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리노 김용걸, “가치 있는 새로움이 더욱 끌려”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도 그는 몸을 풀었다고 한다. 승객이 많지 않아 빈 뒷자리에서 오는 내내 스트레칭을 하며 ‘무대의 느낌’을 놓지 않으려 했다는 김용걸(36). “스튜어디스들도 나중에는 아무 말 안 하더라”며 덤덤히 이야기를 잇는 그의 힘은 바로 여기에서 나오는 듯 했다. 아무렇지 않게, 묵묵히, 그러나 치열하게 매 순간을 임하는 것. 세계 최정상급 발레리노로서 뿐만 아니라 무척이나 강인한 심지를 가진 따뜻하고 진실된 한 명으로서, 발레리노 김용걸을 이제 한국 하늘 아래에서 더 가까이 볼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일 것이다.

잃은 것 없는 파리에서의 9년

발레단 내 외국인 단원이 5%도 안될 만큼 타인에 대한 배척도, 그리고 최정상의 자존심도 높은 파리오페라발레단에서 김용걸은 지난 주까지(7월 4일 그가 호주에서 발레단의 마지막 투어 공연을 마친) 함께 활동하던 단원들 중 유일한 동양인이었다. 2000년 연습생에서부터 시작, 오디션을 통해 정단원의 관문을 뚫은 그는 9년 동안 차례로 드미 솔리스트(Demi Soloist), 솔리스트(Soloist)를 거쳐 최고에서 세 번째 등급에 해당하는 쉬제(sujet)에까지 올랐다.

“브리즈번에서 마지막 날 공연이 끝나고 호주문화부장관이 가든파티에 저희를 초대했어요. 공연을 너무 좋게 본 거죠. 다 같이 모인 김에 작별 인사를 전했습니다. 끝나고 정말 친한 친구 6, 7명이 따로 한식당에 가서 꽃게탕이랑 불고기랑, 같이 먹었어요. 저로 인해 친구들이 한국 음식 접할 기회가 많아서, 다들 너무 좋아해요. 같이 온 제 파트너(발레리나 오헬리아 벨레)는 자기 친 오빠가 꼭 고추장 사오라고 했대요(웃음).”
이젠 익숙해진 친구들을 비롯, 영국 로열발레단, 미국의 아메리칸발레씨어터(ABT), 러시아 볼쇼이발레단과 함께 세계 4대 발레단으로 꼽히는 파리오페라발레단의 솔리스트 활동을 뒤로하고 그는 한국 행을 택했다. 파리로 떠난 지 9년만의 일이다.

“파리에 있는 동안 잃은 건 하나도 없어요. 있다면 옛날에 가지고 있던 저의 이상한 스타일이죠. 잃어버린 게 아니라 다 다듬어졌어요, 괜찮은 모양으로.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지금은 조금 더 배우기 보단 잘 다듬어 완숙한 모습을 보여주는 게 나을 것 같아요.”

프랑스에 있던 와중에도 매년 적게는 한 번, 많게는 세 번 한국에서 공연을 했던 그이기에 이번의 귀국이 전혀 특별하게 느껴지진 않는단다.
“파리 발레단에 있지 않을 뿐, 파리에는 여전히 제 모든 것이 있어요. 제가 다시 느끼고, 올라가려면, 또 예종 학생들에게 무언가를 주기 위해서는 계속 (파리를) 왔다 갔다 해야 되요. 우리 친구들(파리오페라발레단 단원들)한테도 얘기를 많이 했었기 때문에 그 친구들, 제가 많이 부를 거예요. 앞으로도 자주 볼 일이 많기 때문에 떠날 때 아쉬움이 전혀 없었어요. 아주 기분 좋게 왔죠.”


심장이 나에게 말을 한다

오는 9월부터 한국종합예술학교 무용과 교수로 설 김용걸의 행보는, 그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에게는 전혀 갑작스럽거나 의외의 소식이 아닐 것이다. 충분히 만족할 만한 현재에서 과감히 새로운 무언가를 탐하는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기 때문. 2000년 국립발레단의 수석무용수이자 스타무용수로 탄탄히 자리매김하던 그가, 타국 발레단의 연습생이 되길 자처했던 전과가 있지 않은가.

“다른 걸 느껴보고 싶었어요. 자기를 잘 알려면 저~멀리서 스스로를 한번 봐야 해요. 저희는 비디오 세대라고, 선생님들도 많이 계셨지만, 그분들이 줄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었고, 그래서 비디오 자료를 참 많이 봤거든요. 보면 너무 잘하는 거예요. 그 사람들하고 같이 한번 해 보고 싶었어요. 그 마음이 커져서 국제대회도 입상하고, 해외 무용수들을 보니, 저도 잘 할 수 있을 것 같고 도전해 보고 싶었죠.”

15살 때 무용을 시작, 동아콩쿠르 1위, 모스크바국제발레콩쿠르 3위, 파리국제무용콩쿠르 듀엣 부분 1위 등 반짝이지만 무거운 월계관을 그저 하나의 관문으로 여기는 김용걸은 그렇게 파리로 향했다. 가서 “1, 2년간은 왜 왔나, 정말 후회도 많이 했다”는 그는 파란만장한 역경을 딛고 솔리스트로 우뚝 섰건만, 다시 한국으로 향한다.

