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와 함께 늙어갈 수 있다면”, <산불> 조민기
작성일2011.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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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무대를 향한 조민기의 발걸음이 시작됐다. 대중들에게는 ‘에덴의 동쪽’ 미워할 수 없는 악역 신태환으로, ‘욕망의 불꽃’ 대서양 그룹 셋째 아들로 익숙한 탤런트 조민기이지만 ‘연극배우’를 꿈꿨던 유년 시절을 가졌던 그이기에, 무대를 향한 발걸음은 묵직하기만 하다.
2006년 이후 5년 만에 돌아온 연극무대. 오랜만에 무대로 발걸음을 내딛는 이유는 ‘좋은 작품, 좋은 시간, 좋은 의미’, 삼박자가 딱 맞아떨어져 5년 만에 무대에 오르게 된 것뿐, 다른 이유는 없다. 무대에 오르지 않을 때에는 객석에 앉아 무대와 함께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연극, 영화, TV 매체만 다를 뿐 ‘연기’라는 본질은 같다고 말하는 배우 조민기의 오늘이 <산불>에서 빛을 내고 있다.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에 불이 났었던 2006년 12월, 바로 옆에서 연극 <여름과 연기>를 공연하고 있었다. 그 때 이후로 5년 만이다. ‘같이 공연해보고 싶다’고 생각만 해오던 배우들이 있었는데 <산불>에서 만나게 됐다. 장영남, 서은경 배우는 특히나 더 그렇고. 장영남 배우하고는 인사처럼 “언제 한번 같이 공연해야 하는데”라는 말을 나눴던 사이인데 <산불>이 좋은 배우 분들을 모아주셔서, 덕분에 같이 하고 있다. 대한민국 연극계 거장 임영웅 선생님과 함께 준비 중이다.”
안톤 체호프의 <갈매기><벚꽃동산><세자매>, 최형인 연출 <여름과 연기>, 임영웅 연출, 차범석 작가의 <산불>까지. 연극 속 배우 조민기의 전적에는 ‘고전’과 ‘연극스러움’의 색채가 짙게 깔려 있다.
“고전이라고 하는 것들에는 이유가 있다. 셰익스피어, 체호프의 작품에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극적 흥미를 유발하고 상황을 대입하게 하는 본질이 있다. 대한민국의 고전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차범석 선생님의 <산불>이다. 전쟁 속에 벌어지는 그 당시의 그들만의 리그 이야기에서 암투, 정의, 사랑 등 지금 우리가 공감하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상황은 다르지만 본질은 같다. 관객들에게 우리에게도 이런 고전이 있다”라는 걸 확인하게 해주고 싶다”
대한민국 최고의 희곡으로 꼽히는 <산불>의 가장 큰 매력은 단연 이야기다. 희곡 ‘산불’은 배우들에게 ‘친절한 대본’이요, 관객들에게는 ‘재미있는 이야기’다.
“대사가 별로 없는데 흐름을 따라갈 수 없어서 잘 외워지지 않는 대본이 있는 반면에 아무리 빽빽해도 읽으면 바로 외워지는 그런 대본이 있다. 김수현 선생님 대본이 그렇다. 아무리 대사가 많아도 힘들지가 않다. 차범석 선생님의 ‘산불’은 친절한 대본이다. 대사가 입에 착착 붙는다. 고전이라고 설명해서 ‘고루한가?’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연습을 거듭 할수록 느끼고 있는 게 <산불>이 정말 웃음코드를 가진 재미있는 작품이라는 거다. 우리에게 이렇게나 훌륭한 작가가 있었다는 거지.”
연극 <산불>을 시작하면서 한 장씩 넘겨보고 있는 낡은 노트들. 청주대학교 연극과 재학시절, 차범석 선생님이 강의했던 연극개론 수업 당시의 노트들이다. “연극을 사랑하라”는 선생님의 말씀보다, 캠퍼스의 열정과 파란 잔디가 동경의 대상이었던 시간이었다.
“차범석 선생님에게 연극개론, 희곡론 수업을 들었다. 왜 그 때는 훌륭한 선생님, 큰 가르침이라는 걸 알지 못했던 걸까. 졸업을 하고, 현장에 나와서 그 분들의 족적을 마주하면서 ‘내가 역사책에 나올법한 분들과 호흡했었구나’라는 느낌을 받는다. 이렇게 훌륭한 가르침을 왜 그땐 몰랐지라는 후회도 들고. 차범석 선생님 수업 때 필기했던 노트들을 다시 보면서 채우려는 복습이 아니라 후회의 복습을 하고 있다. <산불> 제작사 대표님이 “<산불> 공연을 하는데 뭐든 하셔야 한다”고 하셔서 “뭐든 하겠는데 뭘 해야 하나요?”라고 했더니 규복이를 하라고 하더라. 규복이는 ‘젊고 싱싱한 남성의 심볼’로 잠자는 과부들의 본능을 일깨워줘야 하는 인물인데! 남성성을 잃어가는 연식에 들어온 제의라 걱정이 많았다(웃음).”
<산불>은 6.25 전쟁의 여파로 남자란 남자는 모두 죽거나 떠나고 여자들만 남은 과부마을에 한 남자가 내려오면서 일어나게 되는 과부 여인들의 심리와 욕망을 생생한 대사와 캐릭터로 뽑아낸 작품이다.
