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설명
하나, ‘문화게릴라’ 이윤택과 ‘감성과 개성의 공존’ 채윤일의 만남
새로운 문제작의 탄생
삶과 죽음의 한판 굿판을 세련된 무대언어로 다듬은 1989년 <오구-죽음의 형식>, 강간사건을 통해 남성중심적 사회 속 여성문제를 바라본 1990년 <혀>, 그리고 권력의 부도덕과 허망함을 시적 무대로 표현한 1993년 <불의 가면-권력의 형식>에 이르기까지.
문화, 사회, 정치, 경제 등에 대한 두 사람의 해박한 해석과 시대를 앞서가는 충격적인 표현 양식은 작품성에 대한 신뢰와 인정을 더불어 사회적 이슈를 일으키고 무수한 논란을 제시했다. 작가로서의 이윤택과 연출가로서의 채윤일, 두 사람의 만남은 문화계는 물론 사회 전반에 걸쳐 언제나 화제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들이 손을 잡고 새로운 모습으로 세상에 내놓는 <정말, 부조리하군>은 작품이 담고 있는 현실적이면서도 정치적인 주제와 그것을 표현한 파격적인 무대언어로 이전 작품들 못지않게 또 한 편의 문제작으로 기록될 것이다.
둘, 연극의 사회성 재고, ‘정치극’의 부활
예술가의 시대적 소명을 실천한 가장 차별화된 무대
연극은 사회성을 가지고 그 성격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정치극이다. 국가가 창궐한 곳 어디든 국민들을 대변하여 그들의 목소리가 되어 주었던 것이 연극이며 그것은 정치극(政治劇)이라는 형식으로 개발되었다. 우리나라 역시 군사정권 시대에는 국민들의 자유와 민주와 인권을 위한 정치극들이 만발했으나 민주주의 사회가 도래한 이후 종적을 감췄다.
근래 한국연극은 개인사적인 일상과 언어유희와 소비주의적인 모습으로 변해갔다. 정치극의 부재(不在)는 곧 예술인들의 소멸, 동시에 예술성의 부재(不在)를 의미한다. 예술인으로서의 연극인들이 정치극의 부활을 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현 정권에 대한 따끔한 일침과 국민의 정서를 대변할 수 있는 정치극을 무대에 올리는 것이야말로 한국 연극인들의 시대적 소명이라 할 수 있다.
<정말, 부조리하군>은 연극의 사회성과 정치성의 부활이 절실함을 인식한 작가와 연출가가 함께 만든 무대이다. 때문에 근래 어떤 공연과도 차별되는 치열한 연극정신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뚜렷한 주제의식이 살아 꿈틀대는 역동적이고 뜨거운 무대, 그것이 이번 작품을 주목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
셋, 정권에 대한 촌철살인적 풍자
중도통합과 프로파갠더 사이, 균형의 미학
<정말, 부조리하군>은 문제적 작가 뒤렌마트의 <로물루스 대제>를 원형에 두고 있다.
패러독스를 기본 정신으로 정치와 사회문제에 대한 통렬한 풍자, 적나라한 진실의 폭로 등 <로물루스 대제>는 정치극에 대한 갈망을 해소해주는데 매우 적절한 그릇이 된다. 또한 ‘국가의 멸망을 눈앞에 두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통치자’의 묘사는 다른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국가 정세와 묘하게 닮아 있다.
그러나 <정말, 부조리하군>은 작가 이윤택의 촌철살인적 풍자와 채윤일의 문학성 넘치는 무대 해석의 조화로 작품의 정치성에 앞서 연극이라는 예술 그 자체로 바라보도록 한다. 그리고 중도통합의 미온적 자세나 파당적 프로파갠더의 선동적 자세 사이에서의 균형을 잡아, 현 정치계와 통치자에 대한 옹호와 비난에 대한 해석과 판단은 관객의 몫으로 남겨둔다. 이는 일방적인 강요나 종용이 아닌 작품에 대한 열린 해석의 여지를 전달하여 오랜만에 관객과 평단, 여론간의 풍부한 논쟁의 장이 되고자 하는 의지라 할 수 있다.
넷, 은유와 상징으로 점철된 독보적인 캐릭터
‘김소희’의 연기지도, 촉망 받는 배우들의 현란한 연기
‘황제 역을 연기하는 작가, 키 작은 사내, 서기 476년 서로마에서 온 기병대장 스푸리우스 티투스 맘마, 황제의 부인 율려, 황제의 딸 보아, 에드리안, 혹은 윤군, 골동품상인 아폴리온, 사업가 케자르 루프, 비서실장, 국방장관, 흉상, 요리사’
연극에 등장하는 현란한 캐릭터들의 향연은 <정말, 부조리하군>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그리고 쉴새 없이 실소와 폭소를 터뜨리게 한다.
이처럼 현란한 캐릭터를 창조하는 것은 배우들의 몫. 현 한국 연극계의 독보적인 여배우이자 연희단 거리패의 새로운 대표 김소희가 연기지도를 맡고 주목할만한 배우 오동식을 필두로 연희단 거리패의 촉망 받는 배우들이 출연, 독보적인 캐릭터들을 창의적으로 완성시켰다.
국가 정세와 국제 정세, 인류가 지구에 살게 된 이래 계속되는 역사의 소용돌이에 대한 해박함을 지닌 인물들의 상징과 은유는 유쾌한 풍자의 최고치를 경험하게 만들 것이다.
줄거리
꿈 속에서 그 어딘가의 통치자가 된 작가. 나라가 멸망하고 있음을 알리기 위해 ‘서기 476년 3월 서로마의 기병대장’이 그의 꿈 속에 도착하는 동시에, 재무장관은 국고를 가지고 해외로 도망가고, 국방장관은 전쟁이 났다고 난리법석이고, 비서실장은 전부 다 죽게 됐다고 우는 소리만 계속한다. 모두가 아우성치는 상황에서 그는, ‘나라의 멸망’을 선택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