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설명
기획의도
1. <집>을 이야기하다
인류의 역사는 필요에 의해 발전되어 왔다. 그 필요의 욕구가 가장 크게 나타난 요소가 있다면 무엇일까?
결국 그것은 ‘집’이 아닐까?
인간은 태어나기 전부터 엄마의 뱃속에서 자궁이라는 집을 임대하여 사용했다. 그곳에는 어떤 조건도 없었으며 어떤 금전적 가치도 존재하지 않았다. 안락하고 보호받으며 그곳에서 성장 할 수 있었다. 단 하나의 조건이 있었다면 10개월 뒤 방을 비워야 한다는 약속 정도. 인간에게 집은 그렇게 감싸 안아주는 엄마의 품과도 같은 공간이다.
하지만 지금 인간에게 집은 누구나 가지고 싶지만 아무나 가질 수는 없는 그것. 집은 항상 우리에게 소유욕을 불러일으키는 가치의 수단으로 인식되어 있다. 벽돌 한 장의 무게보다 훨씬 가벼운 행정사무용 도장범벅의 종잇조각에 집착하는 인간들. 그런 인간들은 정작 종잇조각에 둘러싸인 공간이 아닌 땀으로 쌓아 올린 모래와 물과 흙으로 구성된 공간에서 살아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안정을 찾고자 한다. 이 연극에서는 삶의 필수공간이자 필요공간인 <집>을 바라보며, 가치가 아닌 과정을 보여주고자 한다. 행정사무용 도장범벅의 종잇조각의 가치가 아닌 땀으로 쌓아올린 흙으로 구성된 집을 짓는 과정에 숨은 인류 지혜의 역사와 그 공간에서 삶을 지속하였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2. <집>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켜보다
대체로 드라마의 극적 긴장은 인간 갈등의 극한이나 존재 욕망의 끝 지점에서 보여 진다. 그러나 현실의 삶은 극적 순간보다 생활을 지속하기 위한 노력과 수고의 시간으로 더 많이 채워져 있다. 이 연극이 집을 바라보고 집이라는 도구의 역사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완성된 집이 가져다 주는 가치의 희열보다 그 과정이 가져다주는 집에 얽힌 사람들의 사연과 노고 속에 묻어있는 의미에 주목하며, 인간 존재의 한켠을 바라보는 것이다. 연극을 보고 나서 돌아가는 곳은 결국 집이다. 돌아간 집에서 침대에 누워 잠들기 전 당신은 집을 둘러볼 것이다. 그리고 생각할 것이다. 우리 집은 누가 만들었을까? 어떻게 만들어 졌을까?
3. <집>에서 쉴 수 있을까
결국 집은 인간이 사는 곳이다. 사는 공간을 만들어 그곳에서 쉬고 싶은 것이다. 엄마의 자궁에서 걱정 없이 보호받으며 살았던 공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천부적으로 주어졌던 엄마의 자궁이라는 임대주택에서 퇴거하고 살아가는 공간을 인간이 직접 만들어가는 과정의 이야기를 통하여 인간이 직접 만들며 살아야 하는 집이라는 공간에서 머물고 휴식하는 것이 가능할까란 질문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생명을 존속하기 위한 사람들의 노력과 그 같은 생명력의 결실체로서의 집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주어진 엄마의 자궁이라는 최초의 집에서 벗어나 스스로 보금자리를 만들어야 하는 인간. 인간은 결국 최초의 보금자리와 똑같은 집을 만들 수 있을까?
4. 전문연 창작팩토리 우수작품 제작지원 선정작
이 작품은 2009년 전국문예회관연합회에서 우수작품 제작지원을 받았다.
이전에 시도해보지 못한 <집>이라는 공간의 제작과정을 통한 주제표현으로 이목을 집중시켰으며 무대화된 집짓기의 과정은 연극표현의 가능성을 검증 받았다. 이번 공연은 더 확장된 사고를 바탕으로 새로운 표현을 통해 공연을 완성시킬 것이다.
