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설명
<공중의 방>은 이 나라에서 발생한 두 개의 사회적 사건을 소재로 한다. 하나는 2014년에 발생한 세월호 사건,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2003년의 한진중공업의 노동자 김주익의 죽음이 그것이다.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해양사고와 십 년 전에 일어난 선박회사의 노동쟁의는 일견 어떤 관련성도 없어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이 두 개의 사건이 현대 한국사회에 있어서 ‘약자들의 비극’, 어떤 의미에서는 이 시대의 수난의 이야기로 다뤄질 수 있음에 주목했다.
두 개의 사건을 묶어주는 키 워드는 ‘배’다.
세월호 사건과 같이 소위 말하는 천재지변(실재로는 인재였으나)을 다루는 경우 작업자의 태도는 신중해질 수 밖에 없다. 사건과 비극의 거대함에, 대본을 만지는 손에 경련이 올 정도다. 또한 이런 실제 사고를 다루는 경우 작업자의 접근법은 개인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일 것이다. 어떤 이는 풀리지 않은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는 것에 초점을 놓을 것이고, 어떤 이는 희생자와 유족들의 마음을 짓밟고 있는 정부에 대한 분노를 극화하여 사회적 문제제기를 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들이 선택한 길은, 2015년 현대 한국에 있어 ‘사회적 트라우마’라고 표현해도 될 만한 이 사건들을 현실과 신화(혹은 이야기성)로 대치시키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결국 현실을 신화의 레벨까지 끌어 올려보자는 것이었다. 앞의 사건들이 지니는 압도적인 사실성과 신화적(혹은 우화적) 이야기가 충돌하면서 드라마는 사실성에 흡수되지 않으면서도 역사적 비극을 연극적으로 형상화할 수 있게 되었다. 중언하자면 우리가 이 연극을 통해 그려내고자 했던 것은 한국 현대사회에 있어서의 ‘수난의 이야기’이다.
그렇다. 이 작품은 현재 진행형의 수난극이다.
세월호의 이미지는 선박노동자 김주익의 죽음과 만나 이 세계의 종언에 구원을 선사하는 ‘방주’라는 이미지로 전환된다. 그리고‘방주’가 지니는 홍수신화의 후광은 ‘전지구적 이상기후에 의한 대홍수로 파멸해가고 있는 세계’라는 연극적 상상을 유도해냈다. 작품 속에서 도시는 홍수에 의해 침수되고 육지라는 육지는 모두 바다 밑으로 가라앉는다. 그리고 방주를 찾아낸 사람만이 종말의 순간에 살아남는다. 하지만 그 배를 탄, 산 이는 아무도 없다. 죽은 자들의 배가 천천히 침몰해가는 도시 위를 떠내려가고 있을 뿐이다.
이야기 속 인물들은 모두 ‘현재’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운 이들이다. 살았으나 이미 죽은 자들. 외딴 방에서 청년은 자기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사회를 독한 말로 저주한다. 그리고 사회복지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 그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 힘들어 한다. 소년은 살아남아버렸음을 괴로워한다. 그들이 존재하는 공간은 모두 ‘외부로부터 단절된 작은 방’ 이다. 이것이 상징하는 것처럼 그들은 현대사회 속에서 고독하고 고통스러우며 참을 수 없는 무엇인가를 견디면서’구원救?’을 원망願望하고 있다.
청년이 감지해내는 신호는 그들이 그토록 소망했던 ‘구원’의 전조다. 그러나 상처받은 고독한 현대인인 그들에게 ‘구원’이라는 단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작품의 말미에 이들이 맞딱드리는 결말은 ‘구원에 대한 각자의 선택’이다. 어떤 이는 ‘구원’을 거부하고, 어떤 이는 스스로의 죽음에 의해 ‘구원’을 타인에게 건넨다. 어떤 이는 ‘구원’을 거부했으나 결국 홀로 살아남아버린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사회라는 이름의 거대한 한 척의 ‘배’의 승객들이다. 그리고 그 ‘배’는 천천히 침몰해가고 있다. 이 배에 선장은 없다. 아마도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구명동의는 부족하다.
사건은 결코 끝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아직도 이야기 속의 등장인물과 마찬가지로 이 거대한 ‘배’의 승객이기 때문이다. 단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이 ‘배’가 침몰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야기의 힘이다.
죽은 자와 산 자의 세계를 이어주는 이야기의 힘을 회복하는 것.
‘구원’이 없는 이 세계에 ‘구원’을 예고하는 것.
그것은 라디오의 빈 채널에서 새어나오는 모르스 신호의 어렴풋한 속삭임을 닮아 있다.
그러나 그 메시지는 누구로부터 누구에게 보내지는 것인가?
