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빛과 그림자, 예술혼과 뒤바꾼 천재 음악가의 삶

날갯짓을 하는 순백색의 백조들, 가냘픈 몸짓을 더욱 애달프게 그려주는 음악이 있다.
아마 ‘발레’를 잘 모르는 사람도 ‘백조의 호수’의 테마곡은 알고 있을 것이다. 알게 모르게 우리에게 익숙한 차이코프스키의 음악들은 특히 발레작품에 톡톡한 기여를 했다. ‘백조의 호수’를 비롯하여 ‘잠자는 숲속의 미녀’, ‘호두까기인형’ 등 내로라하는 대작들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안무가 마리우스 프티파와 함께 그 시대를 대표했던 한 천재적 음악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음악에는 익숙한 대중들이라 할지라도 그의 삶에 대해 주목한 이는 흔치 않았다.

보리스 에이프만이 주목한 차이코프스키

음악적 천재성과 창작열에 맞바꾼 차이코프스키의 삶을 주목하여 무대 위에 올려놓은 이가 바로 보리스 에이프만이다. 그는 1995년 ‘러시아의 국민 예술가’ 칭호를 받고 2006년 무용계의 오스카상인 브누아 드 라 당스(Benois de la Danse)를 수상한바 있으며 국내에는 ‘붉은 지젤’, ‘안나 카레니나’ 등의 작품이 알려져 있다. 보리스 에이프만은 특유의 감각적이면서도 탁월한 구성력을 바탕으로 예술가 차이코프스키의 내면을 드라마발레로 표현하였다. 2001년 ‘보리스 에이프만 발레단’이 내한하여 기립박수를 받았던 이 작품은 올해 9월 10일부터 13일까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국립발레단의 ‘차이코프스키: 삶과 죽음의 미스터리’라는 이름으로 무대에 올랐다.

차이코프스키의 인생을 그리는 다양한 인물들

공연 첫날인 10일에는 베를린 슈타츠 발레단의 수석무용수이자 예술 감독인 블라디미르 말라코프가 격정적인 창작욕에 휩싸인 ‘차이코프스키’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의 분신 역에는 알렉세이 투르코, 아내 밀류코바 역에 나탈리아 포보로지뉴크, 물질적, 정신적 후원자인 폰 멕 부인 역에 최리나 등 보리스 에이프만 발레단의 게스트 아티스트들이 출연하였다.
이제는 발레공연에 익숙하게 제공되는 자막설명과 함께 서곡이 연주되고 병상의 차이코프스키는 한껏 경직된 모습으로 등장한다. 지독한 신경쇠약에 시달리며 자신의 분신, ‘잠자는 숲속의 미녀’의 마녀 카라보스, 젊은 시절의 아내 밀류코바, 후원자 폰 멕 부인의 환영을 보는 그에게 흑조무리들이 다가와 혼란을 가중시킨다.
이처럼 극중에는 차이코프스키의 복잡한 심리와 감정, 그리고 그가 처한 상황을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간결한 이미지와 섬세한 감각을 통해 표현했다. 차이코프스키와 그의 분신, 그를 속박하는 아내 밀류코바와 후원자 폰 멕 부인, 동성애적 갈망을 상징하는 왕자 등은 그의 정신세계가 혼란스러움을 보여주듯 다소 환상적인 이미지로 등장했다.
차이코프스키의 삶은 이러했다. 음악에 대한 창작열이 뜨거웠던 그는 지독한 신경쇠약에 시달리며 자아의 환영과 반목을 거듭한다. 그러던 중 당시 예술가로서는 치명적인 동성애의 유혹을 받게 되고, 대중에게 그 의혹을 덮기 위해 자신의 지독한 팬이었던 밀류코바를 아내로 맞게 된다. 그러나 이 결혼은 곧 파국을 야기한다. 밀류코바의 길게 늘어뜨린 면사포가 차이코프스키의 몸을 죄어가는 장면은 이러한 비극을 상징적으로 암시한다. 상류사회의 미망인이었던 폰 멕 부인은 그의 경제적 후원인이 되어 작곡활동을 돕지만 불행한 결혼은 여전히 커다란 속박이 된다. 도박과 술에 빠져 향락적 생활에 젖어 있는 그를 보며 후원인이었던 폰 멕 부인도 결별을 선언하고 그의 사랑에 목말랐던 아내는 정신이상이 되고 만다. 그의 판타지였던 왕자와 백조들이 떠나가고, 분신마저 숨을 거둔 후 그 또한 죽음을 맞이한다. 이처럼 복잡다단한 그의 삶을 미리 알지 못한다면 장면을 이해하는데 다소 난해할 수 있다.

차이코프스키 작곡의 음악이 보여주는 그의 삶

모던발레작품으로서는 드물게 오케스트라 연주에 맞추어 진행된 공연은 아이러니하게도 차이코프스키 자신의 음악으로 가득 차있다. 자신이 만든 음악이 자신의 삶을 그린다 …. 참으로 매력적인 설정이 아닐 수 없다.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교향곡 제5번 E단조(Symphony No.5 in E minor, Op.64), 현을 위한 세레나데 2, 3악장(Serenade for Strings, Op.48, Movements 2 and 3 Waltz and Elegy), 교향곡 제6번 B단조 \'비창\'4악장 (Symphony No.6 in B minor Op.74, \'Pathetique\', final) 등이 적재적소에 연주되며 창작을 향한 고통, 동성애에의 갈망이 야기하는 환상과 비전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주었다.

차이코프스키의 세계를 그리는 현대적 감각

총 2막으로 구성된 극 중 1막에서는 블라디미르 말라코프(차이코프스키)와 알렉세이 투르코(분신)가 손을 맞잡고 ‘따로 또 같이’ 추는 2인무가 눈에 띈다. 1명의 자아가 이분되어 각기 다른 속성을 지니고도 끊어질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접촉(contact)과 들어 올리는 동작(lift), 대칭(symmetricalness)과 변형(variation)을 통한 다양한 움직임이 돋보였으며 두 발레리노가 선보이는 큼직큼직한 스케일의 테크닉은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아기자기하게 등장하는 우산군무와 백조군무 등도 다채로웠다.
2막의 도박판 장면에서는 타원형의 녹색 테이블을 비스듬히 세우기도 하고 굴리기도 하면서 여러 명의 발레리노들이 도박의 노예가 되어가는 과정을 역동적으로 보여주었다.
무대 소품과 디자인, 조명에서도 남다른 감각이 돋보였다. 악상이 떠오를 때마다 등장하는 관현악과 궁전을 상징하는 구조물과 무대 뒤 원형 스크린을 통해 보여주는 홀로그램 영상, 고뇌에 휩싸일 때 천장에서 내려오는 진회색의 주름진 커튼 등이 눈길을 끌었다. 밀류코바의 긴 면사포, 도박판의 녹색 테이블, 백조와 흑조 무리, 왕자와 소녀의 등장 등 관객들이 따라가야 할 시선은 매우 분주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아르튀르 랭보, 오스카 와일드와 같이 예술적 영감을 지녔지만 현실적으로는 불운했던 차이코프스키의 일생을 보여준 ‘차이코프스키: 삶과 죽음의 미스터리’. 예술가의 업적과 활동, 그 밝은 이면에만 주목하지 않고 한 인간으로서의 삶, 그 어두운 이면에 주목함으로써 그의 음악에 이입된 심리나 정서에 주목할 수 있는 신선한 기회였다.
차이코프스키만이 알고 있을 자신의 삶과 죽음의 비밀, 우리는 그가 남겨놓은 음악세계와 발레작품들을 탐미하며 이를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홍애령 기자 newstag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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