연출의도
이 연극은 <집>을 주인공으로 하는 연극이다.
이것은 집에 얽힌 사람들의 사연과 함께 집의 구조와 재료, 집을 짓는 과정에서 나오는 문제해결방법에 대한 관심이다.
집이 현재와 같은 형태를 갖추기까지 인간들이 기울였던 환경의 적응과 이용이라는 측면을 바라보며, 눈에 보이는 것은 집이라는 외형이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은 인간들의 수고로움이며 집에 대한 진화의 역사이며 집을 구성하는 재료인 흙, 물, 바람, 햇빛들이 가진 본질과 근원의 시간임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너무나 친숙하여 무심히 보았던 집에 대하여 새로운 의미와 시선을 주는 것이다.
공연특징
1) 무대에 건축을 들여오다.
“집을 직각의 합으로 지으려던 일화가 있다. 조선시대 인정전을 지을 때의 일이다. 예로부터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하여 집을 짓는데 네모반듯함을 중히 여겼다.” -모자의 대사-
대체로 집을 바라보는 시각은 두 가지다. 하나는 튼튼한지, 디자인은 어떤지, 생활에 편한지 등 외형과 기능을
생각하는 정도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바탕으로 나타나는 집의 금전적 가치이다. 그러나 실제 집은 인류가 동굴에 살면서부터 현세대에 이르기까지 쉼 없이 고민하고 노력한 지혜의 산물이다. 그 수고의 대가로 우리는 만물의
영장으로써 금수와 다른 형태의 공간에서 살고 있다. 집은 30-40년 후 허물어지는 시멘트 덩어리가 아닌 발명과
진화의 역사를 가진 결합체인 것이다. 집의 역사성. 그 위대한 역사성을 무대 위에서 집을 직접 지어보며 보여주려
한다. 집 짓는 단순한 행위가 아닌 인간이 그 행위를 하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주고자 한다. 금수와 함께 어울려 하늘을 천정 삼았던 시대에서부터 50층의 아파트가 들어서기까지의 집이 가지는 역사성. 집의 성장을 보여주고자 한다.
2) 떠나야 하는 사람들
“안 혀, 참말로. 나는 짐 싸네. 어떻게 될지 모르는 집을 어떻게 짓냐고.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에 무슨 힘을 쓰것는가. 이런 것은 집이 아니라 괴물이여. 나는 일 못혀. -반장의 대사-
집을 짓는 것은 축제이다. 두 달에 걸친 시간 동안 인부와 집주인이 땀을 흘리고 마을사람들이 관심을 갖는다. 그
축제의 끝에는 환희가 있다. 환희의 결과물인 집은 움직이지 않는다. 항상 그곳에서 묵묵히 서있다. 지친 사람들을 끌어안고자 서있다. 가만히 움직이지 않는 집은 미련하다. 그래서 지혜로운 인간이 집을 계속 어루만져 주어야 한다. 바로 여기에 환희와 함께 회의가 공존한다. 인간은 언젠가는 떠나야 할 존재이기 때문이다. 집 수명이 다하기 전 집주인의 수명이 먼저 끝나기도 하며, 삶의 다른 이유들로 집을 떠나기도 한다. 움직이지 못하고 우직하고 미련하게 수용만 하는 집은 인간이 떠나면 의미를 상실한다. 그리고 결국 집은 허물어질 것이고 돌과 모래와 먼지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집은 계속 지어진다. 머물고자 만드는 공간에서 먼저 떠나가는 인간들.
3) 현장성
“한장가네~, 두장가네~~, 세장가네~~~, 네장가네~~~~” -거푸집을 나르며-
남의 집 짓는 과정에 어떤 재미가 있을까?
특별한 갈등과 사건이 없으니 지루하지 않을까?