그것은 우리로부터 당신에게…
그리고 그로부터 우리에게…
2015년 7월 1일 <공중의 방> 드라마 트루그가 쓴다.
(손상희 우리말로 옮김)
두 개의 사건을 묶어주는 키 워드는 ‘배’다.
세월호 사건과 같이 소위 말하는 천재지변(실재로는 인재였으나)을 다루는 경우 작업자의 태도는 신중해질 수 밖에 없다. 사건과 비극의 거대함에, 대본을 만지는 손에 경련이 올 정도다. 또한 이런 실제 사고를 다루는 경우 작업자의 접근법은 개인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일 것이다. 어떤 이는 풀리지 않은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는 것에 초점을 놓을 것이고, 어떤 이는 희생자와 유족들의 마음을 짓밟고 있는 정부에 대한 분노를 극화하여 사회적 문제제기를 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들이 선택한 길은, 2015년 현대 한국에 있어 ‘사회적 트라우마’라고 표현해도 될 만한 이 사건들을 현실과 신화(혹은 이야기성)로 대치시키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결국 현실을 신화의 레벨까지 끌어 올려보자는 것이었다. 앞의 사건들이 지니는 압도적인 사실성과 신화적(혹은 우화적) 이야기가 충돌하면서 드라마는 사실성에 흡수되지 않으면서도 역사적 비극을 연극적으로 형상화할 수 있게 되었다. 중언하자면 우리가 이 연극을 통해 그려내고자 했던 것은 한국 현대사회에 있어서의 ‘수난의 이야기’이다.
그렇다. 이 작품은 현재 진행형의 수난극이다.
세월호의 이미지는 선박노동자 김주익의 죽음과 만나 이 세계의 종언에 구원을 선사하는 ‘방주’라는 이미지로 전환된다. 그리고‘방주’가 지니는 홍수신화의 후광은 ‘전지구적 이상기후에 의한 대홍수로 파멸해가고 있는 세계’라는 연극적 상상을 유도해냈다. 작품 속에서 도시는 홍수에 의해 침수되고 육지라는 육지는 모두 바다 밑으로 가라앉는다. 그리고 방주를 찾아낸 사람만이 종말의 순간에 살아남는다. 하지만 그 배를 탄, 산 이는 아무도 없다. 죽은 자들의 배가 천천히 침몰해가는 도시 위를 떠내려가고 있을 뿐이다.
이야기 속 인물들은 모두 ‘현재’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운 이들이다. 살았으나 이미 죽은 자들. 외딴 방에서 청년은 자기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사회를 독한 말로 저주한다. 그리고 사회복지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 그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 힘들어 한다. 소년은 살아남아버렸음을 괴로워한다. 그들이 존재하는 공간은 모두 ‘외부로부터 단절된 작은 방’ 이다. 이것이 상징하는 것처럼 그들은 현대사회 속에서 고독하고 고통스러우며 참을 수 없는 무엇인가를 견디면서’구원救?’을 원망願望하고 있다.
청년이 감지해내는 신호는 그들이 그토록 소망했던 ‘구원’의 전조다. 그러나 상처받은 고독한 현대인인 그들에게 ‘구원’이라는 단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작품의 말미에 이들이 맞딱드리는 결말은 ‘구원에 대한 각자의 선택’이다. 어떤 이는 ‘구원’을 거부하고, 어떤 이는 스스로의 죽음에 의해 ‘구원’을 타인에게 건넨다. 어떤 이는 ‘구원’을 거부했으나 결국 홀로 살아남아버린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사회라는 이름의 거대한 한 척의 ‘배’의 승객들이다. 그리고 그 ‘배’는 천천히 침몰해가고 있다. 이 배에 선장은 없다. 아마도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구명동의는 부족하다.
사건은 결코 끝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아직도 이야기 속의 등장인물과 마찬가지로 이 거대한 ‘배’의 승객이기 때문이다. 단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이 ‘배’가 침몰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야기의 힘이다.
죽은 자와 산 자의 세계를 이어주는 이야기의 힘을 회복하는 것.
‘구원’이 없는 이 세계에 ‘구원’을 예고하는 것.
그것은 라디오의 빈 채널에서 새어나오는 모르스 신호의 어렴풋한 속삭임을 닮아 있다.
그러나 그 메시지는 누구로부터 누구에게 보내지는 것인가?
그것은 우리로부터 당신에게…
그리고 그로부터 우리에게…
2015년 7월 1일 <공중의 방> 드라마 트루그가 쓴다.
(손상희 우리말로 옮김)
줄거리
<공중의 방>
“어디 있는가, 나는?”
남자는 ‘비’가 오는 땅을 바라보다 아내와 아이와 따뜻한 몸으로 만나던 나날들을 ‘기억’한다. 그리고 어깨 맞대고 같이 걷던 동료들을 기억해낸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다. 그는 선박노동자, 배 만드는 남자였다.
