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설명
안드레이 가브릴로프 피아노 리사이틀
Andrei Gavrilov Piano Recital
‘시프라 이후 최고의 피아니스트’라는 평
전설의 러시안 피아니스트 30인으로 선정
필립스가 선정한 ‘20세기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중 한사람
‘세계 최고의 피아니스트’라는 평과 수많은 상을 수상한 안드레이 가브릴로프가 2003년 KBS교향악단 초청이후 8년 만에 한국에 온다. 한편의 드라마와 같은 삶을 살아온 그에게 무슨일이 있었을까? 명예를 회복하고 연주활동을 하고 있는 그의 명연주를 기대한다.
영화와 같은 그의 인생을 헐리웃 영화사에서 영화로 제작할 예정이다.
안드레이 가브릴로프는 1955년 모스크바의 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블라디미르 가브릴로프는 훌륭한 화가였으며, 러시아 피아니즘의 대부 겐리크 네이가우스(Heinrich Neuhaus)에게 피아노를 배운 어머니가 그의 첫 피아노 선생님이었다.
그후 모스크바 중앙 음악 학교에서 알렉산더 골덴바이저(1985-1961)의 제자였던 타티아나 케스트너(Tatiana Kestner)에게 사사했고 1973년 졸업했다. 졸업 직후 그는 모스크바 콘서바토리에 입학하였고, 나우모프(Lev Naumov)에게 사사했다.
안드레이 가브릴로프는 1974년 차이코프스키 콩쿨에서 18세의 나이로 그의 생에 첫 1등 상을 받았고, 같은 대회의 2위는 한국의 정명훈이었다. 같은 해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스티아토슬라프 리히터(Sviatoslav Richter)를 대신해 초대되며 의기양양하게 국제 데뷔 무대를 마쳤다. 이후 세계적으로 유명한 오케스트라들과 함께 공연하며 국제적인 경력을 쌓았다.
그를 한동안 공연장에서 만날 수 없었다.
1979년 12월6일 베를린 필하모니 홀에서 지휘자 카라얀과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러시아로부터 날아올 피아니스트를 가다리고 있었다. 그날 밤 연주와 이어질 녹음을 앞두고 피아니스트를 기다리던 카라얀과 베를린 필하모닉은 무려 4시간이나 그를 기다리다 결국 그날 연주를 취소했다. 피아니스트 이름은 23세 안드레이 가브릴로프였다.
옛 소련 당국은 연주차 출국을 앞둔 가브릴로프의 여권을 압수하고 전화를 끊었다. 가브릴로프가 예전 외국연주 때 언론을 통해 소련 당국을 여러 차례 비판하였던 것이 화근이었다. 그로부터 5년간 가브릴로프는 외부와 격리되었다. 정신적인 고통을 감내하던 그는 84년 고르바초프에게 서방 여행을 허가해줄 것을 편지로 요청했다. 고르바초프가 이를 수용하였고, 가브릴로프는 그해 런던에서 연주하고 녹음 할 수 있었다. 85년 런던을 다시 찾은 그는 고르바초프에게 서방체류를 요청하며, 그해 뉴욕 카네기홀에서 성공적으로 데뷔했다. 여러 오케스트라와 협연하고 독주 무대를 누비며 이름을 얻은 그는 89년 독일에 정착했다.
1990년 10월, 가브릴로프는 독일 그라모폰과 독점 계약을 맺었고, 쇼팽, 프로코피에프, 슈베르트, 바흐, 그리그 등을 잇달아 발표해 찬사를 받았다.
1994년부터 2001년까지 가브릴로프는 7년간의 휴식을 가졌고, 공개된 공연은 거의 가지지 않았다. 그는 철학과 종교에 대해 공부했고, 음악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과 아이디어를 탐구했다.
16년 만에 조국 러시아에 돌아와 연주를 하다.
2001년, 16년만에 의기양양하게 러시아에 돌아온 가브릴로프는 어느 날 저녁 모스크바 콘서바토리와 함께 4개의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했다. 그 이후로 변함없이 큰 성공을 거두며 세계 각지를 돌며 연주하고 있다. 2008년에는 미국에서 공연하였고, 2009년에는 4개월간의 러시아 투어를 포함한 세계 투어를 가졌다. 2010년 2월 그는 비엔나 필하모닉 골든 홀에 초대되어 14년의 공백을 깨고 4개의 협주곡을 연속으로 연주했다. 이 공연이 끝나고 비평가들로부터 수많은 찬사가 쏟아졌다.
안드레이 가브릴로프는 1993년 바흐, 쇼팽, 리스트, 슈만 등의 CD와 DVD를 작업한 이후, 또 다른 음반을 준비하고 있다.
