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 내공 탄탄히 다지는 중” <글루미데이> 이규형

느릿느릿, 차분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니 어느새 한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아직 배우 이규형에 대한 이야기는 시작도 안 했는데! 창작뮤지컬 <글루미데이>에 출연 중인 이규형은 그렇게 캐릭터에 대한 몇 가지 질문만으로도 한 시간을 넉넉히 이야기할 만큼 진지했다. 그가 극중 맡은 역할은 1926년, 현해탄을 건너는 배에서 함께 몸을 던진 김우진과 윤심덕 곁을 맴도는 정체불명의 인물. <유럽블로그><젊음의 행진> 공연과 병행하느라 연습시간이 부족했다지만, 무대 위 이규형은 기대했던 대로 어둡고 위협적인 사내로 완연히 변신해 있었다. 지난 14년간 쉼 없이 연기를 했고, 버젓이 주연배우로서 활약하는 지금도 여전히 '내공을 쌓는 중'이라 말하는 그는 앞으로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재능과 노력이 만나 빚어낼 끝없는 변신이 기대된다.

처음 <글루미 데이> 대본 받고 어떤 점에 끌렸나.
일단 재미있었다. 인물 분석에 들어가기에 앞서 일단 재미있고, 긴장감이 있고, 몰입도가 높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해보고 싶었다.

<유럽블로그><젊음의 행진> 등 최근 출연해온 작품과 분위기가 달라서 배우로서도 욕심났겠다.
그런 생각도 했다. 요 근래 좀 찌질하고(웃음) 순한 캐릭터를 많이 했는데, 나도 배우이다 보니 좀 색다른 것을 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오히려 학교 다닐 때는 안톤 체홉, 아서 밀러의 작품 등 진지한 작품만 했는데, (학교) 밖에선 어쩌다 보니 찌질하고 순박하고 여자한테 차이는 역할만 했던 것 같다. <빨래>의 솔롱고, <싱글즈>의 정준, <젊음의 행진>의 경태도 그렇고, <나쁜자석>의 앨런도 깊이는 다르지만 표면적으로는 그렇게 보이고. 그래서 <글루미데이> 대본을 읽었을 때 사내 역을 하고 싶다고 얘기를 했다. 물론 우진도 진지한 역할이지만, 사내 역이 좀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사내라는 인물을 연기하기 위해 어떤 모습을 상상했나.
사내에 대해서는, 물론 내가 생각하는 모습이 있다. 근데 그건 비밀이다.

관객들의 상상력을 제한할 것 같아서?
맞다. 연출님, 정민 형과 많은 자료와 아이디어를 주고받았는데, 그 때 생각했던 이미지는 있다. 자료 조사를 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사진인데, 가뭄이 들어 쫙쫙 갈라진 땅바닥 틈 사이로 물고기 한 마리가 말라 비틀어서 입을 쩍 벌리고 있는 사진이었다. 저 멀리 사람의 형체가 하나 서 있는데, 그가 사내 같고, 말라 비틀어진 생선이 우진과 심덕 같고, 쫙쫙 갈라진 땅바닥이 그 시대 상황처럼 느껴지더라.

연출님도 분명 어떤 생각을 갖고 사내라는 인물을 썼는데, 나와 정민 형이 너무 달라 연출님도 생각지 못한 것들이 많이 나온 것 같다. 우리도 순간순간 몰입하면서 생각지도 못한 것들이 나오고. 사실은 지금도 사내라는 캐릭터를 만들어가는 중이다. 관객들 사이에서도 여러 가지 분석이 나왔더라. 사내가 사이코패스라는 해석도 있고, 죽음 혹은 운명을 의인화한 인물이라는 해석도 있고. 모두 우리가 연습기간에 얘기했던 것들이다. 어떤 사람이라고 딱 단정지을 수는 없는 것 같다.


사내가 윤심덕에게 가진 감정은 어떤 것인가.
사내가 어떤 존재든, 어쨌든 그의 주제는 '사의 찬미'다. 죽음을 찬양하는 거다. 그런데 사내가 윤심덕에게 '넌 이폴리타야. 죽음의 승리. 그 소설 속의 여주인공은 젊은 사내와 욕정을 불태우다 끝내 자살해'라고 말했을 때 심덕은 '좋아, 나쁠 것 없지. 오래 살고 싶은 생각은 없어. 난 찰나에 사는 사람이니까'라고 말한다. 그 대답에 사내는 머리가 띵한 거다. 지금껏 봐온 사람들과 다르니까. 다들 살겠다고 발버둥치는데, 심덕의 인생관이 사내와 딱 맞아 떨어진 거다. 아름답고, 나와 생각이 같으니 더 매력적이고.

