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설명

제주도를 떠나 서울에서 지내던 나는 음력 섣달 열여드레인 할아버지의 제사에 참석하기 위해 8년 만에 고향인 제주 서촌마을을 방문한다. 거기서 나는 순이 삼촌(제주에서는 촌수 따지기 어려운 먼 친척들을 남녀 구분 없이 삼촌이라 부른다) 이 생을 마감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30여년 전의 참혹한 사건을 떠올리게 된다. 순이 삼촌은 작년 한해 서울의 우리집에 와서 식모 노릇을 하던 분이다. 그녀는 아내와 잦은 말다툼을 하게 되어 제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그녀를 데리러 온 사위 장씨로부터 순이 삼촌에게 환청증세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순이 삼촌은 몇 년전에 이웃집에서 메주콩을 잃어버린 일로 시비가 벌어진 적이 있는데, 그때 이웃사람이 경찰서로 가자고 말하자 아무 말도 못하고 주저 앉아버리는 바람에 범인으로 오해 받으면서 환청이 시작되었다고 전해진다. 순이 삼촌의 파출소 기피증은 30여년 전의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30여년 전 그해 음력 12월 19일 국군에 의해 학교 운동장에 소집된 마을사람들은 자세한 영문도 모른 채 무참하게 참살 당했다. 군경 측의 무리한 작전과 이념에 대한 맹신이 빚어낸 비극적 사건이었다. 그 학살현장에서 두 아이를 잃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순이 삼촌은 그 후 경찰에 대한 심한 기피증이 생겼고, 메주콩사건으로 결벽증까지 생겼으며, 나중에는 환청증세도 겹치게 된 것이다. 평생 그날의 사건으로 인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순이삼촌은 자식이 둘이나 묻힌 그 옴팡 밭에서 사람의 뼈와 탄피 등을 골라내며 30년을 과부로 살아오다가 그날의 일을 환청으로 듣게 되고, 마침내 그 살육의 현장에서 꿩약을 먹고 자살을 하게 된다. 나는 마을 사람들이 30년이 지나고도 그 일을 고발하지 못하는 것은 심한 레드 콤플렉스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한 달전에 자살한 순이 삼촌의 삶은 이미 30여년 시간 속에서 정지해버린 유에된 죽음이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