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설명

변방인 장영실은 왜 역사 속에서 실종되었는가?

<궁리>는 조선시대 최고의 과학자 장영실의‘역사적 실종’을 다룬다.
천문학자 이순지 김담 등과 함께 찬란한 조선시대 과학문명-세종 르네상스를 이룬 장영실. 그가 만든 수많은 과학기구, 활자, 악기는 지금도 여전히 자랑스런 민족의 영원한 발명품으로 남았고, 부산에는 그의 이름을 딴 장영실 과학고도 있다.

장영실은 세종, 이순신과 함께 지금도 학생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역사적 위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장영실에 대해 잘 모른다. 특히 인간 장영실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다. 장영실의 출생과 성장, 가족사에 대해서는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장영실이 남긴 발명품만 장영실이란 이름과 함께 남았다.

실제했던 인간 장영실은 어떤 인간이었으며 어떻게 역사 속에서 사라졌는가?
<궁리>는 관노비 출생 장영실의 역사적 실종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서 21세기 지금 이곳의 시점에서 인간 장영실을 복원시킨다.

<궁리>는 장영실의 역사적 실종을 당시 조선을 둘러싼 동북아 국제 정세 속에서 파악한다. 중국을 등에 업은 인문학자들의 사대주의와 민중을 포함한 다양한 전문가들로 구성된 세종 중심 자주세력의 첨예한 대립 속에서 장영실을 희생자의 의미로 해석해 내는 것이다.

장영실은 개국공신이나 양반 출신이 아닌 관노비 출생이었고, 서울 도성 사람이 아닌 부산이란 지역민이었고, 게다가 고려말 원나라 이주민 출신이란 점에서 철저한 변방인이었다. 변방인이었기에 정치적 희생양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장영실의 존재는 지금도 여전히 서울 중심 재벌 중심 학벌 중심사회 구조를 지닌 한국사회에서 상대적으로 불평등구조에 놓인 지역적 차별성을 상징적으로 대변한다. 장영실 스토리 텔링이 지난 역사 이야기 구조가 아닌, 지금 이곳 우리의 삶의 상징으로 제시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장영실은 1442년 세종 24년 임금이 타고갈 수레를 잘 못 만들어 태형 80대를 맞고 쫓겨났다는 마지막 기록(조선왕조실록)을 남기고 역사 속에서 사라져 버린다.

당시 장영실과 함께 했던 인물들은 그 후 여전히 역사적 기록을 남기고 가문을 이어갔다. 그러나 유독 장영실만 완전히 역사 속에서 삭제되었다. 그는 어디서 죽었고 그의 후손은 누구인지도 모른다. 당대 최고의 천재 과학자이자 당시 대호군이란 종 3품 벼슬을 지닌 고급관리에게 어떻게 임금이 타고 갈 수레(연)를 만들게 했는지, 하필 그 수레가 왜 부서졌는지, 수레 제작에 관여한 책임자는 처벌 받지 않고 풀려났는데, 왜 장영실은 태형 80도를 맞고 쫓겨 났는지 이해할 수 없는 역사적 미스터리가 존재한다.

<궁리>는 바로 이 의문투성이의 장영실 실종사건을 지금 시점으로 재구성하면서 진정한 지역 자치, 그리고 21세기 다인종 다문화 시대를 열어 나가는 상징적 사건으로 제시하는 셈이다.

줄거리

“대호군 장영실이 안여(安輿: 임금이 타는 가마) 만드는 것을 감독하였는데, 튼튼하지 못하여 부러지고 허물어졌으므로 의금부에 내려 국문하게 하였다.” ([세종실록] 1442년 3월 16일)

“주군이여 왜 내게 안여를 만들라고 하셨습니까?”

세종은 장영실에게 ‘안여’(수레)를 만들라고 명한다. 그러나 세종이 타고 가던 안여는 바퀴가 빠지며, 임금은 수레와 함께 땅 바닥에 처박히는 사고가 일어나고 만다. <궁리>는 여기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안여가 부서지는 사건을 계기로 장영실은 주군 세종을 음해한다는 오해를 받는다. 작품은 안여 사건을 중심으로 세종과 장영실. 그리고 그들은 둘러싼 주변 권력의 관계를 보여준다. 세종의 이상을 현실로 만들어준 장영실은 앞서가는 지식이자, 조선의 새로운 인물상이었다. 그러나 그의 운명은 견고한 계급과 권력 앞에서 인생 최고의 친우이자, 이상을 같아 나누었던 세종과의 관계는 파괴를 가져오기 시작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