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게, 진지하게 무대를 향하다 <쓰릴 미> 박영수

맑음. 배우 박영수의 분위기를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이 말을 골라야겠다. <쓰릴 미> 연습실에서 어딘지 처연한 분위기를 자아내던 그는 작품 이야기를 꺼내자 아이처럼 선한 눈을 빛냈다. 그 맑은 기운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알고 싶어 연이어 질문을 던져보았지만, 여전히 알쏭달쏭하기만 하다. 다만 '뮤지컬의 신'을 꿈꾸는 그가 무대를 향한 순수한 열정을 가득 품고 나아가고 있다는 것만은 잘 알 수 있었다. 올해 <아르센 루팡>과 <윤동주, 달을 쏘다>를 거쳐 다시금 <쓰릴 미>로 또렷이 이름을 각인시킬 그의 무대를, 다 풀지 못한 궁금증을 품고 기다려본다.

<쓰릴 미>를 연습하면서 제일 어려운 점은 무엇인가요?
일단 입이 마르는 게 제일 힘들어요(웃음). 'Roadster'가 나올 때 말고는 나가서 물 마실 시간이 없잖아요. 한 시간 반 동안 런을 돌다 보니까 중간에 집중이 조금이라도 깨지면 다시 집중하기도 너무 괴롭고.
그리고 얼마 전에 용인에서 10대 살인사건이 일어났잖아요. 뉴스를 보면서 이해가 안 됐거든요. <쓰릴 미> 사건도 당시에 누가 이해를 했겠어요. 그 말도 안 되는 걸 표현하려니까 힘든 것 같아요.

네이슨이라는 인물은 어떻게 이해하고 계세요?
사건의 진행을 보면 네이슨은 그렇게 많은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냥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기 위해서 그 순간순간에 굉장히 열심이거든요. 마지막 대사 중에 있잖아요. '이미 말씀 드렸습니다만, 그와 함께 있기 위해서 그랬습니다.' 그게 네이슨의 마음인 것 같아요. 순간 그 무엇도 보이지 않을 만큼 눈에 뭔가 씐 거죠.

아까 일본 조연출님이 네이슨이 리처드의 반응을 보며 희열을 느낄 수도 있다고 하셨는데, 그렇게 되면 정말 사이코패스가 될 것 같아요(웃음).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거든요. 순간순간 사랑하는 사람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리처드의 반응에 제가 계속 흥분을 하는 거라면 대사에 나오는 것처럼 정말 '변태새끼'일지도 모른다는(웃음) 생각이 들었어요. 그게 연출님이 바라는 방향인지 모르겠어요.

네이슨이 사건현장에 안경을 떨어뜨리는 건요?
안경은 정말 일부러 떨어뜨린 거죠. 리처드가 주변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나를 버리고 1년 동안 다른 생활을 했잖아요. 거기에 대한 배신감이 엄청 컸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가 다시 배신할 거라는 걸 예감하거든요. 대사에도 '넌 날 배신할거야. 난 너가 원하는 대로 해도 넌 내가 원하는 대로 절대 하지 않을걸'이란 말이 있어요. 작은 사건들은 계약서에 의해서 함께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살인이라는 엄청난 범죄를 함께 할 때는 그가 나를 또 배신할 가능성이 있으니 안경이란 장치를 버려둔 거죠. 감옥에 가려는 생각은 절대 없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 후에 감옥에서 34년을 보냈잖아요. 정말 긴 시간인데 리처드에 대한 마음이 변하진 않았을까요?
처음에는 (무대에) 굉장히 무덤덤하게 들어온다고 생각했어요. 가석방 심의가 벌써 일곱 번째니까 이제 조금은 초연해진 거죠.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에 에너지를 낭비하기도 그렇고. 그래서 네이슨은 초반에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다는 듯한 말들을 해요. '빨리 판결을 해주십시오. 전 또 할게 있습니다'라는 뉘앙스를 갖고 있거든요. 그러다 천천히 (과거) 속으로 들어가면서 마음의 동요가 일어나는 거죠.

그리고 맨 끝에선 이 친구랑 감옥에서라도 함께 있을 수 있다는 행복감이 (다시 현재로 돌아오며) 회한으로 확 전환된다고 생각해요. 희열, 따뜻함이 정말 가슴 아픈 기억의 한 자락으로 바뀌는 거에요. 후회보다는 가슴 아픈 기억 같아요. 평생 잊지 못할.


