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프>처럼, 뮤지컬배우 최정원


#. 뜨거운 그녀, 피아프처럼
화이트 프렌치로 완성된 손톱을 내밀며 “피아프는 손톱을 항상 이렇게 하고 다녔어요”라고 말하는 최정원은 그 어느 때보다 빛나 보였다. 프랑스 샹송가수 에디트 피아프의 블랙 원피스, 웨이브 머리, 옅은 미소. 그 평범한 것들이 요즘의 최정원에게는 지독히도 뜨거운 것들이다. 진한 여운을 남기고 떠난 샹송가수 에디트 피아프로 살고 있는 요즘, 최정원은 빛나고 있다. 피아프처럼.

“2009년 초연 때 <피아프> 대본을 보고 깜짝 놀랐었어요. 대사 하나하나가 제가 일기장에 써놨던, 인터뷰 때 했던 말들과 비슷했거든요. 무대에서는 표현할 수 없는 무대에 대한 제 생각들을 피아프 입장에서 말을 할 수 있어서, 자신 있게 표현할 수 있어요. 초연 때 보다 이번 공연에서 더 성숙한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스스로 ‘내가 더 성숙해졌나’라는 생각을 할 정도로 생각도 더 많아졌고, 좋아진 걸 느껴요. 초연 때는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어서 강(强)이 많았던 것 같은데 강약이 조절되면서 조화가 생긴 것 같아요. 며칠전에 연습을 지켜보시던 박명성 대표님이 “최정원씨 힘이 빠지니까 홈런 칠 준비가 된 것 같네, 어린 강부자 같아”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뮤지컬배우한테는 나오기 힘든 연기를 보셨다면서. 와, 기분 좋았어요. 정말로.”


“맹인의 삶을 살기도 했고, 모르핀, 알코올 중독 등 많은 상처를 안고 살았던 피아프는 아름다운 삶을 살진 못했어요. 하지만 그녀는 항상 사랑했고, 한 시도 쉬지 않고 노래했어요. 진흙탕에서 노래를 부르고, 자동차 소리보다 더 큰 소리를 내기 위해서 큰 목소리를 내는 법을 터득하면서 나이를 먹고, 아파하고, 사랑하면서 살았죠. 처음엔 ‘참, 우울한 사람이었겠다’고 생각했는데 피아프를 알아갈수록 그녀가 저보다 더 많은 행복을 느낀 사람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요. 그녀의 노래를 전 세계 사람들이 기억하고, 부르고 있잖아요.”

#. 뜨거웠던 그녀, 피아프처럼
무대를 향한 최정원의 열망은 노래를 향한 피아프의 열망과 꼭 닮아있다. 최정원이 <피아프>를 가장 몰입이 잘되는 작품으로 꼽는 이유가 바로 그 공통점 때문이다. 한 길을 향한 고집. 피아프와 최정원이 세계적인 샹송가수, 대한민국 대표 뮤지컬배우로 꼽히는 이유 역시 바로 그 공통점에 있다.

“피아프는 미국공연에서 실패를 경험해요. 슬픈 노래인데도 불구하고 불어를 모르는 미국사람들이 박수를 치고, 웃으면서 노래를 듣는 걸 보고 좌절감을 느낀 거죠. “넌 최고의 개런티를 받는 가수야, 실망하지마”라고 위로하는 친구들에게 피아프는 “돈은 중요하지 않아, 무대에서 느끼는 환희를 돈으로 보상받는 건 불가능해”라고 말해요. 저에게 드라마, 영화섭외가 들어오면 ‘오늘밤 내가 공연하면서 느꼈던 환희와 비교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요. 물론, 개런티는 무대에 설 때보다 더 많죠. 하지만 무대에서 느낀 행복의 가치, 환희를 돈과 비교할 수는 없잖아요. “최정원 배우는 항상 젊게 사네요, 활기가 넘쳐요, 아우라가 있어요”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건 무대 덕분이에요. 저에게는 돈, 명예를 위해서 다른 일을 선택하지 않아도 충분할 만큼 행복을 주는 무대가 있어요. 워낙 물을 좋아해서 수중분만도 하고, 하루에 7리터씩 물을 마시는데요. 무대는 저에게 물 같은 존재에요. 꼭 필요해요. 저에게 공연이 없었다면 아팠을 것 같아요, 굉장히 히스테릭한 성격이었을 것 같기도 하고(웃음).”


“고등학교 때, 브로드웨이 선생님들에게 2년 동안 트레이닝을 받고 처음으로 섰던 무대가 <아가씨와 건달들> 이었어요. 그 땐 정말 춤을 추면서 눈물을 흘렸어요. ‘와, 내가 이런 무대에 서다니!’. 그 마음을 잃지 않으려고 “언제나 처음처럼, 처음을 언제나처럼”을 되새기며 살아요. 무대는 ‘언제나’가 통하지 않는 곳이잖아요. 매일 다른 관객 분들 앞에 서야 하니까. 초심을 잃지 않고 살게 해주는 원동력이 바로 무대에요. 뮤지컬이라는 장르가 생소할 때부터 이 일을 시작해서 개척자의 마음으로 이 일을 시작했는데, 늘 똑같아요. 더 힘들어지거나, 편해지는 것 없이 저는 그냥 꾸준히 걸어요. 주변에서 물도 주시고, 비료도 주시고, 덕분에 열매도 맺고, 꽃도 피우는 것 같아요.”