“심장이 저한테 말을 한다, 그게 맞는 것 같아요. 그 생각만 하면 가슴이 설레고 소름이 돋으면서 온 종일 다른 건 머리에 안 들어오죠. 파리에 올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어요. 미국에서 교육학 공부하시고 교수를 하시는 한 어르신을 알고 있는데, 그 분은 여든이 되어서도 언덕에 올라 학교를 내려다 보면, 자신만 바라보고 있을 학생들 생각에 막 기쁨의 심장이 뛰신대요. 저도 그런 마음을 느낀 거에요.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은 언젠가 해야 될 일이라고 생각했고, 2년 전부터 나름 준비를 하고 있어서 제의를 받았을 때 전혀 당황하지 않았어요. 한 5개월 고민했지만, 무용수로 활동하면서 학생들과 같이 뛰며 생활할 수 있다는 것, 정말 좋은 것 같아요. 저는 복이 많은 사람이죠.”


어떤 반응이 나올지 궁금

햄과 마요네즈가 가득한 샌드위치를 성큼 베어 문다. 몸 관리가 우선인 무용수라 음식을 조절할 것 같다고 하자, 한 작품이 끝나면 때로 2, 3Kg가 빠질 정도로 에너지 소비가 큰 발레리노에게 “음식 가리는 건 자기만 손해”라며 고개를 흔든다.

“하지만 자기 관리는 철저해야 되요. 저도 잘 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몸이 원하는 데로 해 주고, 지킬 건 지키려고 하죠. 몸은 내가 키우는 하나의 인격체로 생각해요. 정신은 나고, 몸은 별개로. 그 둘이 대화하는 거죠. 몸이 아프면 아프다고, 편하면 풀어졌다고 신호를 보내요. 저에게 말을 해요. 그래서 자기 몸에 예민해지면 스스로에 맞는 연습을 짜서 효율적으로 할 수 있어요.”

지독한 연습벌레로 소문난 그이지만 ‘어느 정도의 연습은 무용수들에게는 기본’임을 전제로 “연습에선 양보다 ‘질’이 중요하다”를 몇 번이고 강조한다.
“춤도 머리로 춰야 되요. 한 동작을 100번 반복하는 게 아니라, 자기의 모습을 뒤돌아서 보고, 동작을 분석해 보고, 그러면 50번만 하면 되죠. 잘 하는 사람은 그 만큼 현명하게 한다는 이야기도 되거든요.”

더불어 무용 외적인 교육과 노력의 중요성도 잊지 않았다.
“발레 무용수들을 굳이 현대무용수들과 비교해 본다면 많이 사고가 갇혀있어요. 발레 포지션도 꼭 해야 하는 기본들이 있어 어떻게 보면 주입식 교육이거든요. 그렇기에 무용 외적인 것에서 많이 배워야 해요. 책을 본다던가 영화를 봐도 그 사람의 마임이나 동작 등을 다양한 각도에서 보려 노력해야 하죠. 유럽 교육 방식 중에 좋은 건 어렸을 때부터 철학을 배운다는 거에요.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능력이 굉장히 월등하죠. 그런 이야기들을 여기에서 많이 나눠보고 싶어요.”

오는 11일과 12일 그는 세계 각국의 발레단에서 활동하는 젊은 무용수들과 함께 <김용걸과 친구들>을 선보인다. 함께 파리오페라발레단에서 활동한 발레리나 오헬리아 벨레를 비롯, 러시아 볼쇼이 발레단의 안드레이 볼로틴, 배주윤, 독일 슈트트가르트 발레단의 알렉산더 존스, 강효정, 그리고 유니버설 발레단의 강예나 등이 다양한 고전과 현대 작품을 소개할 예정. 이후 9월 10일부터 국립발레단 <차이코프스키>의 주역도 예약이 되어있다.

“오자마자 공연을 하게 되어서 참 학생들에게 미안한데, <차이코프스키>가 끝나면 당분간은 학교에만 집중할 생각입니다. 학생들과 많이 싸워야 될 것 같아요. 뭐랄까, 좀 시비를 많이 걸고 싶다고 해야 할까? 그러면 그들이 저에게 어떤 반응을 보여줄 건지 정말 궁금해요. 약을 올려보고 싶어요. 그러면서 크는 것 같거든요. 학생들에게 잘한다는 칭찬보다는 그런게 필요해요.”

자신을 다듬는데 선생님들의 따끔한 말들이 더욱 힘이 되었다는 김용걸은 학생들에게 쉬이 당근을 줄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누구보다 겸손하게 타인을 배려하고, 누구보다 진중하고 철저하게 자신을 다지는 이 선생님이라면 당근이건 채찍이건 모두 피와 살이 될 것임이 분명하다. 관객들은 환상적인 그의 무대를 볼 설레는 마음을, 학생들은 따끔하지만 대단한 선생님을 만날 긴장된 마음을 단단히 가져야 하겠다.


글: 황선아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suna1@interpark.com)
사진: 다큐멘터리 허브(club.cyworld.com/docuherb), 크레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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