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설명

외설(obscenity)이란 노골적인 언행이나 상스러운 성적 묘사를 두고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외설이란 미(美)와 마찬가지로 그 기준 역시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외설에 대한 만족할 만한 정의를 내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외설에 대한 사회적인 기준마저 없는 것은 아니다. 음란의 개념을 “그 내용이 성욕을 자극 또는 흥분시키는 것으로서 보통사람의 성적 수치심을 해하고 선량한 도덕관념에 반하는 것”으로 규정한 대법원의 판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동안 수많은 간행물이나 무대 혹은 영상예술 분야에서의 외설시비가 일 때마다 그와 같은 법의 잣대로 판가름 하고 또 제재를 가해왔다. 사회적 건전성을 본존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말이다.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기본 권리다. 그러나 예술적 형태를 띤 표현(빙자)으로 인해 사회적으로 잘 못된 풍토나 관습을 조성하고 법질서마저 문란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표현의 자유가 아니라 방종이요, 반사회적인 정신적 테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외설의 기준 또한 그런 덕목을 바탕으로 구분하자는 것도 2011 쟁점 “외설”의 기본 포맷이다.
작금의 대학로 연극에서는 이른바 노출연극 혹은 알몸연극이라고 하는 장르도 불분명한 연극행태들이 속속 무대화 되고 있다. 물론 그것들이 외설이냐 아니냐는 보는 사람의 판단에 달려 있고 또 그런 작품들이 나쁘다거나 혹은 좋다거나 하는 이분 적 논리를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다만 연극이 지닌 보편적 가치성이 무시되고 연극문화의 사회적 순기능이 왜 시시때때로 역기능적인 행태로 나타나는 걸까? 하는 의문이 2011 쟁점 “외설”의 근간이 되었고 또 연극을 만드는 우리 자신과 관객들에게 그에 대한 질문을 던져보고 싶음이 2011 쟁점 “외설”의 탄생 이유이기도 하다.

줄거리

서민경제의 불황에 따라 대학로 연극문화사업 또한 침체일로를 맞고 있는 2011년 현재. 중견 연극인 응삼은 몇 번의 연극제작 실패로 인해 빚쟁이에 쫓기는 신세가 되고 급기야는 가족마저 해체될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이는데.. 어느 날 우연히 알몸연극이 대박을 내고 있다는 신문기사를 보곤 응삼은 적지 않은 충격을 받는다. 알몸연극은 저급한 퇴폐문화요 외설이라고 단정 지으며 혐오해오던 응삼이었기에 그런 저속한 연극이 사람들의 각광을 받는다는 사실 자체가 응삼에겐 경악할 일이기 때문이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감에 번뇌하는 응삼.. 이윽고 응삼은 단호한 결심 하에 자신의 진로를 새로이 결정하게 된다. 기존의 알몸연극 보다 더 자극적인 알몸연극 만들기에 나서게 된 것이다. 그리고 20대 초반의 얼짱에다 착한 몸매의 여배우들을 섭외하던 응삼은 뜻밖의 상황에서 아내 지연에게 들키며 극은 새로운 갈등 국면에 접어든다. 여배우의 옷을 벗기던 호모, 게이들의 적나라한 얘기를 까발리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만 왕창 벌겠다는 응삼의 왜곡된 인간변절에 응삼, 본래의 순수성을 되찾으려는 아내 지연의 고군분투는끝내 외설스러움을 넘어서는 섬뜩하고 경악할 사건을 낳게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