연습을 하지 않을 때도 맡은 역할에 몰입해계세요?
그러려고 해요. 그러지 않으면 한 시간 반 동안 집중하는 게 너무 힘들거든요. 근데 저희 팀 분위기가 좋아서 장난 치게 되는데(웃음) 장난을 치면서도 계속 생각을 하게 돼요. <아르센 루팡>에서 레오를 연기할 때는 냉동 삼겹살을 사서 칼로 찔러봤거든요. 사람을 죽이는 인물이니까 그 질감을 알아보려고요. 이번엔 무슨 생각을 하나면, 연습실 안에 있는 사람을 한 명씩 (상상 속에서) 죽여봐요. 어떻게 하면 완전범죄를 저지를 수 있을까도 생각해보고.

자신과 네이슨의 닮은 점을 꼽는다면.
제가 하나에 빠지면 헤어나지 못하는 점이 있어요. 주변도 잘 안 돌아보고. 지금도 <쓰릴 미>에 정말 빠져있거든요. 정말 저희 집 강아지 밥 챙겨주는 것(웃음) 말고는 저의 모든 사생활이 <쓰릴 미>에 맞춰져 있어요. 다른 건 보지 않는 것 같아요. 자기 전까지 (대본을) 보고 일어나면 또 계속 생각하고. 네이슨이 뭔가 하나에 빠져서 다른 것들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그'를 맡은 임병근 씨랑 서울예술단 동기잖아요. 키스신 장면에서 어색하진 않나요?
병근이랑은 예전에 서울예술단에서 연습할 때도 같이 <쓰릴 미>를 하게 되면 어떨까? 라고 말을 한 적이 있어요. 병근이가 리처드를, 내가 네이슨을 하면 재미있겠다 생각했는데 그 키스씬 때문에 못 할 것 같은 거에요. 근데 막상 해보니까 별 다른 느낌은 없는 것 같아요. 처음에 병근이가 말을 안 하고 갑자기 해서 깜짝 놀랐어요. 리허설 중인데 저도 모르게 (입술을) 떼 버렸어요. 그리고 나서 병근이가 '행복해?'라는 대사를 하는데…어휴(웃음). 예전엔 키스를 굉장히 진하게 했다고 하더라고요. 저희는 아직 (가볍게) 했는데, 상당히 입술이 말랑말랑 하더라고요(웃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의 극단에서 연기를 하셨다고 알고 있어요. 언제 처음 연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하셨는지 궁금해요.
원래는 그냥 운동하는 걸 너무 좋아했던 아이에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농구에 빠져서, 하루 종일 농구공 하나 들고 놀았죠. 중학교 때 어머니한테 스웨덴인가에 있는 농구학교에 보내달라고 조르다가 엄청 혼나고(웃음). 부모님은 공부나 하라고 하시는데 공부가 너무 하기 싫어서 실업계 고등학교를 갔어요. 거기서도 맨날 농구만 하다가 고3이 됐는데, 어느 대학을 가야 될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러다가 어느 날 친구랑 집에 가는데, 마침 그때 부산에 생긴 MBC아카데미 광고를 봤어요. 갑자기 그 오디션을 볼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거에요. 친구랑 같이 오디션을 보고 붙었는데, 부모님이 연기하는 걸 반대하셨어요. 그러면 제가 돈을 벌어서 하겠습니다, 해서 허락을 받고 바로 취업계를 냈어요. 7개월 동안 수원에 있는 공장에서 일해서 350만원을 모아서 다시 부산에 내려갔죠. 어머니가 충격을(웃음) 받으시고 그럼 해볼 테면 해봐라, 해서 연기를 배웠어요. 그 후엔 아동극부터 시작해서 부산에 있는 극단을 떠돌면서 4~5년 정도 연습을 한 것 같아요.

서울예대는 4수만에 합격하셨는데, 도중에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나요.
목표가 '배우'였기 때문에 학교를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근데 원하는 학교는 서울예대였기 때문에 연극을 하면서 시험은 매년 봤죠. 현장에서 너무 막 배우다 보니까 정리가 안 돼서 좀 체계적으로 배우고 싶었고.

