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설명

진정한 드라마는 이제 "몽타쥬"다.
정해진 줄거리와 기승전결, 성격을 부여받은 등장인물들의 갈등과 해소, 사실적인 연출과 연기로써 "드라마"는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이 되고자 했다. 그러나 우리는 "사실주의적" 연극이 실은 전혀 사실주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경험해 왔다. 부조리하고 복합적인 현실을 어느 한 부분만을 조명하여 "묘사"하는 것으로는 현실이 파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드라마는 그것이 제시하는 현실을 넘어설 때 -혹은 드라마를 넘어설 때- 진정한 드라마적 힘을 낳는다. "드라마"란 하나의 쟝르가 아닌 '벌어지는 것' 그 자체이다. <주운 고아>는 현실의 오리지널리티를 부인한다. 현실은 수많은 다양한 경험들의 수집이자 강도 높은 밀도로 조합된 사고들의 복잡한 발산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몽타쥬만이 유일한 현실의 거울이며, 이 작품의 몽타쥬 기법은 그러한 현실을 넘어서기 위한 하나의 기술이 되고자 한다.

대체이데올로기와 대리전쟁이 주도했던 모든 희생제의적 시대를 말하다.
러시아 탱크가 동독의 산파(産婆)였다면, 히로시마 폭탄은 한국의 산파였다. 그것은 마치 선물처럼 조선을 일제에서 해방시켰지만, 더 끔찍한 한국전쟁과 분단, 이어서 근대화와 안보를 빙자한 국가주의적 폭력, 희생, 상처, 혼돈, 정체성 상실을 안겨주었다. 더불어 신자유주의는 자본축적을 위한 실용적 인간을 요구할 뿐이다. 생산과 성장: 그것은 더 이상 생산적이지도 않고 단지 더 많은 길잃은 자기파괴적 인간만을 낳을 뿐이다. - "열매를 죽이는 성장은 씨앗을 갖지 못한다." 이 작품은 두 독일작가의 '주운 아이' 모티브를 인용하고 변용하고 확장시킴으로써, 이러한 우리의 역사적인 모습을 몽타쥬적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줄거리는 인간역사의 모습 그대로: 해.체.되어 있다.

"당신도 살아남은 강한 자인가
수 많은 강한 자들이 자기 세대를
모르는 아이를 하나씩 기르고
진실은 매번 유통기한을 넘기는 통조림이다" 

무대에 펼쳐지는 오디오북.
<주운 고아>는 귀머거리를 위한 연극이자, 눈먼 자를 위한 연극이다. 이 공연은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고,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이 작품의 중심엔 "음악"이 있지만, 더 정확히 말하자면 모든 것을 "음악화" 하는 것에 있다. 명백히 구분되어 기능하는 배경음악의 역할을 찾는 것이 아니라, 연극을 하나의 "음악적 건축"으로 보고, 무대에서 벌어지는 것을 통해 "하나의 악보를 관객에게 제시"하고자 한다. 언어는 해체되고, 코러스적으로 말해지기도 하며, 지독하게 반복되기도 하는 등, 언어의 음악적 몽타쥬 역시 극대화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