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설명

엄마젖 하얀 밥

1. 노인의 욕심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타이틀을 정면으로 뒤집어 패러디한 작품. 노년인구가 점점 늘어가는 한국. 건강하게 장수하고픈 욕구는 날이 갈수록 강렬해지고, 어느 듯 건강이 신의 자리를 꿰차고 있다. 가진 기득권을, 건강을 위해서라면 가차 없이 행사할 준비가 됐다. 젊은 사람들이 설 공간은 너무나 비좁고, 이것이 곧 미래의 반복되는 역사가 될 것이라 본다면 너무 비관적일까. 견고해지기만 하는 이 시들어빠진 기득권의 폭력, 틀니의 횡포에 어떻게 맞서야 하나? ‘노인만을 위한 나라’에서. 이 작품은 이와 같은 주제의식을 섬의 우화로 만들어 전시한다. 생산성 있는 젊은이들의 근육을 강탈하고, 강탈의 결과로 장수의 약술을 빚는가 하면, 에미의 젖을 아기대신 빨아버리는 유아기적 적극성, 그리고 이런 것들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정치적 전략을 짜는데 노인들은 바쁘다. 죽을 시간도 없다. 전략적 억지를 부리는데 혼신의 힘을 경주한다, 마치 ‘억지’가 예술일 수 있음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표피적으로 이 작품은 이런 질문을 던진다. 굳이 억지는 왜 부릴까? 왜 힘겹게 나름의 정당성을 가지려 하는가? 젊은이들한테 미안함을 가질 정도의 도덕성과 인간미는 있기에? 이들에 놀아나는 젊은이들은 그저 ‘필론의 돼지들’에 지나지 않는가? 그러니까 이 작품은 늙음과 젊음의 역학구도와 상호충돌과 대항정신을 외친다기보다는 ‘섬의 우화’를 통해 욕심의 사유화가 잉태한 인간 정신적, 인간 본성적 피폐함을 형식화한다.

2. “먹는 게 중요하다.”
고골의 <검찰관>이 펼치는 모든 희극적 상황은 ‘먹어야 산다’는 본능적 생체질서와 절실함에서 비롯된다. 아마도 먹게 된다면 상황은 종료될 것이다. 그러니까 <검찰관>은 먹기 투쟁과 상황종료 그 사이 간극에서 생성되는 해프닝을 희극적으로 다룬 작품이다. <엄마젖, 하얀 밥> 또한 먹기의 절실함을 다루고, 즉 ‘먹어야 건강하고 그래야 장수하고’, 또 역시 투쟁과 종료, 그 간극에 시선을 두긴 한다. 그러나 여기서의 이 굶주린 늑대들은 단지 늙음을 버텨내기 위한 본성에 의존하는 게 아니라, 단지 생체질서유지에만 허덕이는 게 아니라, 체제유지라는 사회적 욕심이 보다 크게 자리 잡고 있고, 섹스는 그 미끼로 던져져 있어서, 따라서 간극자체라기보다는, 먹어도먹어도 끝없이 먹어야하고, 죽고 나서조차 식탐을 어찌할 줄 모르는 존재들을 의도적으로 설정하고는, 그 존재들의 식탐의 패턴과 형식, 그것을 지배하는 황당존재론에 질문을 던진다.


연출의 글

을에 대한 갑의 횡포가 극에 달한 시점이 요즈음이 아닌가 싶다. 모두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맹렬하게 지켜보건만,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권력을 가진 자들의 시선은 이를 아랑곳하지 않는다. 기껏 ‘을을 위한다’는 요란한 언어놀이가 있을 뿐, 실상은 을을 짓밟기 일쑤다. 우리 사회의 집단이기주의와 그들의 폭력적 권력은 이미 도를 넘었다. 갑의 횡포에 나가떨어지고 갈가리 찢어지는 을이야 오죽할까만, 한 발 떨어져서 보면 맘껏 휘두르는 갑의 폭력이란 것이 유치하기 짝이 없고, 비열하고, 엉성하고, 짜깁기식이고, 우둔하고…차라리 우습다. 우스워서 무섭다. ‘엄마 젖, 하얀 밥’은 우리 사회 전반으로 퍼진, 이 우스워서 무서운 갑의 권위적 횡포, 횡포적 권력의 ‘속살’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 속살은 바로 이 세상을 나뒹구는 온갖 종류의 갑의 횡포들이 공유하는 그 어떤 의식에 다름 아니다.
공연은 바로 이 유치하고, 비열하고, 엉성하고, 짜깁기식이고, 우둔한, 그래서 우습고, 너무 우스워서 무서운 인상과 이미지를 남기는 텍스트의 전략적 패턴을 그대로 연극적, 공연적 전략으로 대치한다. 우리는 이래저래 짜깁기한 공연형식으로 관객을 공략할 것이고, 관객은 난무하는 형식의 카오스에 피해를 입을 것이다. 그리고 이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사회 을의 아픔과 갑의 폭력적 음모를 알리는 하나의 비유가 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