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설명

예술은 혹은 예술‘만’은 권력과 위계질서 안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지금은 예술조차 기업 혹은 물질, 그리고 파벌의 장 안에서 건강하게 작동해야 함을 논하는 시대이다. 문제는, 예술의 건강한 작동이 아니라 예술의 종속화에 대해 함구하면서 예술의 건강한 작동을 정당화하는 논리이다.

연극 <곡비>는 한국 사회 내의 상하 관계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예술씬 내에서의 도제 시스템 및 답습에 대한 이야기이다. 남을 위해 울어주는 것이 직업(곡비)인 자와 남을 위해 웃어주는 것이 직업(소비)인 자. 그리고 곡비 씬에서 거장으로 통하는 위대한 곡비. 곡비가 자신의 사수인 위대한 곡비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에 사로잡히게 되면서, 남을 위해 울어준다는 것의 본질을 놓치게 되는 과정이 질문의 형식으로 노출된다. 예술이 권력 혹은 위계의 망에 걸리게 되면서 애초 그 본질을 잃어버리게 되는 과정. 이는 권력을 가진 자에 대한 비판인 동시에 권력과 위계질서를 내재화하는 젊은 세대에 대한 비판인 동시에 현 시대 속에서 예술의 자유가 가능한지에 대한 질문이다.

줄거리

남을 위해 울어주는 것이 직업인 사람, 곡비. 남을 위해 웃어주는 것이 직업인 사람, 소비. 곡비와 소비는 긴 세월 연인으로 지내왔다. 위대한 곡비 그리고 위대한 소비를 꿈꾸며 매일 아침 울기와 웃기 훈련을 하며 아르바이트를 하며 살고 있는 청년 곡비와 소비. 그러던 어느 날 곡비 앞에 위대한 곡비가 나타난다. 위대한 곡비의 울음 앞에서는 상주조차 울음을 멈출 정도로, 그의 울음은 사람들 사이에서 위대한 울음으로 알려져 있다. 위대한 곡비는 곡비에게 자신의 조수로 일할 것을 제안한다. 곡비는 이 위대한 곡비의 조수로 생활하면서 점점 변해간다. 타인을 위한 진정으로 울어주는 것보다, 위대한 곡비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 위대한 곡비처럼 성공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게 되면서 소비와의 관계에도 균열이 일기 시작한다. 소비는 곡비에게 결국, 진실을 말한다. 칭찬받고 싶어 안달 난 개와 같다고. 결국 곡비는 소비를 죽인다. 과연, 곡비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진정으로 울 수 있을까? 아니면 그 울음조차 위대한 곡비에게 인정받기 위한 울음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