“<키스 미 케이트>는 9년 만에 했던 작품이었어요. 성악발성을 한번도 내본 적이 없던 저에게는 관문 같은 작품이었죠. 브로드웨이 선생님들이 “정원아, 넌 진성보다 두성이 좋아. 두성을 연습해봐”라는 이야기를 많이 해줬지만 워낙 피부도 까무잡잡하고, 춤을 추는 캐릭터라 <그리스>에서는 샌디 보다 리조, <지킬앤하이드>에서는 엠마보다는 루시에 근접했거든요. 한 번도 두성을 쓸 기회가 없었어요. 두성을 많이 써야 하는 <키스미케이트>를 위해서 개인레슨까지 받았어요. 김문정 음악감독님도 음을 내리자고 말했는데, 제가 해보겠다고 고집해서 결국 하이피치 가는 것까지 해냈어요. 이 작품을 통해서 9년 만에 여우주연상까지 받고. 상을 원했던 건 아닌데, 김무열 배우가 “최정원 선배님”하는 순간 모든 게 멈춰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동료배우들이 기립을 해주는데, 정말 오랜만에 큰 떨림을 느꼈어요. <피아프>를 하면서 이런 생각을 해봐요. 그녀는 이 세상에 없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그리워하잖아요. 나중에, 제가 세상에 없을 때. 뮤지컬 후배들이 최정원이 어떻게 배우가 됐고, 어떻게 인생을 살았다라는 걸 이야기해줄 수도 있겠다. 그렇게 하려면 내가 잘 살고 있어야겠다(웃음).”


“지난 일 년 동안 <맘마미아!>로 224회 공연을 했어요. 원래 운동도 열심히 하고, 규칙적으로 음식을 먹으면서 관리를 하는 스타일인데, 원 캐스트인 <맘마미아!>를 하면서 정말 체계적으로 관리를 했던 것 같아요. 다칠 까봐 그 좋아하는 스키도 안타고, 먹고 싶은 술도 안 마시고(웃음). 제 신랑이 정말 독하다고 했을 정도로 했으니까요. ‘내가 왜 이렇게 까지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는데요. <맘마미아!>는 커튼콜 때 그 감정이 싹 풀려요. 공연을 통해서 제가 건강해지는 거죠.”

#. “후회하지 않아, 사랑하고 노래했으므로”, 피아프처럼
최정원은 <키스미 케이트>에서는 비앙카에서 릴리로, <시카고>에서는 록시에서 벨마로 한 작품에서 두 가지 역할로 무대에 올랐다. ‘여배우’와 ‘나이’. 어울릴 수 없는 상충구도에서 최정원은 누구도 할 수 없었던, 자신만의 저력으로 자신만의 필모그래피를 완성했다.

“지금 다시 비앙카, 록시를 하고 싶지 않아요. 제 나이에 맞는 역할로 무대에 오른 수 있다는 건 아주 건강하게, 나이를 잘 먹고 있다는 증거잖아요(웃음). “나이를 먹는 게 두렵지 않나요?”라고 물어보는 분들이 많은데 진심으로,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해요. 열심히 사는 하루하루가 모여서 제 60살이 결정되는 거잖아요. 그래서 지금 하루하루를 감사하면서 살아요. 누군가를 미워하고, 불평하지도 않고. 후배들이 “선배님은 왜 화를 안 내세요?”라고 물어요. 내 안의 행복은 내 안에 있는 거잖아요. 남들이 칭찬했다고 행복한 게 아니고, 질타한다고 불행한 게 아니고 내가 웃고 있으니까 행복한 거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 지금을 감사하게 살아요. 어릴 땐 투정도 많고, 욕심도 많았는데 좋은 신랑을 만나고, 아이를 낳으면서 변했어요. 배우로만 집중하면서 살 수 있게 해주는 가족들에게 감사하게 되면서, 관객들에게 감사하고, 대한민국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그런 사람이 된 거죠.”


“저는 배우를 하기 위해서 많은 걸 포기한 사람이에요. 아이를 돌보는 일, 남편을 뒷바라지하는 일은 직업이 됐고 무대가 제 삶이 됐어요. 가족들에게 굉장히 미안하지만 가족들에게 제 공연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에 스스로 위안을 해요. 저를 “세계 최고의 뮤지컬배우”라고 불러주는 가족들이 있어서 전 다른 선택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온전히 무대에만 집중할 수 있어요. 딸 수아는 저에게 가장 객관적인 조언을 해줄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안목을 갖고 있어요. 가끔 <맘마미아!> 소피 대사를 시켜보면 잘해요. 7년 뒤에는 수아가 소피를 하고 제가 도나를 하는 <맘마미아!> 공연을 꿈꿔봐요. 이런 멋진 페어가 또 있을까요?”

글: 강윤희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kangjuck@interpark.com)
사진: 이민옥(okjassi@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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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1

  • A** 2011.05.02

    멋있으십니다. 무르익은 연기 기대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