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설명

<해바라기의 관>은 일본 최고 권위의 문학상 아쿠다가와상을 수상한 재일교포 작가 유미리의 작품을 원작으로 한다. 모국어인 한국어를 잃어버린 재일교포 청년과 한국인 여자 유학생, 재일교포 소녀와 일본인 청년, 이 두 쌍의 남녀의 진한 삶과 죽음의 드라마를 다룬다. 재일 교포의 정체성 문제를 넘어서서 보편적인 인간이 고민하게 되는 삶의 의미를 반추할 수 있는 작품성 높은 수작이다.

유미리의 작품은 개인적 체험에서 나오는 나르시즘적 요소를 짙게 깔고 있으며, 일관되게 가족과 죽음의 문제에 집중한다. 1991년 발표된 '해바라기의 관'은 요코하마에 남은 3명의 가족을 모델로 한 와해된 가족의 일상을 조명한 자전적 작품이다. 대학 수험을 앞두고 정신적 불안을 겪는 오빠, 유년의 상처를 씻지 못하는 여동생, 밤마다 집 나간 어머니의 편지를 읽게 하는 아버지 등 등장인물들은 모두 고독한 존재로 그려져 있다. 유미리는 이들 가족간의 갈등과 소외를 상징적 장치를 통해 심도 있게 형상화 해내고 있다.

 

줄거리

고물을 주우며 생계를 꾸려가는 이씨 일가의 장남 영민은 재수생이다. 여동생 영귀는 고등학교에도 가지 않고 아버지가 사준 아키타종의 강아지 루이하고 놀기만 한다. 어머니는 3년전 가족을 버리고 자식이 딸린 일본인 샐러리맨과 함께 살기 위해 밤에 도망을 친 후 집안은 엉망진창이다. 남매는 마당에 해바라기가 가득 피어있는 집에서 어머니와 함께 온 가족이 단란하게 지내던 시절을 그리워하면 상처받은 나날을 보낸다. 영민이 민단에서 알게 된 친구가 찾아온다. 호스트클럽에서 일하고 있으며, 중년의 여성에게 받은 옷이랑 신발을 자만하는 김궁조와 아버지는 빠찡코 가게에서 기계를 관리자지만 동경대학교 의학부에 다니고 있는 갑수영. 김궁조와 갑은 영민의 여동생인 영귀을 사랑하지만 영귀는 매일 아침 루이를 데리고 공원을 산책을 할 때 스쳐 지나가는 학생복을 입은 청년을 짝사랑하고 있었다.

영민은 파티장에서 한국에서 유학을 온 소녀를 만난다. 애련함과 동시에 도발적인 듯한 묘한 빛을 띠고 있는 소녀는 일본어가 그다지 능숙하지는 못한다. 반면 영민은 한국어로는 전혀 말을 못한다. 둘은 파티가 끝나고 영민의 집 뒤편에 있는 고물을 쌓아두는 곳에서 만날 약속을 하고 헤어진다. 다음날 밤, 영민은 고물 아래에서 방울소리와 같은 귀뚜라미 소리를 들으며, 영옥에게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한다. 영민은 영옥에 조금씩 마음이 끌리게 되지만, 영옥은 한국어를 알려주는 것 이외에는 대화하지 않는다. 영민은 어느날 한국인 클럽에서 일하던 영옥이 돈을 받고 몸을 파는 장면을 목격한다. 또한, 여동생이 자신의 친구에게 겁탈당한 사실을 눈치챈다. 번민하던 영민은 자아를 상실한 채 영옥의 목을 조르고 넋을 잃은 상태에서 영옥에게 배웠던 ‘사랑해’라는 한국어를 띄엄띄엄 정확한 발음으로 중얼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