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설명

기획의도
연극 ‘이 여자 주먹 쥔다’는 여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사랑과 동정, 이해와 헌신, 희생을 강요 받아온 여자들이 더 이상 상처를 용납하지 않고
남자보다 더 강한 존재로 거듭나기 위한 몸부림의 이야기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금녀의 구역이 많았습니다.
이를테면 희랍의 고대 올림픽에서 여자는 출전은 커녕 구경도 못하게 했습니다.
여자가 올림픽에 처음 참가한 것은 겨우 100년 전인 제2회 파리 올림픽 때 테니스와 골프경기였던 것을 보면 그 역사가 깊습니다.
교회의 성가(聖歌)도 여성 금제구역이었다고 합니다.
고음(高音)은 소년 소프라노나 거세(去勢) 소프라노의 몫이었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각종 제사를 지내는 성스러운 공간이나 시간에는 여자의 개입이 금지되었습니다.  제주(祭主)는 제사 한달 전부터 목욕재계, 아내와 각방을 쓰고 딸·며느리들도 살성(殺聲)이라 하여 소리를 죽여 허스키 보이스로 대화함으로써 ‘여기(女氣)’, ‘여색(女色)’으로부터 제주의 성(聖) 공간을 보장해야 했습니다.
떡이나 술을 빚고 제수를 장만하는 여인들도 입을 창호지로 봉하고 작업을 하게 했습니다.
이는 차별을 넘어선 가혹한 구박이 아닐까요.
사당이나 서원 등 위패가 모셔져 있는 공간은 여성 금지구역이었습니다.
이 같은 남성중심 세계에서 여성은 수없이 상처 받아왔습니다.
하지만 이제 여성은 변화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이 상처들의 원인을 규명하고 이에 항거하며 때로는 남자보다 더욱 마초 같은 기질을 발휘하여 남자들의 위에 올라서고 있습니다.

연극 ‘이 여자 주먹 쥔다’는
단순히 남자들이 예쁜 여자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섹시한, 아름다운 여자가 각광받는 이 세계를 향한 여자들의 반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작품특징
그로테스크 리얼리즘(Grotesque Realism)
“조직화된 사회 속에서 말살되고 소외된 삶, 여자의 현실을 그로테스크하게 표현”
그로테스크는 빅토르 위고가 자신의 희곡 <크롬웰>의 서문에서 그것을 새 시대의 예술적 방법론으로 내세우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예술사의 전면에 등장했다고 평가된다. 위고는 세계는 모순되는 것들의 결합으로 이루어졌는데, 그것을 올곧게 드러내지 않고 아름다운 것만, 혹은 천한 것만 드러내는 것은 예술의 올바른 방법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선한 것과 악한 것을 결합하고, 우스꽝스러운 것과 고귀한 것을 결합하는 그로테스크가 진정한 예술의 방법론으로 대두되어야 한다고 기록했다.
“무대는 현실을 반영하거나 재현하는 공간이 아니다.”
‘이 여자 주먹 쥔다’의 무대는 단순하다. 인물들도 단순하다. 그들이 처한 상황과 현실도 단순하다. 그러나 그들의 만남과 갈등 구조를 비틀고 모순된 감정과 의식의 교접들을 통해 ‘이 여자 주먹 쥔다’는 그녀들의 삶과 그 리얼리티가 얼마나 그로테스크한 현실로 드러나는지 보여준다. 이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을 통해 우리 사회의 모순된 모습과 폭력성을 은유적으로 드러내 보이고 있다.

줄거리

대교 아래 한강 둔치 어딘가.
도박 빚과 바람이 나 집을 나간 남편을 찾아 떠도는 여인, 김난영.
그녀 앞에 나타난 서너 명의 여자들. 난영의 주변을 에워싸며 수다를 떨다 흩어지면,
난영이 피를 흘리며 쓰러진다.
살겠다고 기어서 다리 아래로 가면, 그곳에는 이미 똑같은 해코지를 당한 경숙과 희정이가 머물러 있다. 경숙은 남자들과 남자들에 기생해 사는 여자들을 가리지 않고 모두 해치우겠다는 계획을 꿈꾸며 난영의 상처를 치료해준다.
경숙은 협박 반, 달래기 반으로 난영을 자신의 계획에 동참시키고, 새로운 먹이감을 찾는다.
그러던 중 여고생을 만나 살해하려는 이경숙.
이를 보고 난영은 남자에게 버림 받고 그 상처 때문에 남자들의 흉내를 내며 폭력을 휘두르는 것이라 탓을 하지만, 경숙은 사랑과 동정, 희생을 강요 당해왔으므로, 이제 내 천성을 있는 그대로 표출하겠다 맞선다.
난영을 물리치고 여고생, 박은경을 해치려는데, 여고생은 자신 역시 아버지를 미워한다며, 남자들을 저주한다며, 자신을 죽이기 보다는 아직까지 사랑과 연정으로 가득한 저 여자, 난영을 죽이는 것이 어떻겠느냐 제안을 한다. 경숙은 그 말에 동의, 여자다운 여자를 멸종시키겠다며 난영을 향해 칼을 휘두르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