포기하겠다는 마음은 별로 없었는데, 한번은 형이 짜증을 냈어요. 붙지도 않는 입시 그만 준비해라, 돈을 벌어오는 것도 아니지 않냐고. 낮엔 연습하고 공연을 해야 되니까 야간아르바이트밖에 못 했거든요. 2005년도 입시를 보러 서울로 올라오는 날에는 형이랑 멱살을 잡고 싸웠어요. 형이 마지막이라고, 더 이상 기회는 없다고 했죠. 그렇게 막 싸우고 올라왔는데, 붙은 거에요(웃음). 신기하게도 그런 타이밍에 딱 붙었죠. 형이 내색은 안 했지만 입학금도 구해주고, 좋아 했어요.

<바람의 나라><윤동주, 달을 쏘다>에 이어서 올초 <아르센 루팡>에서 높은 경쟁률을 뚫고 레오나르도 역을 맡으셨어요. 그 때 어떤 점이 돋보였다고 생각하세요?
모르겠어요. 저는 아직도 정말 부족한 게 많거든요. 스스로 뭐가 부족한지 너무 잘 알고 있기도 하고. 그냥 제가 이제까지 노력했던 게 쌓여서 보여지지 않았나 싶은데, 저는 아직도 정말 만족하지 못하거든요. 채워지지 않는 것들이 너무 많아서 평생 노력해야 될 것 같아요.


배우로서의 롤모델이 있나요?
꼭 '배우'라기 보다 무대에 서는 사람으로서의 롤모델은 있어요. 부산에 있는, 정말로 무대를 사랑하시는 형님들이요. 저도 부산에 있을 때는 집에 갈 차비도 없이 밤새도록 연습했던 적이 있는데, 그 형님들은 아직도 그렇게 하시거든요. 부산과 서울은 공연 환경이 너무 달라요. 공연장도 많지 않고, 관객들도 적고. 그런 곳에서도 정말 열심히, 하나하나 직접 창작하면서 공연을 올리시거든요. 그렇게 평생 무언가를 갈구하시는 모습에서 형님들을 롤모델로 생각해요. 정말 사람냄새 나는, 머리에 먹물이 안 든 형님들이라서요. 늘어지지 않으려고 계속 형님들을 생각하는 것 같아요.

앞으로 하고 싶은 작품이나 역할을 꼽는다면요.
너무 많죠. 장발장도 나이 들어서 40~50대에 도전해보고 싶었던 작품이고, <서편제>의 동호도 해보고 싶어요. 예전에 서울예술단에서 했던 <청 이야기>도 다시 한번 해보고 싶고. 근데 일단은 내 눈앞에 있는 걸 잘 하자는 생각이에요(웃음).

배우로서의 활동 외에 다른 계획은요?
아주 장기적인 계획은 하나 있어요. 60대가 되면 음악을 해보고 싶어요. 음악적인 소질이 너무 없어서, 지금부터 조금씩 실력을 쌓아서 60대에 음악을 하고 싶어요. 기타를 잠시 배우다 요즘 시간이 너무 없어서 못 하고 있는데, 피아노랑 기타, 하모니카, 오카리나, 대금, 장구, 단소 이런 것들을 다뤄보고 싶어요. 악기라는 친구와 평생 함께 하면 기분이 되게 좋을 것 같아요. 집에 젬베도 사 놨어요(읏음). 가끔 유투브 보고 혼자 따라 해요(읏음).

연기나 음악에 대한 그런 열정은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해요.  
음…전 제 삶에 대해서 정말 진지한 것 같아요. 70~80년이라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땅에 묻힐 때까지, 정말 즐겁고 재미있게 뭔가를 해보고 싶어요. 누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제가 하고자 하는 일을. 제가 즐겁게 느끼는 일들에 대해서 진지하게, 깊이 있게 다음 단계들을 밟아가고 싶어요.

글: 박인아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iapark@interpark.com)
사진: 배경훈 (Mr.Hodol@Mr-Hod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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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2

  • papa** 2013.08.07

    언제나 열심히 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팬으로서 승승장구 하시는 배우님이 자랑스럽고 뿌듯합니다.^^

  • winooo** 2013.07.20

    박영수배우님 윤동주때도 열연하시는거 정말 감동깊게 봤습니다.^^ 항상 응원하고 있어요.^^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