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설명

봄빛 가득한 5월, 파스텔 톤의 아름다운 드라마를 만난다! 겨울의 끝자락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을 만큼 길고 지루하지만, 어느 순간 눈을 떠보면 눈부신 봄빛 속에 온 세상이 새로 피어나고 있다. 우리의 삶 역시 마찬가지다. 인생의 절정은 이제 다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때론 예상치 않은 사랑을 만나 삶이 다시 시작되기도 한다. 온 세상이 환한 봄빛으로 물드는 5월, 월간 ‘객석’과 설치극장 정미소가 이 계절에 잘 어울리는 연극 한 편을 정미소 무대에 올린다. 러시아 작가 아르부조프의 1975년 작 <시간이 흐를수록>. 이미 삶의 절정을 지나쳐버린 중년 남녀가 우연히 만나 서로를 알게 되고 마음을 열어가는 과정을 통해 잔잔한 사랑과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여배우 윤석화와 정명철이 오직 배우의 힘과 매력만으로 무대를 이끌어가는 이인극의 정수를 선보인다.

그들의 중년은 당신의 청춘보다 아름답다 .
대학로 공연장을 가득 메운 연극 대부분은 젊은 관객들을 위한 이야기들이다. 무대 위에서 차고 넘치는 사랑 역시 가볍고 일상적인 사랑 이야기들이 주를 이룬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이 그리는 사랑은 조금 다르다. 중년 남녀의 잔잔한 사랑 이야기 속에 삶의 굴곡을 겪어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인생의 멋스런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선명한 원색의 사랑이라기보다는 은은한 빛을 머금은 파스텔 톤으로 펼쳐지는 로맨스그레이. <시간이 흐를수록> 은 삶의 기쁨과 아픔을 다 받아내고, 이제는 자신의 인생이 다 지나갔다고 생각하는 중년 관객들에게 “함께 할 누군가가 있다면 삶은 아직 놀랍고 아름다운 것”이란 사실을 전해주는 마음 따뜻한 무대다.

숨겨진 러시아 드라마의 보석, 아르부조프
<시간이 흐를수록(원제 ‘오래된 코미디’)>의 작가 알렉세이 아르부조프는 아직 우리에게는 낯선 이름이지만, 소비에트 시절 체홉 만큼이나 자주 공연되었던 러시아 드라마계의 거목이다. 그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딱딱한 이념을 일상적인 삶 속에서 부드럽게 그려낸 것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무엇보다 감각적인 대사와 섬세한 심리묘사로 이름이 높았으며 비평과 대중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몇 안 되는 작가였다.

청춘 드라마의 전형을 제시
젊은이의 감각에 맞는 대사와 음악을 적극 사용하고 멜로드라마적인 낭만성이 가미된 아르부조프의 작품들은 상연하기에도 좋은 요소들이 많아서 무대에 자주 올랐고, 폭넓은 관객층의 지지를 받았다. 특히 아르부조프는 남녀의 미묘한 관계와 심리 상태를 잘 포착해 청춘 드라마의 전형을 제시했다는 평을 받았으며 이후 러시아 극작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말년에는 밤필로프, 페트루솁스카야 등 7,80년대 현대 러시아를 대표하는 극작가들을 키워내기도 했다.

여백이 만들어내는 서정
아르부조프 후기 작품들에서 특히 도드라지는 것은 ‘서정성’이다. 그의 작품들은 극단 적인 상황을 만들어 내거나 날 선 대사를 치열하게 주고받는 일이 거의 없다. 대신 대사 사이사이의 여백과 긴장감을 통해 관객으로 하여금 저절로 미묘한 감정을 느끼도록 만든다. 아르부조프의 작품은 마치 겨울날 따뜻한 난로 옆에서 듣는 옛날이야기, 혹은 산들바람 속에 귀를 간질이는 봄노래처럼 부담 없이 편하게 흘러간다. 그러나 그 안에는 인생의 베일을 들추어내는 또렷한 시선과 깊은 성찰이 들어있다. <시간이 흐를수록>은 이러한 그의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 중 하나다.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사랑
<시간이 흐를수록>은 사랑 이야기다. 하지만 여기서 그리고 있는 사랑은 불꽃같이 치열하고 폭풍처럼 격렬한 감정이 아니다. 두 주인공 로디온과 리다가 보여주는 것은 삶의 굴곡을 다 겪어낸 사람만이 비로소 피워낼 수 있는 잔잔하고 사려 깊은 사랑이다. 마치 다 꺼진 듯 보였던 난로 속에서 살아남은 불씨가 따스한 온기를 전하듯 이들은 저물어가는 세월 속에서 다시 사랑을 꿈꾸고 삶에 마법을 건다. <시간이 흐를수록>에는 치열한 갈등이나 드라마틱한 사건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미 아픔은 오래 전 이들의 삶을 할퀴고 지나갔다. 이 이야기는 두 주인공이 지독한 고통의 시간을 겪고 난 뒤, 이후로도 오랜 세월이 지나 이제는 담담하게 과거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된 시점으로부터 시작된다. 아픔의 흔적은 여전히 남아있지만, 그들은 상처투성이로 남겨진 자신들의 삶을 각기 자신만의 방법으로 받아들이면서 이어나간다. 아픔과 눈물로 지새운 밤들을 말없이 흘러가는 세월 속에 묻은 다음에야 지을 수 있는 관조적인 웃음. 지독한 외로움과 가슴 저미는 고통을 겪은 이들만이 보여줄 수 있는 따스한 여유와 유머가 작품 가득 향기를 더한다. 간결하고 시적인 대사와 마지막 장면의 아름다운 반전은 극장 문을 나서는 관객들의 마음에 따뜻한 미소를 선사할 것이다.

누구나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없는 ‘시간의 풍경’
<시간이 흐를수록>의 공간적 배경은 발트 해를 품은 아름다운 도시, 라트비아의 리가다. 총 9장으로 구성된 <시간이 흐를수록>은 각 장마다 이 리가의 구석구석을 배경으로 한다. 이 장소들은 단순히 두 사람이 만나는 곳일 뿐만 아니라 두 사람의 마음을 이어주는 또 하나의 인물과 같은 역할을 맡는다. 햇살이 비치는 숲 속, 달빛과 음악 소리로 가득 찬 바닷가, 오르간 소리가 흘러나오는 돔스키 성당, 비가 촉촉이 내리는 리가의 골목길...누구라도 로맨틱한 기분에 빠지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9개의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두 사람의 감정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생생해진다.

줄거리

1958년 리가의 한 조용한 요양원. 환자들을 돌보며 평온한 일상을 보내고 있던 40대 후반의 원장 로디온 앞에 어느 날, 한시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매력적인 여인 리다가 나타난다. 지극히 상식적인 범위 안에서 생활하면서 담담하게 지나온 삶을 정리하고 있던 로디온과 매 순간 남과 다른 시선으로 삶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고자 하는 리다는 첫 만남부터 삐걱이며 다투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서로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도 깊어간다. 혁명과 전쟁이란 아픈 역사를 겪으며 말 못할 고통과 외로움을 마음 깊숙이 간직하고 있던 두 사람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조심스럽게 마음의 빗장을 열고 서로에게 다가간다. 함께 식사를 하고, 산책을 하고, 춤을 추면서 그들은 다시는 느낄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함께 하는 것”의 행복을 다시 깨닫게 된다. 오로지 과거의 추억에만 매달려 살아 온 로디온은 리다를 만나게 되면서 처음으로 “살아있다는 것”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보다 적극적으로 그녀의 아픔을 감싸 안으려 하지만 점차 이별의 시간은 가까워져 오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