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할배' 아버지로 돌아오다, <아버지와 나와 홍매와> 신구

서울과 강원도, 함경도와 전라도를 떠돌며 78년을 살아온 아버지가 암으로 죽음을 앞두고 있다. 무뚝뚝하고 고집 센 아버지는 정신이 흐릿한 와중에도 꼬박꼬박 아내를 찾고, 아들에게 버럭 화를 내면서도 깊은 속정을 내비친다. 가족간의 덤덤한 대화 속에 묻어나는 삶의 온기가 가슴을 찡하게 한다. 제 6회 차범석 희곡상을 수상한 <아버지와 나와 홍매와>의 이야기다.

오는 9월 공연을 앞둔 이 연극에서 배우 신구는 또 다시 아버지를 맡았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 등에서 숱하게 아버지를 연기해온 그가 이번에는 어떤 표정과 눈빛으로 마음을 움직일지 궁금했다. 최근 출연중인 예능프로그램 '꽃보다 할배'의 인기로 언론의 요청이 쇄도해서일까, 인터뷰를 썩 내켜 하지 않는 듯한 첫인상에 걱정이 앞섰지만, 작품과 연극에 대해 이야기하는 노배우의 눈빛은 진지했다.

<아버지와 나와 홍매와>는 대본만 읽는데도 가슴이 무척 찡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어떠셨어요?
나도 똑같아요. 느낌이 거의 같지. 출연 의뢰가 왔을 때 차범석 희곡상 당선작이고, 쟁쟁한 심사위원 분들이 선택한 작품이니까 나름대로 기본이 탄탄하게 짜여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대본을 읽어보니까 구체적이고 세밀한 감정표현, 가슴에 탁 와 닿는 부분이 곳곳에 많아서 사람 마음을 움직이더라고. 스케일이 크고 장대한 작품이 있는 반면에 물이 고여있는 것 같은데도 내면에선 뭔가 소용돌이치는 작품이 있잖아요. <아버지와 나와 홍매와>가 그런 작품이에요. 물론 배우들이 표현하기에 따라 달렸지만, 우리가 다 같이 노력하면 아마 보시는 분들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 작품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극중 인물들의 대사가 꼭 진짜처럼 생생했어요.
아마 김광탁 작가가 아버님께서 생존해 계실 때의 모습을 생생하게 체험한 것을 가감 없이 옮겨놨기 때문에 더 와 닿지 않나 생각해요. 추측하고 상상해서 쓴 작품이 아니라 작가가 몸소 아버지와 생활하며 겪은 것이 들어가 있는 거지. 조금은 가필이 됐겠지만. 그래서 바로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 같이 우리에게 와 닿아요. 거짓이 없으니까 관객들에게도 그대로 전달이 될 것 같아요.

 이 작품에서 아버지는 어떤 인물인가요?
우리 사회에서 보통 볼 수 있는 흔한 아버지에요. 그런데 평생 살아온 여정이 좀 특별하죠. 일제 시대도 좀 겪고, 해방 전후부터 우리 역사의 고비고비마다 어려운 과정을 다 겪었어요. 남북이 분단된 후에는 단신으로 월남해서 남한에서 전국을 순회하면서 모질게 살았고. 그 과정에서 아내를 만나서 두 아들을 두고 살아가는 아버지이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죠.
내가 이제까지 고집스런 아버지도 해봤고, 답답한 아버지도 해봤고 여러 아버지를 연기해봤는데 이 작품의 아버지도 크게 다르지는 않아요. 다만 평생 사랑한다는 표현을 한 번도 안 해본 사람이 인생의 막바지에 서서 아들과 마지막 이별을 하고 하직하는 그런 부분이 짠하죠.

표현은 퉁명스러워도 아내와 아들을 향한 깊은 정이 느껴졌어요.
아버지에게는 자신이 세상 하직하는 날이 보인 것 같아요. 그러니까 자신이 없어지고 난 후에 아내가 잘 지낼 수 있도록 마련해주려고 하지. 둘째 아들에 대한 생각도 작품에 구체적으로 나와요. 큰 아들이 잘 나가고 있으니까 그 쪽을 더 좋아하고 감싸 안았을 것 같은데, 속으로는 작은 아들이 더 걱정스러운 거지. 얘는 마음이 더 여리고 착하니까. 모든 부모들이 다 비슷할 것 같아요.

 선생님께서는 아버지에 대해 어떤 추억을 갖고 계세요?
우리 아버지? 말씀드릴 것이 없지. 나와 똑같으니까(웃음). 무뚝뚝하고 말 없고 자상하지 못하고. 나름대로는 (가족을) 깊이 생각하고 있다고 하는데도 사람이 어디 그래요? 달면 달다, 쓰면 쓰다 얘기를 해야 그런가 보다 하는데 그러질 못하니까. 고쳐보려고 해도 잘 안 되네(웃음).


공연 준비를 철저히 하신다고 들었어요. 인물의 말투·표정 같은 것은 어떻게 만들어가시나요?
배우가 돼 봐야 알지(웃음). 배우가 하는 일이 그거니까. 대본을 보면서 바로 느껴지는 것도 있고, 또 자기가 경험했던 것도 있고, 경험하지 않은 것은 상상력을 동원하고, 연출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고. 다 비슷해요. 그런데 이제 누가 집중적으로 시간을 투자해서 고민하느냐, 그 고민의 깊이에 따라 인물의 경향이 달라질 수 있죠.

