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설명

<작가의 기획의도>
이 작품은 이인극으로 위장한 삼인극이다. 이영서가 머무는 좁은 원룸은 자궁을 상징한다. 관객들이 ‘아이의 눈’으로 이 작품을 봤으면 좋겠다. 좋건 싫건 아이는 부모가 가진 조건을 물려받아야 한다. 세상에 어떻게든 적응해야 한다. 누구보다 아이가 제일 불안하다. 단지 말하지 못할 뿐이다. 대사 한 마디도 없는 중요등장인물이다. 의상은 등장한다. 붉은 스웨터. 이 옷은 아이의 메타포다. 이영서가 붉은 스웨터를 건네주고, 남병주가 그걸 던지는 행위는 아이를 주고 받는 행동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아이는 말 그대로 ‘물건’이 된다.
아이를 낳는 것은 이 세상이 살아갈 만한, 대물려 줘도 좋은 세상이냐고 묻는 것이다. 아이의 눈으로 보면, 둘의 다툼은 허망하다. 그들은 자신의 문제에 매달려, 아이를 보지 못한다. 보지 못하는 아이. 아이를 보지 못하는 엄마, 보지 않으려는 엄마.
제3의 등장인물은 무대에 끝까지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아이는 불안해하며 자신의 등장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다. 우리들이 있는 풍경 속으로 한 낯선 존재가 등장한다. 우리와 닮은, 그러나 닮지 않길 바라는. 병마용에서 끌려나온 진흙인형은 해가 뜨자, 빛이 바랬다. 아이였던 우리들은 뭐로 변했을까. 70분 후, 해가 뜬다. 그 아이가 처음으로 볼 풍경이 궁금하다.

줄거리

두 짐승이 다툰다.
임신으로 인간은 ‘생물’로 환원된다. 새끼를 가진 암컷이 된다. 개체인 ‘나’ 이외의 것으로 탈바꿈한다. ‘나’는 불가피하게 ‘남’과 관계 맺게 된다. 더 나아가 인간과 맺어진다. 컨베이어 벨트에 실려 유전자를 전달하는 도구가 된다. 나에서 ‘인간’이란 생물로 ‘인류’로. 결혼과 출산은 ‘남’과 사는 문제다. 나를 얼마만큼 타인에게 내줄 수 있는가? 개체에서 공동체로 들어가는 문턱이다.
처지와 계층, 세대가 다른 두 여자가 ‘아이’란 공통분모로 만났다. 둘 다 출산을 앞뒀다. 둘 다 불안하다. 한 짐승은 아이를 무기로 내걸고, 다른 짐승은 가면을 벗는다. 어둠 속에서 으르렁거린다. 해뜨기 70분 전, 세상은 가장 어둡다, 허나 핏빛 해가 지평선 너머로 떠오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