비가 멈추지 않는 도시...
그곳의 외딴 방에서 세상의 모든 것을 비웃고 저주하며 인터넷 안에서만 살아 있는 히키코모리 청년. 그는 우연히 라디오의 빈 채널에서 어렴풋이 들려오는 모르스 신호를 감지하고, 암호를 해독하기 시작한다. 그는 저주스런 이 세상과 내 자신, 그리고 이 방에서 자신을 ‘구원’해줄 뭔가를 꿈꾸고 있다.
도시의 또 다른 방에는 더 이상 문을 열 수 없게 되어버린 살아남은 소년이 있다. 홀로 살았음에 스스로를 방에 유배해버린 소년은 기억 속에서만 살아 있다. 그리고 소년을 찾아오는 사회복지사 나는 소년에게 그 ‘기억’을 버려야만 살 수 있다 말한다.
사회복지사인 나는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이 방에서 청년과 소년을 끄집어내려고 하나, 돌아오는 것은 외면하고 있었던 자신의 기억과의 대면뿐이다. 세상과 타협해버린 견고한 자기합리화에 균열이 생기는 가운데, 그가 사는 도시는 멈추지 않는 비로 침수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외딴방의 청년은 수수께끼 같은 신호에서 예언의 단어, ‘거대한 배, 방주’를 해독해낸다.
공중의 방의 남자는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비를 바라보며, 스스로가 35미터 고공 크레인에서 부당한 압제에 죽음으로 항거하던 선박노동자였음을 기억한다. 그리고 자신이 만든 피 묻은 배가 이미 출항했음을 기억해낸다. 85호기 크레인 밑 도크를 미끄러져 내려가는 거대한 배. 남자의 신호를 받던 청년은 방주가 떴음을 타전하기 시작한다.
도시는 물에 잠기고 사회복지사는 청년과 소년을 구하기 위해 침수되기 시작하는 그들의 방으로 내려간다.
태웠어야 할 이들을 못 태운 피 묻는 방주,
죽은 자의 도시를 떠도는 이 방주 는
예언이 말하는‘손등으로 땀 닦는 선한 이의 아들’을 태울 수 있을 것인가...
“어디 있는가, 나는?”
남자는 ‘비’가 오는 땅을 바라보다 아내와 아이와 따뜻한 몸으로 만나던 나날들을 ‘기억’한다. 그리고 어깨 맞대고 같이 걷던 동료들을 기억해낸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다. 그는 선박노동자, 배 만드는 남자였다.
비가 멈추지 않는 도시...
그곳의 외딴 방에서 세상의 모든 것을 비웃고 저주하며 인터넷 안에서만 살아 있는 히키코모리 청년. 그는 우연히 라디오의 빈 채널에서 어렴풋이 들려오는 모르스 신호를 감지하고, 암호를 해독하기 시작한다. 그는 저주스런 이 세상과 내 자신, 그리고 이 방에서 자신을 ‘구원’해줄 뭔가를 꿈꾸고 있다.
도시의 또 다른 방에는 더 이상 문을 열 수 없게 되어버린 살아남은 소년이 있다. 홀로 살았음에 스스로를 방에 유배해버린 소년은 기억 속에서만 살아 있다. 그리고 소년을 찾아오는 사회복지사 나는 소년에게 그 ‘기억’을 버려야만 살 수 있다 말한다.
사회복지사인 나는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이 방에서 청년과 소년을 끄집어내려고 하나, 돌아오는 것은 외면하고 있었던 자신의 기억과의 대면뿐이다. 세상과 타협해버린 견고한 자기합리화에 균열이 생기는 가운데, 그가 사는 도시는 멈추지 않는 비로 침수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외딴방의 청년은 수수께끼 같은 신호에서 예언의 단어, ‘거대한 배, 방주’를 해독해낸다.
공중의 방의 남자는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비를 바라보며, 스스로가 35미터 고공 크레인에서 부당한 압제에 죽음으로 항거하던 선박노동자였음을 기억한다. 그리고 자신이 만든 피 묻은 배가 이미 출항했음을 기억해낸다. 85호기 크레인 밑 도크를 미끄러져 내려가는 거대한 배. 남자의 신호를 받던 청년은 방주가 떴음을 타전하기 시작한다.
도시는 물에 잠기고 사회복지사는 청년과 소년을 구하기 위해 침수되기 시작하는 그들의 방으로 내려간다.
태웠어야 할 이들을 못 태운 피 묻는 방주,
죽은 자의 도시를 떠도는 이 방주 는
예언이 말하는‘손등으로 땀 닦는 선한 이의 아들’을 태울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