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설명

기획의도
5.16 50주년이 되는 2011년을 맞아 박정희대통령 집권 18년간의 업적을 경제개발에 초점을 맞추어 그 의미를 되새기고 오늘의 현실에 비추어 보고자 한다. 비록 민주화에 역행한 그의 쿠데타는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인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도전이었다는 부정적 측면을 도외시 할 수 없으나 아시아에서도 최빈국이었던 우리나라를 최단기간 내에 중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린 한강의 기적을 이룩해 내었다는 것은 세계사에 그 유례를 찾기 힘든 위업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동시에 한강의 기적은 흔히 말해져 오듯이 개발독재 시대에 박정희 개인의 리더쉽에 의해서만 이룩된 것이 아니라 이병철과 정주영으로 대표되는 탁월한 기업가들의 창의적 발상과 헌신적 노력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결코 이룩될 수 없었으며 여기에 우리 국민들의 근면과 열정이라는 저력이 또한 투여되었기에 가능했다.
흔히 개발독재 체제였기 때문에 경제발전이 가능했다거나 이와 반대로 민주체제였다 해도 경제발전은 가능했을 것이라는 논쟁이 가열되고 있으나 이 같은 일반론으로는 ‘기적’을 설명할 수 없다. 독재건 민주건 체제의 문제에 앞서 박정희와 이병철과 정주영 같은 특출한 개인이 존재했기에 기적은 일어날 수 있었다. 여기에 엘리트 군인과 유능한 일군의 관료와 이승만의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교육받은 근면한 국민들의 저력이 한데 모여 기적은 가능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1977년 마침내 수출 100억불과 국민소득 1천불이라는 불가능해 보였던 목표가 달성되었기에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벗어난” 우리 국민들의 민주화의 욕구가 화산처럼 분출되었으며 마침내 대한민국은 반세기도 채 안되어서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한 세계 유일의 국가로 등장하였으며 이 위업은 더구나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서 세계 최악의 유일 독재 체제인 북한의 끊임없는 안보 위협 속에서 이룩해 냈다는 점에서 더욱 그 의의가 심대하다고 하겠다.
2011년 5.16 50주년과 더불어 역시 창단 49주년을 맞은 민중극단은 지난해 6. 25 60주년을 기념하여 공연한 <6.25 전쟁과 이승만>에 이어서 왜곡된 역사관을 바로 잡으며 대한민국 현대사의 올바른 이해와 더불어 국민 대중에게 자긍심을 고취함과 동시에 건실하고 진취적인 국가관을 심어 국민통합에 기여하기 위하여 이 공연을 기획하였다. 

제작의도
올해로 창단 49주년을 맞이하는 민중극단은 지난해 창단 50주년을 맞은 극단 실험극장에 이어 국내에서 두 번째로 창단된 동인제극단으로 지난 50년간 150여편을 공연하여 국내에서 가장 활발히 활동을 해오고 있는 극단이다. <아가씨와 건달들>, <우리집 식구는 아무도 못말려> 등 대중적 흥행에 성공했던 작품들 뿐 아니라 역사와 정치, 사회 문제를 파고든 작품들도 많다. 국내 최초로 브레히트를 소개한 <서푼짜리 오페라>를 위시하여 러시아 원전 사고를 다룬 <아, 체르노빌> 등 수많은 번역극 뿐 아니라 창작극들로서도 이현화의 <카덴자>, 이근삼의 <게사니>, 김의경의 <식민지에서 온 아나키스트>, 이강백의 <칠산리>, 정진수의<아, 선각자여>와 작년에 공연된 역시 정진수의 <6.25전쟁과 이승만> 등이 대표적 예들이다.
이번 <한강의 기적> 또한 우리나라의 최근세사를 다룬 작품으로 역사적 사실에 충실한 기록극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장기간에 걸쳐 보다 많은 전국의 관객들에게 우리 역사를 바르게 알릴 수 있는 기회로 만들고자 5명이라는 최소 등장인물이 출연하는 소극장 연극으로 기획하였으며 김춘기, 이병술, 정병호 등 민중의 중진 단원들 외에 객원 출연진으로 정한용(15대 국회의원 역임), 장두이(서울예술대 교수) 등을 기용하여 정예 앙상블을 구축하였으며 기록극답게 영상 자료를 최대한 활용하여 사실감을 높이고자 하였다.

줄거리

1961년 5. 16일 새벽 일단의 무장한 군인들이 한강 다리를 건너면서 우리나라의 역사는 크게 요동치기 시작한다. 무기력한 장면 정권을 무너뜨린 박정희는 제일 먼저 부정축재 기업인들을 구속하는 일부터 시작한다. 일본에 체류 중이었던 삼성의 이병철은 전 재산을 헌납한다는 성명을 내고 자진해서 귀국하여 박정희를 만난다.

최초로 대면한 두 사람은 기업인들을 처벌하는 대신에 이들이 공장을 지어 국가에 헌납토록 하며 경제건설에 앞장서도록 하고 울산공업단지 개발 계획을 세우고 우리나라 5천년 역사상 최초로 공업 근대화의 굉음과 함성이 울려 퍼진다. 그러나 국정을 다스려본 경험이 없었던 박정희는 돌발적인 통화개혁을 시도 하는 등 시행착오를 반복하지만 특유의 집념과 헌신으로 마침내 1964년에 수출 1억불이라는 불가능해 보였던 목표를 달성하고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무려 2년이나 앞당겨 성공시킨다.

-1960년대 우리나라에는 자원도, 자본도, 기술도 경험도, 인프라도 없었다.
오직 사람이 있었다. 그 선두에 박정희와 이병철과 정주영이 있었다!

이에 고무된 박정희는 현대건설의 정주영을 끌어들여 소양댐 건설을 비롯하여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조선 사업에 나서며 이어 포항제철, 울산 석유화학 그리고 이병철의 삼성전자에 이르기까지 국가 기간산업 건설에 매진한다. 그러나 거의 똑같은 시기에 경제개발을 추진했던 북한 김일성은 참담한 실패를 거듭한 끝에 70년대에 들어서는 전 인민의 무장화, 전 국토의 요새화 등의 구호를 내걸고 절대 우위의 군사력을 앞세워 무력 남침을 통한 적화통일의 야욕을 들어내고 끊임없이 안보 위기를 조장한다. 이 같은 시기에 미국의 정책은 바뀌어 주한미군 7사단을 철수하는 등 안보 위기는 가중되며 설상가상으로 중동전쟁이 발발하여 세계적인 석유 위기마저 도래한다.

사면초가 속의 박정희와 경제관료 및 기업인들은 근면하고 숙련된 근로자들의 피땀어린 노력에 힘입어 중동 진출과 중화학공업의 개발을 통해 전대미문의 위기를 돌파하고 마침내 1977년 말에 수출 백억불과 국민소득 1천불의 시대를 열어 마침내 북한의 경제를 앞지르며 바야흐로 중진국에 진입한다. 교육받은 중산층이 대두하면서 우리나라 국민들의 의식 수준이 높아지면서 민주화의 열기는 분출하고 마침내 박정희 장기 집권 체제는 위기에 처하며 10. 26 사태로 말미암아 그의 18년 집권의 막은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