그 후의 마음은 무대에서 연기하면서도 매일 고민이 된다. 물론 결말은 정해져 있지만, 그 과정의 감정선이 매일 다르다. 살려야 되나? 내 옆에 계속 둬야 하나? 혹은 진짜 멋있고 아름답게 죽여줘야 되나? 여러 가지 생각이 들어서 머리가 복잡하다.

사실 물리적으로 연습기간이 조금 부족하기도 했다. 연출님도 공연이 올라간 후 캐릭터들이 진화하고 있다고 말씀하시더라. 무대에서 관객들과 상대 배우의 에너지를 받아서 전에 느끼지 못한 새로운 감정을 느끼고, 그로 인해 디테일한 부분이 바뀌기도 하고. 좀 러프하더라도 생생하게 가는 맛이 있다. 아직 시도하지 못한 것들도 있고, 지금의 연기톤과 너무 달라서 시도할 엄두도 못 낸 것도 있고.

구체적으로 어떤 시도를 해보고 싶었나.
지금은 내가 좀 전형적인 연기를 하고 있는데, 원래 처음에 생각했던 인물은 허술한 사람이었다. 의외지? 근데 그런 사람이 뒤에서 씩 웃으면서 (김우진과 윤심덕을) 조종하고 있다고 생각해봐라. 두꺼운 안경을 끼고 땀을 뻘뻘 흘리며 등장해서 우진에게 '어이, 친구, 아까 네가 쓴 시 되게 인상적이었어' 하면서 책을 우르르 쏟고. 이걸 언젠가 한번은 시도해봐야 되는데 엄두를 못 내고 있다. 전체적인 연기 톤이 다 바뀌어야 하고, 상대배우들과의 호흡도 따로 맞춰봐야 하니까.

사내의 주요 메시지가 '사의 찬미'라면, <글루미데이>를 통해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이었나.
심덕을 가운데 두고 우진은 살자고 하고, 사내는 죽자고 한다. 심덕은 결국 삶을 선택한다.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삶의 소중함이다. 연출님도 죽는 것보다는 살아 남아 뭔가를 해보는 게 더 값진 게 아니겠느냐는 이야기를 하고 싶으셨던 것 같다.


<나쁜자석>에서 처음 봤는데, 연기가 인상적이었다. 연기공부를 어떻게 해왔는지 궁금했다.
학교 다닐 때는 안민수 선생님의 <연극 연출>이라는 책을 들고 다니면서 달달 외웠다. 우리 학교(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의 전설적인 교수님이시다. 최민식, 한석규, 유준상, 김상중 선배님부터 박신양, 채시라 선배님 등 내로라 하는 배우들을 다 가르치셨다.

진지한 학생이었을 것 같다.
진지하게 연극에 임했다. 수업시간에도 항상 맨 앞에 앉고, 남들 한 번 발표할 때 세 번 발표하고. 한 번은 프랑스에 유학을 다녀오신 분의 특강을 들었는데, 학생들을 보고 되게 당황하시더라. 연기를 배우는 학생들이 이렇게 소극적이어서 뭘 하겠냐고. 프랑스에선 즉흥연기 수업할 때 교수님이 화두를 던지자마자 학생들이 서로 손을 들고 무대로 올라간다고 하더라. 그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연기하겠다고 등록금을 내고 학교를 다니는데, 내가 뭐 하는 거지 싶더라. 그리고 당장 등록금을 내가 내야 해서, 무조건 장학금을 받아야 했다. 아마 나를 싫어하는 아이들도 있었을 거다. 밉상이라고. 후배들에게는 엄한 선배이기도 했다. 수업시간에 떠들거나 발표 준비를 안 해오면 따로 부르기도 하고. 학교 다닐 때는 연극만 미친 듯이 했던 것 같다.

그 때는 졸업 후의 모습을 어떻게 그리고 있었나.
고등학교 때부터 인생의 큰 계획은 있었다. 연기 열심히 하다가 졸업하면 대학로에서 연극을 하면서 내공을 쌓고, 그 다음에 나이가 좀 먹으면 영화 쪽으로 시작을 해 보려고 했다. 최민식, 설경구, 한석규 선배님 등 그 당시에 활동하는 선배님들이 다 그런 코스를 밟아서 지금의 자리에 올라갔다. 그 때 영화 '쉬리'를 보고 최민식 선배님이 배우신 곳에서 나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재수 끝에 동국대에 들어간 거다. 처음엔 경희대 연극영화과에 붙었는데 자퇴하고 반수를 했다.