공사현장의 겉모습은 삭막하고 답답하기 그지없다. 그러한 이미지는 우리로 하여금 지루하고 비생산적인 이미지로 남아있다. 가장 생산적인 공간이 가져오는 비생산적인 이미지. 아이러니한 이 상황을 궁금해 하며 현장의 내부를 살펴보면 그곳의 생동감을 느낄 수 있다. 무식한 망치가 쇳덩이를 박을 때 나는 청량한 쇳소리, 모래를 퍼는
삽과 모래 사이의 사부작거리는 마찰소리, 육중한 포크레인의 섬세한 움직임, 몸이 바쁜 인부와 입이 바쁜 감독관의 움직임, 땀 흘린 인부의 목구멍을 넘어가는 막걸리의 이동소리 등등.
이러한 요소를 무대화 시킨다면 무대는 활기를 띨 것이다. 시간에 따라 모습이 달라지는 집을 보여주고, 그것을
이뤄내는 노동을 배우들의 몸짓과 소리로 마치 춤을 추듯이 표현하여 노동에 숨어있는 리듬감과 들리지 않는
노동요를 들을 수 있게 할 것이다.
1. <집>을 이야기하다
인류의 역사는 필요에 의해 발전되어 왔다. 그 필요의 욕구가 가장 크게 나타난 요소가 있다면 무엇일까?
결국 그것은 ‘집’이 아닐까?
인간은 태어나기 전부터 엄마의 뱃속에서 자궁이라는 집을 임대하여 사용했다. 그곳에는 어떤 조건도 없었으며 어떤 금전적 가치도 존재하지 않았다. 안락하고 보호받으며 그곳에서 성장 할 수 있었다. 단 하나의 조건이 있었다면 10개월 뒤 방을 비워야 한다는 약속 정도. 인간에게 집은 그렇게 감싸 안아주는 엄마의 품과도 같은 공간이다.
하지만 지금 인간에게 집은 누구나 가지고 싶지만 아무나 가질 수는 없는 그것. 집은 항상 우리에게 소유욕을 불러일으키는 가치의 수단으로 인식되어 있다. 벽돌 한 장의 무게보다 훨씬 가벼운 행정사무용 도장범벅의 종잇조각에 집착하는 인간들. 그런 인간들은 정작 종잇조각에 둘러싸인 공간이 아닌 땀으로 쌓아 올린 모래와 물과 흙으로 구성된 공간에서 살아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안정을 찾고자 한다. 이 연극에서는 삶의 필수공간이자 필요공간인 <집>을 바라보며, 가치가 아닌 과정을 보여주고자 한다. 행정사무용 도장범벅의 종잇조각의 가치가 아닌 땀으로 쌓아올린 흙으로 구성된 집을 짓는 과정에 숨은 인류 지혜의 역사와 그 공간에서 삶을 지속하였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2. <집>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켜보다
대체로 드라마의 극적 긴장은 인간 갈등의 극한이나 존재 욕망의 끝 지점에서 보여 진다. 그러나 현실의 삶은 극적 순간보다 생활을 지속하기 위한 노력과 수고의 시간으로 더 많이 채워져 있다. 이 연극이 집을 바라보고 집이라는 도구의 역사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완성된 집이 가져다 주는 가치의 희열보다 그 과정이 가져다주는 집에 얽힌 사람들의 사연과 노고 속에 묻어있는 의미에 주목하며, 인간 존재의 한켠을 바라보는 것이다. 연극을 보고 나서 돌아가는 곳은 결국 집이다. 돌아간 집에서 침대에 누워 잠들기 전 당신은 집을 둘러볼 것이다. 그리고 생각할 것이다. 우리 집은 누가 만들었을까? 어떻게 만들어 졌을까?
