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그녀에 대한 그리움에 마음이 불편해진다. 조사관과 보좌관은 프락의 집에 머물면서 조사를 계속해 가는데, 우물이 멈춘 시점과 프락의 아내가 죽은 시점이 같은 것을 알게 되고 이상하게 여긴다. 프락의 아내를 찾아 마을로 돌아온 떠돌이 화가 바람은 그녀가 죽었다는 말에 그녀의 흔적이라도 찾아보려고 프락의 집에 침입했다가 잡힌다. 그러나, 그가 그 밤을 넘기지 못하고 살해를 당하자, 조사관과 프락 모두 당황한다. 프락은 카미르가 자신에게 숨기고 있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고 카미르를 추궁하지만 그녀는 입을 다물어 버리고, 오히려 프락의 뒤에서 조사관을 회유하여 모든 사건을 덮어버리고자 한다. 카미르와의 거래로 인해 채송과 사건의 해결을 약속 받은 조사관은 거짓으로 보고서를 작성하여 도시로 보내고 프락에게는 우물을 매장시키고 마을을 버려야 한다고 종용한다. 카미르에 위협 때문에 침묵을 지키고 있던 채송은 진실을 밝히기로 결심하고, 마치 미주의 혼이 자신에게 씌운 듯 연기를 하여 카미르가 미주를 죽이고 그 시신을 우물에 던진 것을 폭로한다. 결국 마을은 버려지지만, 자신이 미주를 사랑했고, 미주 역시 그를 사랑했음을 깨달은 프락은 마을을 떠나지 못하고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