Andrei Gavrilov Piano Recital
‘시프라 이후 최고의 피아니스트’라는 평
전설의 러시안 피아니스트 30인으로 선정
필립스가 선정한 ‘20세기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중 한사람
‘세계 최고의 피아니스트’라는 평과 수많은 상을 수상한 안드레이 가브릴로프가 2003년 KBS교향악단 초청이후 8년 만에 한국에 온다. 한편의 드라마와 같은 삶을 살아온 그에게 무슨일이 있었을까? 명예를 회복하고 연주활동을 하고 있는 그의 명연주를 기대한다.
영화와 같은 그의 인생을 헐리웃 영화사에서 영화로 제작할 예정이다.
안드레이 가브릴로프는 1955년 모스크바의 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블라디미르 가브릴로프는 훌륭한 화가였으며, 러시아 피아니즘의 대부 겐리크 네이가우스(Heinrich Neuhaus)에게 피아노를 배운 어머니가 그의 첫 피아노 선생님이었다.
그후 모스크바 중앙 음악 학교에서 알렉산더 골덴바이저(1985-1961)의 제자였던 타티아나 케스트너(Tatiana Kestner)에게 사사했고 1973년 졸업했다. 졸업 직후 그는 모스크바 콘서바토리에 입학하였고, 나우모프(Lev Naumov)에게 사사했다.
안드레이 가브릴로프는 1974년 차이코프스키 콩쿨에서 18세의 나이로 그의 생에 첫 1등 상을 받았고, 같은 대회의 2위는 한국의 정명훈이었다. 같은 해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스티아토슬라프 리히터(Sviatoslav Richter)를 대신해 초대되며 의기양양하게 국제 데뷔 무대를 마쳤다. 이후 세계적으로 유명한 오케스트라들과 함께 공연하며 국제적인 경력을 쌓았다.
그를 한동안 공연장에서 만날 수 없었다.
1979년 12월6일 베를린 필하모니 홀에서 지휘자 카라얀과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러시아로부터 날아올 피아니스트를 가다리고 있었다. 그날 밤 연주와 이어질 녹음을 앞두고 피아니스트를 기다리던 카라얀과 베를린 필하모닉은 무려 4시간이나 그를 기다리다 결국 그날 연주를 취소했다. 피아니스트 이름은 23세 안드레이 가브릴로프였다.
옛 소련 당국은 연주차 출국을 앞둔 가브릴로프의 여권을 압수하고 전화를 끊었다. 가브릴로프가 예전 외국연주 때 언론을 통해 소련 당국을 여러 차례 비판하였던 것이 화근이었다. 그로부터 5년간 가브릴로프는 외부와 격리되었다. 정신적인 고통을 감내하던 그는 84년 고르바초프에게 서방 여행을 허가해줄 것을 편지로 요청했다. 고르바초프가 이를 수용하였고, 가브릴로프는 그해 런던에서 연주하고 녹음 할 수 있었다. 85년 런던을 다시 찾은 그는 고르바초프에게 서방체류를 요청하며, 그해 뉴욕 카네기홀에서 성공적으로 데뷔했다. 여러 오케스트라와 협연하고 독주 무대를 누비며 이름을 얻은 그는 89년 독일에 정착했다.
1990년 10월, 가브릴로프는 독일 그라모폰과 독점 계약을 맺었고, 쇼팽, 프로코피에프, 슈베르트, 바흐, 그리그 등을 잇달아 발표해 찬사를 받았다.
1994년부터 2001년까지 가브릴로프는 7년간의 휴식을 가졌고, 공개된 공연은 거의 가지지 않았다. 그는 철학과 종교에 대해 공부했고, 음악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과 아이디어를 탐구했다.
16년 만에 조국 러시아에 돌아와 연주를 하다.
2001년, 16년만에 의기양양하게 러시아에 돌아온 가브릴로프는 어느 날 저녁 모스크바 콘서바토리와 함께 4개의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했다. 그 이후로 변함없이 큰 성공을 거두며 세계 각지를 돌며 연주하고 있다. 2008년에는 미국에서 공연하였고, 2009년에는 4개월간의 러시아 투어를 포함한 세계 투어를 가졌다. 2010년 2월 그는 비엔나 필하모닉 골든 홀에 초대되어 14년의 공백을 깨고 4개의 협주곡을 연속으로 연주했다. 이 공연이 끝나고 비평가들로부터 수많은 찬사가 쏟아졌다.
안드레이 가브릴로프는 1993년 바흐, 쇼팽, 리스트, 슈만 등의 CD와 DVD를 작업한 이후, 또 다른 음반을 준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