3. <집>에서 쉴 수 있을까
결국 집은 인간이 사는 곳이다. 사는 공간을 만들어 그곳에서 쉬고 싶은 것이다. 엄마의 자궁에서 걱정 없이 보호받으며 살았던 공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천부적으로 주어졌던 엄마의 자궁이라는 임대주택에서 퇴거하고 살아가는 공간을 인간이 직접 만들어가는 과정의 이야기를 통하여 인간이 직접 만들며 살아야 하는 집이라는 공간에서 머물고 휴식하는 것이 가능할까란 질문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생명을 존속하기 위한 사람들의 노력과 그 같은 생명력의 결실체로서의 집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주어진 엄마의 자궁이라는 최초의 집에서 벗어나 스스로 보금자리를 만들어야 하는 인간. 인간은 결국 최초의 보금자리와 똑같은 집을 만들 수 있을까?
4. 전문연 창작팩토리 우수작품 제작지원 선정작
이 작품은 2009년 전국문예회관연합회에서 우수작품 제작지원을 받았다.
이전에 시도해보지 못한 <집>이라는 공간의 제작과정을 통한 주제표현으로 이목을 집중시켰으며 무대화된 집짓기의 과정은 연극표현의 가능성을 검증 받았다. 이번 공연은 더 확장된 사고를 바탕으로 새로운 표현을 통해 공연을 완성시킬 것이다.
연출의도
이 연극은 <집>을 주인공으로 하는 연극이다.
이것은 집에 얽힌 사람들의 사연과 함께 집의 구조와 재료, 집을 짓는 과정에서 나오는 문제해결방법에 대한 관심이다.
집이 현재와 같은 형태를 갖추기까지 인간들이 기울였던 환경의 적응과 이용이라는 측면을 바라보며, 눈에 보이는 것은 집이라는 외형이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은 인간들의 수고로움이며 집에 대한 진화의 역사이며 집을 구성하는 재료인 흙, 물, 바람, 햇빛들이 가진 본질과 근원의 시간임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너무나 친숙하여 무심히 보았던 집에 대하여 새로운 의미와 시선을 주는 것이다.
공연특징
1) 무대에 건축을 들여오다.
“집을 직각의 합으로 지으려던 일화가 있다. 조선시대 인정전을 지을 때의 일이다. 예로부터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하여 집을 짓는데 네모반듯함을 중히 여겼다.” -모자의 대사-
대체로 집을 바라보는 시각은 두 가지다. 하나는 튼튼한지, 디자인은 어떤지, 생활에 편한지 등 외형과 기능을
생각하는 정도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바탕으로 나타나는 집의 금전적 가치이다. 그러나 실제 집은 인류가 동굴에 살면서부터 현세대에 이르기까지 쉼 없이 고민하고 노력한 지혜의 산물이다. 그 수고의 대가로 우리는 만물의
영장으로써 금수와 다른 형태의 공간에서 살고 있다. 집은 30-40년 후 허물어지는 시멘트 덩어리가 아닌 발명과
진화의 역사를 가진 결합체인 것이다. 집의 역사성. 그 위대한 역사성을 무대 위에서 집을 직접 지어보며 보여주려
한다. 집 짓는 단순한 행위가 아닌 인간이 그 행위를 하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주고자 한다. 금수와 함께 어울려 하늘을 천정 삼았던 시대에서부터 50층의 아파트가 들어서기까지의 집이 가지는 역사성. 집의 성장을 보여주고자 한다.
2) 떠나야 하는 사람들
“안 혀, 참말로. 나는 짐 싸네. 어떻게 될지 모르는 집을 어떻게 짓냐고.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에 무슨 힘을 쓰것는가. 이런 것은 집이 아니라 괴물이여. 나는 일 못혀. -반장의 대사-
집을 짓는 것은 축제이다. 두 달에 걸친 시간 동안 인부와 집주인이 땀을 흘리고 마을사람들이 관심을 갖는다. 그
축제의 끝에는 환희가 있다. 환희의 결과물인 집은 움직이지 않는다. 항상 그곳에서 묵묵히 서있다. 지친 사람들을 끌어안고자 서있다. 가만히 움직이지 않는 집은 미련하다. 그래서 지혜로운 인간이 집을 계속 어루만져 주어야 한다. 바로 여기에 환희와 함께 회의가 공존한다. 인간은 언젠가는 떠나야 할 존재이기 때문이다. 집 수명이 다하기 전 집주인의 수명이 먼저 끝나기도 하며, 삶의 다른 이유들로 집을 떠나기도 한다. 움직이지 못하고 우직하고 미련하게 수용만 하는 집은 인간이 떠나면 의미를 상실한다. 그리고 결국 집은 허물어질 것이고 돌과 모래와 먼지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집은 계속 지어진다. 머물고자 만드는 공간에서 먼저 떠나가는 인간들.
