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Factory.17] 친숙하면서도 낯선 영웅, 뮤지컬 ‘홍길동’

슈퍼주니어 예성의 ‘미소년’ 홍길동

동에 번쩍하고 서에 번쩍하던 홍길동이 만화와 애니메이션, 드라마, 영화에서 번쩍번쩍하더니 뮤지컬 무대 위에 나타났다. 이미 타 장르에서 뛰고 날고 도는 ‘묘기’를 보여준 바 있는 홍길동이 무대라는 제한적 공간에서 신출귀몰에 대한 기대감을 충족시켜주기는 힘들 것. 그래서 뮤지컬 ‘홍길동’은 홍길동이라는 인간의 고뇌와 사랑, 아픔에 초점을 맞췄다. 그런데 그 초점이 약간 어긋났나, 아니면 방심으로 인해 흔들렸나. 만인의 영웅 홍길동은 사라지고 ‘그냥 인간’ 홍길동만 남았다. ‘그냥 인간’은 21세기를 사는 우리 주위에도 널리고 널렸다.

 영웅은 가고 백성은 남았다

무대 위 영웅을 그려내기란 쉽지 않은 작업이다. 게다가 특별한 재주를 갖고 있는 영웅이라면 더욱이 어렵다. 때문에 뮤지컬 ‘홍길동’은 실재했던 인간 홍길동을 재현하기 위해 많은 눈요기를 과감히 포기하고 현실적 인물로 살려냈다. 뮤지컬 ‘홍길동’은 홍길동에 대한 판타지 대신 실재했던 인물이었다는 것에 집중하자는 제작의도와 맞물려 구체적인 배경과 장소, 인물을 제시한다. 이는 환상 속 인물이었던 홍길동과의 거리감을 좁히는데 한몫했다.  

문제는 홍길동이 하염없이 평민으로 굳혀지는 만큼 영웅은 저 멀리 사라진다는 점이다. 그 유명한 축지법이나 둔갑술이 가능이나 했던 건지 의심스러울정도로 맥 빠진 홍길동은, 신분은 천민이되 행동은 양반이 됐다. 뒷짐을 지고 천천히 걸으며 말을 아낀다. 자신의 손가락 같은 사람들이 하나 둘 다치고 죽어나가도 여간해서는 꿈틀대는 법이 없다. 소리 없이 분노하고 인내하는 내공은 어린 나이에 홀로 길을 떠나며 슬픔을 삼켰던 과거를 보여주며 어느 정도의 타당성을 확보했다. 그럼에도 홍길동은 모든 것을 너무나 잘 참고 있다. 서민의 옷을 입고 있더라도 영웅적 카리스마와 시간에 따른 성숙이 내재돼 있을 것. 그런 면에서 캐스팅으로 화제가 됐던 예성이 표현하는 홍길동은 한없이 작고 여린, 상처받는, 그러면서도 담담한, 참 아이러니한 인물이 됐다. 폭군 왕 아래서 자유를 꿈꾸며 속으로 눈물을 삼키는 홍길동의 묘사에 대한 약간의 아쉬움이 남는다.  

보고 또 보는 조선의 인물들

억압의 시대, 조선 땅이라는 좁은 공간에 존재할 수 있는 인물들의 다양성은 극히 제한돼 있다. 홍길동의 경우 그 행보와 배경이 분명해 신선한 캐릭터를 창조할 경우 오히려 현실성이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 그럼에도 공연장을 찾는 관객들에게는 어느 정도의 기대감이 있기 마련이다. 홍길동의 영웅적 면모보다는 그의 가치관과 세계관, 인간적 고뇌를 보여주겠다는 제작의도에 따라 관객들은 홍길동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인물들의 감정과 관계에 대한 호기심도 갖게 된다. 서민들의 소박한 감정과 서로를 향한 애틋한 마음, 불합리한 세상에 대한 좌절과 분노, 그들이 꿈꾸는 세상을 향한 외침과 희망 등.
 

그러나 홍길동을 비롯해 뮤지컬 ‘홍길동’ 속 캐릭터들은 다소 진부하다. 선과 악이 서로를 노려보는 ‘흑과 백’처럼 분명하게 나뉘며 그들만의 구별된 매력이 없어졌고 아픔은 기계적이 됐다. 홍길동이 사랑하는 여인 수진 역시 이미 익숙해진 여성상이다. 무거운 상황과 유머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고자 노력하는 조연들 또한 방자와 향단이 같은 전형적 인물들이다. 여전히 활빈의 꿈을 꾸며 홍길동을 다그치는 용감한 여자 무빈의 분노만이 살아 타오른다. 평생 굶지 말라고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 무빈을 갖고 사는 이 여자는 혀가 잘리는 참변을 당한다. 잘린 혀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면서도 상처를 원동력삼아 살아간다. 정의의 실현과 굴복당하지 않는 의지는 홍길동보다 무빈으로 인해 부각된다. 

뮤지컬 ‘홍길동’은 진부함과 신선함의 경계에 서 있다. 인간 홍길동은 기존의 영웅적 홍길동과 달라 낯설지만 그도 굶주린 인간이었다는 것에 대한 친숙함이 있다. 장성군이 추진해온 홍길동 문화콘텐츠 사업의 일환으로 장성군과 사단법인 서울심포니오케스트라가 함께 제작 공연한 역사판타지 뮤지컬이라는 데에도 의의가 있다. 만민이 평등하고 차별이 없는 세계를 꿈꾸었던 홍길동이 외치는 자유 역시 식상하지만 여전히 마음을 울리는 이상이다. 치열했던 홍길동의 삶을 손에 잡힐 듯 재현하고자 노력했던 뮤지컬 ‘홍길동’은 그를 실존일물로 무대에 올리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가 민중영웅이자 국법을 어긴 죄인의 사이에서 숨어살듯 뮤지컬 ‘홍길동’ 역시 공감과 아쉬움 경계에 있다. 창작뮤지컬인 만큼 관객들의 애정 어린 기대 속에서 홍길동과의 만남이 조금 더 행복할 수 있게 되길 기대해본다.



이영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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