노래를 잘하는 건 아니지만, 그나마 지금 뮤지컬을 하고 있는 건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이모님한테 노래를 배워서다. 1학년때 뭔가 새로운 걸 배우고 싶었는데, 마침 이모님이 이태리에서 성악교육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셨다. 바로 연락을 해서 (조)강현이랑 찾아가서 군대 갈 때까지 배우고, 그 이후로도 가끔 찾아가서 배운다. 그나마도 안 배웠으면 뮤지컬은 생각도 못했을 거다.


고등학교 때 세웠던 계획은 지금도 변함이 없나.
없다. 원래 영화를 하고 싶어서 연기를 시작했고, 그건 아직도 변함이 없다. 고등학교 때까지 포함하면 17살부터 지금까지 14년 째 무대에 서고 있고, 1년도 쉰 적이 없다. 군대에서도 호루라기 연극단에 있었으니까(웃음).

장기적인 계획인데 불안했던 적은 없나.
왜 없겠나. 있다. 근데 잠깐이다. 잘 된 후배들을 보면 '난 지금 뭐하고 있는 거지' 할 때도 있었는데 그 때뿐이다. 그건 남의 사정인 거고, 나는 나의 이야기를 써나가야 되니까. 어렵게 시작하고 힘든 기간이 오래 될수록 밑바닥이 탄탄해지는 것 같다. 정답은 없지만, 스스로 남 부끄럽지 않게 걸어가고 있다는 확신은 있다.

그리고 사실 기본적으로 배우라는 족속은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게 있다. 그게 없으면 무대에서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 같다. 물론 오만하다는 건 아니지만, 배우들은 누구나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게 있다.

살아가면서 중요하게 꼽는 가치는 어떤 게 있나.
가족. 가족이 일단 제일 우선인 것 같다. 가족이 없으면 내가 존재하는 의미도 없고. 굳이 사랑을 포함시키지 않는 건, 결혼하면 그 사람도 나의 가족이니까. 언젠가는 나도 아이를 낳을 거고. 아이를 되게 좋아한다. 그 다음엔 노는 것. 놀 때는 좀 놀아야 된다. 열심히 할 땐 열심히 하고, 신나게 놀 땐 놀고, 넓은 세상도 보고. 그래야 생각이 좀 트이고.

그리고 친구. 많이도 필요 없고, 10년, 20년 함께 갈 몇 명만 있으면 된다. 자주는 못 봐도 어린 시절 잊을 수 없는 추억을 함께 했고, 오랜만에 만나도 즐겁고, 술 먹으며 옛날 얘기를 하는 친구들이 있다. 지금은 공연을 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그 친구들과 새로운 얘깃거리를 못 만든다는 게 가장 아쉽다.

<글루미데이> 이후 공연 계획은?
얘기 중인 것들이 있는데, 아직 확정된 건 없다. 나도 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고. 일단 <글루미데이>와 <젊음의 행진>이 끝나면 좀 휴식을 취해서 여행을 가려고 계획 중이다. 미국으로 가서 좀 돌아다녀볼 생각이다.


글: 박인아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iapark@interpark.com)
사진: 기준서(스튜디오춘 www.studiocho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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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3

  • arirang** 2013.06.24

    맞아요 글루미데이 공연 너무 짧았어요. 저도 노리고만 있다가 결국 시간을 못내서 못갔네요. 아쉽습니다. 기대하고 있었는데 ㅠㅠ

  • 5545gi** 2013.06.21

    나쁜자석 앨런 역할로 처음 뵀어요.이번 글루미데이는 공연기간도 짧고 시간이 안 맞아서 못 봤지만,오래 지켜보고 싶은 배우입니다. 연기 스펙트럼이 넓은 것 같아서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규형 배우, 영화의 꿈 꼭 이루시길 바래요.나중에 스크린 데뷔하셔도,무대를 잊지 않고 돌아와주셨음 좋겠어요~

  • A** 2013.06.21

    글루미데이로 처음 보게 됐는데 깊이가 남다른 분 같더라구요 공연 보는 내내 규형배우님이 내 목을 조르고있는것 같은 신비로운 경험을 했습니다 공연 좋아해서 자주보는데 굉장한 배우를 만난듯한 기분이였습니다 규형배우님 공연이제 챙겨보도록 하겠습니다 조만간 배우님의 영화를 볼수있으면 저도 좋겠네요 배우님의 발전하는 미래를 응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