영화·드라마·CF등 다양한 활동을 하셨지만 연극에 대한 애정이 특히 각별하신 것 같아요.
나는 태생적으로 연극을 배워서 10여 년 하다가, 먹고 살 수가 없어서 텔레비전도 하고 이렇게 지냈거든. 저쪽(방송)일이 바쁘다 보니까 그 끈을 탁 놓고 여기 와서 집중적으로 일을 하기가 어렵더라고. 그래도 마음은 이쪽에 와 있는데, 먹고 사는 것 때문에 (방송을) 하고는 있으니 갈등이 생기죠. 양립을 못 하니까. 내가 제일 싫었던 게, 연극을 한다고 해놓고 바빠서 연습을 안 나오는 거에요. 근데 연습이 없으면 연극이 안 되잖아요. 그런 모습을 봤기 때문에 내가 연극할 때 다른 일 때문에 지장을 주는 게 제일 싫었어요. 그래서 1년에 한번이라도 연극을 할 때는 저쪽 일을 정리하고 이쪽에만 충실하려고 했죠.

무대만이 가진 매력은 무엇인가요?
영화와 텔레비전·라디오를 다 해봤지만, 거긴 늘 기계가 있잖아요. 편집도 하고. 그렇지만 연극은 살아 호흡하는 관객이 바로 앞에 있잖아요. 그러니까 무대에서 이뤄지는 것들이 바로 저쪽으로 전달돼서 그 호흡이 되돌아와요. 그 교감 때문에 우리 배우들이 희열을 느끼는 거죠. 자기가 생각하고 개발한 표현이나 동작이 저쪽에서 반응이 있으면 너무 좋다고.


어느 인터뷰에서 후배들을 향해 '10년을 버티면 다 배우가 된다'고 하셨어요.
배우가 된다는 확실한 보장은 없지만, 최소 10년을 몸을 던져서 썩혀야 새롭게 싹이 나든가 하죠. 배우뿐 아니라 어느 직종이라도 10년은 해야 나름대로 노하우가 생기고 프로정신이 생길 것 같아요. 그 10년도 혼신의 힘을 다 해서 노력해야지, 얼렁뚱땅 보내면 10년 20년을 해도 안 되죠. 자신이 가진 것을 다 투자해서 열심히 10년을 버티면 나름대로 사회가 인정해주는 배우가 될 수 있어요. 요즘 연극하다 TV에 나오는 배우들도 보통 10년은 하다 오는 것 같던데. 그러면 사회도 외면하지 않는다고.

10년이면 꽤 긴 시간인데요.
길지. 어렵죠. 끈질김과 인내심과 자기 주관이 나름대로 있어야 견딜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조금만 바람이 불거나 파도가 쳐도 흔들리고 무너지기 마련이죠. 연기를 20대 초년에 시작했다고 하면 10년 후에는 30대잖아요. 그러면 이제 자기 나름대로 생활도 해야 되고 자식도 생기고 하니까 더 어려워진다고. 그 생활을 어떻게 유지를 하느냐 이런 데서 또 고민이 많아지지. 옛날이나 지금이나 연극만 해서 자기 가정을 꾸릴 수 있게 보장이 되질 않아요. 돈도 적을뿐더러, 1년 내내 월급 받듯 받기도 어렵죠. 근데 그런 사정은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라고 해요. 그렇다면 텔레비전이나 영화·라디오밖에 없을 거 아냐. 그 쪽에 가서 생활비를 벌더라도 연극에 애정을 갖고 끈을 놓지 않고 하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좋은 거지.

어려운 상황에서도 뚝심 있게 자기 길을 밀고 나아가는 힘은 어디서 올까요?
자기 결심이지. 자기가 뭘 하고 살겠다는 나름대로의 결심. 무대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한테는 그게 어려울 거에요. 지금 텔레비전에서 내로라 하는 탤런트 중에도 무대를 모르는 사람이 많잖아요. 그 어렵고 힘든 걸 왜 하느냐는 사람들도 많아요. 그건 각자의 인생관에 따라서 다르죠.

혹시 연기 말고 다른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해보셨어요?
할 줄 아는 게 없으니까.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웃음). 그리고 나는 소심해요. 소심하고 그래서 덥석 일을 벌리고 부딪히고 그러질 못한다고. 자신도 없고. 그래서 사업을 하겠다든지 직업을 바꿔보겠다든지 이런 생각을 못하고 바보같이 살았지.


요즘 '꽃보다 할배' 가 큰 인기잖아요. "같은 사물도 노인의 시각으로 보면 다르게 보일 수 있다는 걸 알리고 싶다"고 하셨는데, 어떤 점이 다르게 보이시나요?
사물의 뒷면을 좀 보게 되는 것 같아요. 젊은이들이라고 다 피상적으로 보는 건 아니겠지만, 그 동안 살아오면서 쌓은 자기 나름대로의 경험·지식이 축적돼서…관조라고 할까? 사물을 보는 깊이에서 조금 다를 것 같아요. 그렇다고 노인네들이 다 현명하고 그런 건 아니지(웃음). 이제 노망나기 직전인데(웃음).

'꽃보다 할배'를 보다 보면 어떻게 나이 드는 것이 좋을지 생각하게 돼요.
글쎄요. 나는 이렇게 나이 들다가 죽어가겠다, 고 해서 꼭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웃음) 다 자기 기준을 가지면 되겠지. 곱게 늙으라고 하잖아요, 곱게. 그 마음을 놓지 않고 항상 간직하며 살고 또 노력하면 그 쪽으로 흐르게 돼 있어요. 엉뚱한 생각을 하면 그 쪽으로 빠지는 거고. 다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하잖아요.

글: 박인아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iapark@interpark.com)
사진: 기준서(스튜디오춘 www.studiocho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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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1

  • heeya09** 2013.08.20

    아... 왠지 옆에서 말씀하시는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