3) 현장성
“한장가네~, 두장가네~~, 세장가네~~~, 네장가네~~~~” -거푸집을 나르며-
남의 집 짓는 과정에 어떤 재미가 있을까?
특별한 갈등과 사건이 없으니 지루하지 않을까?
공사현장의 겉모습은 삭막하고 답답하기 그지없다. 그러한 이미지는 우리로 하여금 지루하고 비생산적인 이미지로 남아있다. 가장 생산적인 공간이 가져오는 비생산적인 이미지. 아이러니한 이 상황을 궁금해 하며 현장의 내부를 살펴보면 그곳의 생동감을 느낄 수 있다. 무식한 망치가 쇳덩이를 박을 때 나는 청량한 쇳소리, 모래를 퍼는
삽과 모래 사이의 사부작거리는 마찰소리, 육중한 포크레인의 섬세한 움직임, 몸이 바쁜 인부와 입이 바쁜 감독관의 움직임, 땀 흘린 인부의 목구멍을 넘어가는 막걸리의 이동소리 등등.
이러한 요소를 무대화 시킨다면 무대는 활기를 띨 것이다. 시간에 따라 모습이 달라지는 집을 보여주고, 그것을
이뤄내는 노동을 배우들의 몸짓과 소리로 마치 춤을 추듯이 표현하여 노동에 숨어있는 리듬감과 들리지 않는
노동요를 들을 수 있게 할 것이다.
줄거리
지방의 어느 시골. 차숙이네가 옛날 집을 허물고 그 자리에 새 집을 짓고 있다. 집의 기초공사가 마무리 될 무렵 차숙이의 큰아들이 기초가 비뚤어진 것을 발견한다. 공사는 중단되고 땅을 바로잡으려는 와중에 차숙이네 삼남매는 옛날 집이 택지가 아닌 농지위에 불법으로 지은 집이었으며 돌아가신 아버지가 군청 몰래 집을 늘려 짓고 살았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이제 다시 새 집을 반듯하게 고쳐 지으려는데 셋째 딸이 이의를 제기한다. 새 집을 비뚤게 짓자는 것이다. 집에 대한 의미와 가치가 각자 다른 삼남매와 어머니 차숙이는 회의를 한다 ...
집이 이런저런 의견과 선택 속에서 점차 모양을 갖춰가는 동안 차숙이는 몸이 아파 병원에 실려 가고 집을 짓던 삼남매는 집을 계속 지어야할지 중지해야할지 망연자실해진다. 인부들은 반쯤 지어진 집을 바라보고 다음 단계의 일을 기다리고 있고 주인 잃은 집은 바람과 햇빛을 받으며 서있다 …
이제 다시 새 집을 반듯하게 고쳐 지으려는데 셋째 딸이 이의를 제기한다. 새 집을 비뚤게 짓자는 것이다. 집에 대한 의미와 가치가 각자 다른 삼남매와 어머니 차숙이는 회의를 한다 ...
집이 이런저런 의견과 선택 속에서 점차 모양을 갖춰가는 동안 차숙이는 몸이 아파 병원에 실려 가고 집을 짓던 삼남매는 집을 계속 지어야할지 중지해야할지 망연자실해진다. 인부들은 반쯤 지어진 집을 바라보고 다음 단계의 일을 기다리고 있고 주인 잃은 집은 바람과 햇빛을 받으며 서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