“요즘 여자배우들에게 기 빨리고 있다(웃음). 강부자 선생님부터 1990년대 배우까지 각 연대별로 배우들이 포진되어 있다. 예전에 <아름다운 사인>이라는 작품에서 혼자서 여배우 일곱 명과 함께 작업을 한적도 있었는데 그 때는 ‘기 빨린다’는 생각을 안 했던 것 같은데 정말 별로 한 것도 없이 쇠잔해지는 기분이다. 아줌마들 특유의 직언직설들이 많이 나온다. 속내는 뻔히 들여다보이는 그런 것들. 사람 사는 세상의 단편이 보인다. 사실주의 작품에서 가장 큰 재미는 무대 위에서 내 모습이 재현되는 걸 구경하는데 있다. <산불>은 그 재미를 갖고 있다.”
배우 조민기의 연기관에는 ‘서비스맨 정신’, 그리고 ‘연기의 본질은 하나’라는 생각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영화, TV, 연극 어느 분야에서든 ‘연기 잘하는 배우’로 통하는 배우 조민기를 만든 가장 큰 덕목들이다.
“대중매체를 통해서 익숙한 얼굴이 연극무대에 서 있다면 관객들이 느끼는 생경함은 훨씬 줄겠지. 하지만 그것만 까불 수 없는 곳이 무대다. 배우는 감동이 되었던, 재미가 되었던 관객들의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포인트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서비스맨 정신으로 기대치 이상의 것을 채워줘야 한다. 강의를 하다가 학생들에게 “연기자가 되고 싶으냐, 연기자가 되고 싶으냐”고 묻는다. 아이들은 고민하지. 그럼 난 둘 다 되라고 그런다. 어느 마켓에 있느냐에 따라서 하나의 본질이 두드러질 뿐이지 연기의 본질은 한 가지라고. 경계를 오갈 수 있는 배우가 되라는 거다. “난 이 길을 걸어왔으니까, 이 마켓은 아닌 것 같아. 가지 말아야지”라고 외면한다면 그곳이 자신의 한계가 되는 거지. 학생들에게 상황에 맞는 배우다움을 갖춘 배우가 되라고 말한다. 영화면 영화, TV면 TV, 연극이면 연극. 상황에 따라 움직일 수 있는 배우.”
고등학교 1학년, 극단 ‘신협’에 들어가면서 부터 그의 배우 인생은 시작됐다. 연극배우가 꿈이었지만 가난한 예술가, 가난한 배우가 되기는 싫었다.
“어릴 때부터 “최소한의 기본 생활유지를 할 수 있어야 예술도 할 수 있는 거지”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우리 때는 시커먼 야전잠바를 입고, 안 씻고 그래야 연극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 티 내면서 예술을 하는 거지. 나는 그게 싫었다. 배우다운 모습은 정갈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배우는 거지가 아닌데 왜 예술을 거지처럼 하는 거지’라는 생각이었다. 극단에 (유)동근이 형이 같이 있었는데 TV 활동을 시작하니까 선배들이 “저 갈보 같은 자식” 이라고 욕을 하더라. 나는 연기의 본질은 하나지, 매체의 차이는 없다고 생각한다. 꾸준히 연극만 하신 분들이 따갑게 보는 시선이 느껴질 때도 있었다. 눈에 보인다,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공감은 할 수 없는 거지. 각자의 한계를 만들다 보면 작은 사람으로 남게 되니까.”
가감 없는 스타일. 뒤 끝없고 솔직한 성격으로도 유명하다. “내 DNA는 잘 알고 있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보고 마음고생까지 한다면 얼마나 복잡하겠나. 둘 중에 하나는 포기해야지(웃음). 솔직하게 말하고 터는 O형 스타일인데, 요즘 가끔 뒤끝 있는 Q형일 때가 생기더라.(웃음)”
사진 찍는 배우, 커피 만드는 배우로도 유명한 그는 “취미는 절대 직업으로 삼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취미는 취미로”라는 새로운 생각을 더했다.
“좋아하는 일들이 업이 되는 순간 좋아하는 마음이 없어지더라. 커피, 사진이 그랬다. 커피를 정말 좋아해서 ‘매일 아침 맛있는 에스프레소를 공짜로 마실 수 없을까’ 고민하다가 카페를 차렸다. 와, 손님에게 받는 만원이 그렇게 귀한 돈인지 몰랐다. 까페를 그만둘 때까지 커피는 쳐다보기도 싫더라. ‘웨딩스튜디오를 운영하면서 이 공간을 내 작업실로 사용하면 되겠다’는 얄팍한 생각으로 스튜디오를 차렸는데 다 내 마음 같진 않더라. 웬만한 사진기, 조명, 포토샵으로 사진을 만든다는 게 너무 싫었다. 그렇게 4년 정도 하다 보니 ‘아, 내가 좋아하는 걸로 사업자등록증을 내면 안 되는구나’라는 걸 깨달았다. 순수하게 내 작업을 할 수 있는 작업실을 만들고 있는 중이다. 아, 연기는 좋아하는 일이고 업이다. 이건 소중하다. 정말.(웃음)”
멋있는 것들을 느끼면서 늙어가는 것. ‘멋지게 늙자’를 생각하는 그의 바람이다. “하늘이 멋있는데 하늘 한번 올려다보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 저렇게 큰 한강이 있는데, 그게 멋있는지 모르고 사는 사람들도 있다. 멋있는 것들을 멋있다고 느끼면서 싶다.”
늙어가는 것에 대한 바람과 낭만이 배우 조민기의 얼굴을 감싸고 있다. “연극무대에 있어서 소원이 있다면, 나이가 들어서 분장을 하나도 하지 않고 <벚꽃동산> 피르샤 노인 역할로 무대에 오르는 거다. “다 가버렸나”라는 대사를 말하면서 긴 여운을 남길 수 있는 그런 배우가 되고 싶다.”
짙은 여운을 가진 배우, 조민기의 무대가 시작된다.
글: 강윤희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kangjuck@interpark.com)
사진: 이민옥(okjassi@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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