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설명

당시는 제국주의 경쟁에 나선 미국을 비롯한 서구 국가들이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위해 태평양의 주도권을 잡으려 할 때였다. 미국의 상선들은 일본의 항구에 입항했고 그들을 보호하기 위한 미국의 전함들 역시 함께 드나들었다.
처음 보는 나라의 전혀 다른 타입의 여성들에게 남자들이 색다른 매력에 빠져 들어간 것은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물론 미국 정부는 아직 국제 결혼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미군들 역시 그들의 일시적인 맺음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문제는 그들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사생아로 인해 생기는 여인들의 모성 본능과 동양 여인의 정신세계에서 야기되는 현실과의 괴리 현상이었다.
이러한 문제는 그로부터 반 세기가 지나 2차 세계 대전 직후와 한국 전쟁 때 미국 병사와 일본 여인 사이에서도 발생했고 <나비 부인>못지 않은 비극이 발생하기도했다. 인종 문제에 편협하기 짝이 없는 미국 백인들에게 국제 결혼 문제는 비극의 테마가 되기에 충분했다.
푸치니는 1900년 런던에서 미국 극작가 벨라스코의 연극 <나비 부인>을 보고 감동하여 오페라화할 결심을 했다. 마침<토스카>의 상연이 성공한 뒤에 새 오페라 대본을 찾고 있던 푸치니는 벨라스코로부터 오페라화해도 좋다는 승낙을 받고 각본 구성을 의뢰했다.
아울러 푸치니 자신은 자료를 수집하여 본격적인 일본 연구에 몰두했다. 1902년 초부터 작곡에 착수했으나 그가 자동차 사고를 일으켜 대퇴부 골절의 중상을 입어 예정보다 늦어졌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1903년 12월에 완성되었지만 초연은 대실패로 끝났다.
푸치니에게 악의를 품고 있던 자들이 방해를 하여 제 대로 공연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토스카니니의 충고를 받아들여 부분 수정을한 뒤 프레시아에서 재상연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07년에 메트에서 제란딘 파라와 카루소의 공연으로 결정적인 평가를 받게되었고 이후 세계에서 각광받는 오페라가 되었다.
원래 벨레스코의 희곡은 존 루더 롱이 미국의 잡지 <센추어리>지에 발표한 소설 <나비부인>에서 소재를 빌려 온 것이었다. 그러나 원작자인 롱은 한번도 일본에 간일이 없었다고 한다. 오랫 동안 여자 선교사로 일본 나가사키에 살았던 그의 누이 어빙 코렐 부인으로부터 들은 나가사키에서 일어났던 게이샤의 비극적인 사건을 옮겨 듣고 소설을 쓴 것이다.

이 나비부인의 원작은 John Luther Long(1861~1927)의 소설인데 푸치니의 오페라는 이 소설을 미국의 흥행주 겸 각색가인 Belasco, D.(1859~1931)가 번안한 희곡을 원본으로 한 것이다. 이 연극이 뉴욕과 런던에서 크게 성공하였는데 때마침 푸치니가 '토스타'의 런던 초연을 타협하기 위해 갔다가 이 연극을 보고 감격한 나머지 밀라노에 돌아와 이 오페라의 대본을 서두르게 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황금의 트리오를 이루고 있는 지아코사와 일리사의 각색으로 오페라 대본의 완성을 보게 되었다. 비상한 정열을 가지고 작곡한 그는 도중에 병과 자동차 사고 등으로 인해 1년 반이나 걸려 완성하였으니 이 오페라의 초연은 뜻밖에도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 후 일본의 의상과 풍속, 연출 등에 다소 수정을 가하여 초연 3개월이 지나서 재공연하자 압도적인 성공을 보았다. 이 오페라의 음악은 작곡자 자신의 말과 같이 지금까지 자기가 쓴 가극 중에서 으뜸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화려하고도 애처로움이 있는 음악으로 엮어진 극음악이라 하였으며 이탈리아 오페라의 특유한 아름다움 전형이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