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Factory. 2010서울연극제-5] 당신이 희망, 연극 ‘감포 사는 분이, 덕이, 열수’
할퀴고 쓰다듬으며 살아가는 것
경주 감포 앞바다에 있는 대왕암 주위로는 신비한 설화와 신화적 이야기가 떠다닌다. 많은 이들이 붉게 타오르며 복을 내리는 불을 보기 위해 머리를 조아리는 그곳에 방사능 폐기장이 유치된다. 그 후로 만파식적의 신비한 피리소리가 들린다는 소문이 돈다. 그러니 이제 모든 근심과 걱정이 사라질까. 무사태평을 고대하는 감포일대 사람들의 오늘은 달고 구수하며, 그리고 비루하다.
질펀한 사투리를 구사하는 인물들은 순박하나 어쩔 수 없이 이기적인 인간의 단면을 안고 있다. 그들의 셈속에는 연민과 애정도 공존한다. 시장바닥에 앉아 야채를 파는 분이, 그녀의 며느리 덕이, 아들 열수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앉은뱅이, 맹인, 반편이다. 다리가 불편한 분이를 바닥으로 끌어 앉히는 것은 차마 놓지 못하는 묵직한 과거의 아픔이다. 이렇듯 상처로 인한 정신적 기형이 신체로 표현된 연극 ‘감포 사는 분이, 덕이, 열수’는 관객을 불편하게 만든다. 복을 받지 못한 것 같은 이들은 오가는 행인을 ‘복 받아 가이소’라는 인사로 맞아들인다.
- 무서운 것은 사람
이 작품에는 왜 이렇게 됐는지 가늠하기가 까마득하며 알 도리 없는 인물들의 오늘이 펼쳐진다. ‘어디 죄 진데 없고, 넘한테 험한 소리 함 안했고, 손에 쥔 거 하나 없어 타고난 내 몸 놀려 부지런히 살았고, 바라볼 핏줄 하나라고 우리 복 줄여 복 빌어주고 쓰다듬고 키웠는데’ 왜 이렇게 됐을까. 급하게 돌아만 가는 세상을 따라가기가 버거운 노파, 그가 동사무소에서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삶의 무게에 대해 나지막이 호소한다. 떨어지는 노파의 눈물은 그 누구도 적시지 못한다. 한없이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서는 노파의 치마에는 하혈 자국이 선명하다. 자기 주머니를 채우려는 사람들의 소음 속에서 소외된 노파, 그 뒤에서 웃고 있는 미친 판사는 상징적이며 압축적이다. 무서운 건 바다가 타도록 붉은 태양이나 세상을 잠식시킬 듯 쏟아지는 비가 아니다. 사람이다.
분이와 덕이, 열수에게도 무서운 건 사람이다. 그 가족사는 기가 막히다. 만나지 못할 사람들이 만났고 만나서는 안 될 사람들이 다시 만나 가정을 형성했다. 결핍되고 상처받은 사람들이 만나 부딪히고 할퀴며 쓰다듬고 사는 것이 인생, 분이와 덕이, 열수의 이야기는 공연 마지막이 되어서야 알 수 있다. 이는 한 여자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여자도 아닌 기집이 처음 사랑이란 걸 해 아들을 낳았다. 그의 이름은 록키. 양공주 여자는 물 건너간 남편을 기다리며 아들과 함께 사는데 세상의 선입견과 손가락질은 날카롭기만 하다. 그러던 어느 날 록키를 놀리던 한 아이가 록키를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게 했고 그는 죽었다. 엄마는 눈이 뒤집혀 그 아이의 집에 불을 질렀다. 불을 헤집고 살아 나오는 아이를 안고 록키가 죽은 곳에서 뛰어 내렸다. 그녀는 앉은뱅이가 되고 아이는 반편수가 됐다.
- 그래도 희망은 사람
언급했듯 이 연극은 사투리로 진행된다. 얽히고설킨 관계들과 그들을 둘러싼 배경에 대해 과도한 정보를 들어야하는 초반, 명확히 들리지 않는 대사는 극에 대한 몰입을 방해한다. 그러나 그들이 비뚤어진 세상에 나름의 방식으로 적응했듯 관객은 그들의 언어와 ‘현재’에 곧 적응하게 된다. 정돈되지 못한 것 같은 도입의 어수선함은 배우들의 자연스러운 연기와 연극이 바라보는 삶에 대한 애정으로 자리를 잡아간다. 연극은 다양한 관계만큼이나 다양한 인물들의 개성으로 구수하다. 오지랖 넓고 참견하기 좋아하나 그래도 순박한 여자 미천과 법을 공부하다 미쳐 침을 뱉고 다니는 판사, 아픈 아내를 수발하며 사는 단씨 등 이러나저러나 살아가는 인물들로 인해 극은 어색한 무거움을 벗었다. 그러나 시골 풍경에서 기대할 수 있는 편안함과 휴식, 달콤한 화해는 없다. 분이의 옛 연인이자 아들만을 기다리는 설씨는 분이를 찾아가 모든 게 ‘너 때문이다’고 외치며 그녀를 찌른다. 죽어가는 분이의 체념한 듯 평온한 표정, 그 순간 그토록 기다리던 불이 내려왔다.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른다. 불이 탄다. 이리저리 춤을 춘다. 넘어지기도 한다. 오호라, 그것은 불이 아니라 타는 사람이다. “연호야!” 설씨가 아들의 이름을 외친다.
예상되는 화해를 뒤엎고 연극은 잔인한 칼부림을 선사한다. 방에 놓여 있던 등이 넘어지며 분이네 집에 불이 번진다. 분이를 둘러싼 관계의 지리멸렬한 역사가 그렇게 막을 내리고 있다. 그러나 희망이 있다. 그 뒤로 아이를 가진 열수와 덕이가 보인다. 그들이 수줍게 속삭이고 있다. 난자당한 인간들을 밟고 새 생명이 탄생할 것이다. 누군가가 힘없이 쓰러질지라도 삶은 계속된다.
뉴스테이지 이영경 기자 newstag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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