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Factory.56] 패자의 승리, 연극 ‘내 심장을 쏴라’

색을 용납지 않아 화이트로 일관된 세계는 불안하며 날카롭다. 외부와 단절돼 고립된 무대 위 공간(정신병원)은 반면 역설적으로 안전하다는 이점을 얻는다. 차에 치여 객사할 일 없고 길다가 칼에 찔리는 봉변당할 일, 집구석에 꼭꼭 숨겨둔 다이아반지를 도둑맞을 일 따위도 없다. 담배 한 갑과 믹스커피 두 봉지가 하루 배급량인 이곳에서 도난이래야 머리끈 정도다.  스스로 원치는 않았으나 나무늘보와 미스 리로 합의된 이수명의 말 따라 ‘교도소 갈 일’ 없고 ‘미래가 보장된’ 곳이다. 내면의 불안을 견디는 게 쉬운가, 세상의 위협과 시선을 버텨내는 게 쉬운가. 치료과정 중 ‘나무늘보’가 된 수명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진화, 두발로 멀쩡히 서서 걷는 ‘사람’이 되지만 허리까지 내려오는 머리길이만은 아직 그대로다. 칼이나 가위 등 날카로운 것에 대한 그의 공포는 과거의 어느 사건에서 기인하는데 수명은 그 시간을 정면으로 마주할 자신이 없다.

 

소설 속 여러 공간, 캐릭터를 압축해 제한된 무대 위에 펼쳐놓아야 하기에 연극에는 다양한 인물들이 동시에 존재한다. 한 눈에 들어온 그들의 조화는 ‘헐’이다. 소설에서 묘사된 나무늘보가 시각화되는 순간부터 수시로 바지를 벗는 거시기 환자, 우아한 버킹엄 공주, 꼭 붙어 다니는 한이와 지은, 미쳤는데 말까지 많은 김용, 매미처럼 누군가의 등에 찰싹 붙어 생활하고 이동하는 만식, 우울한 청소부, 경보남자, 십운산선생, 거리의 악사에 끊임없이 ‘화선아’를 부르짖는 화선엄마까지 제 개성을 십분 발휘하는 인물들로 가득하다. 그럼에도 연극은 개인과 내면, 상처에 집중하는데 소홀하지 않았다. 한이가 제 모든 것을 걸고 지키려는 지은에 대한 ‘사랑’과 문제집을 들여다보며 고민하기를 멈추지 않는 청소부의 ‘꿈’이 있다.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인물은 단연 주인공 수명과 승민이다. 누구의 인생이든 드라마 한 편, 소설 한 권은 되겠지만 그 중에서도 막장에 가까운 이력을 자랑하는 수명과 승민에게 세상은 ‘미칠 만 한’ 더럽고 치사하며 두렵고 무자비한 곳이다. 인물들의 독특한 행동은 가장 억제된 부분의 어쩔 수 없는 표출이라 할 수 있다.

 

무대 위 세계가 우리와 동떨어져 있다고 판단하면서도 이상하리만치 공감수위가 높은 것은 캐릭터에 대한 연민 때문이다. 이어 몸의 병이 아니라 마음의 병이 문제인 우리가 극단으로 몰릴 때의 그림이 저들과 다르지 않다는 동질감이 생긴다. 그들의 트위스트 한 판이 통쾌한 것도 같은 이유다. 미치지 못한 우리대신 미쳐주고, 미친 듯 흔들지 못하는 우리대신 흔들어주니 관객은 모르는 새 빚을 지고도 갚을 길 없어 무력하게도 연민할 뿐이다. 죽은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평생을 수리희망병원에서 보내게 된 수명과 가족 간의 유산싸움에 휘말려 강제로 갇히게 된 승민이 자유를 찾아가는 과정은 참으로 지난하지만 그들에게나 관객에게나 의미 있는 분투다. 탈출에 성공한 후 눈이 멀어가는 채로 패러글라이딩에 몸을 내맡긴 승민이 온몸으로 하늘을 느낀 후 어떻게 됐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죽은 것으로 짐작되지만 그는 우리가 알기를 거부한다. 그저 장렬하게 전사하는 시대의 영웅처럼 “이 역사적인 탈출을 후세에 길이 전해다오”, 한 문장만 남겼다. 불안한 만큼 자유로운 패러글라이딩을 바라보고 있던 수명의 손에는 승민이 남겨준 시계가 있다. 제 걸음을 멈추지 않고 누구와도 상관있게, 혹은 상관없게 또각거리는 시계는 “빼앗기지마. 네 시간은 네 거야”라고 말한다.

 

무려 1억 원 고료의 세계문학상 수상작을 무대에 옮기는 작업에는 많은 고민과 시행착오가 있었을 것이다. 사각형 종이에 갇힌 문자라 할지라도 시공간의 제약에서 자유로운 것은 단연 소설이다. 다소 아쉬운 연극의 스토리는 이미 충분히 매력적이고 완성도 있는 원작으로 인해 추락하지 않는다. 병원 밖의 공간은 조명과 가장 풍부한 색을 담고 있는 흑백 영상으로 표현됐다. 공간과 내면까지 아우른 조명, 영상, 음악은 패자들의 승리를 격려하며 관객들에게 아름다운 체험으로 전하는 힘을 발휘했다. 제대로 미쳐준 배우들은 우울과 유머, 상처와 희망, 외면과 내면 중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그들과 우리의 거리감을 좁혔다. 갇힌 곳에서 끊임없는 자유를 보여주는 연극 ‘내 심장을 쏴라’는 말한다. 우리를 멈추게 하려거든 ‘내 심장을 쏴라!’



뉴스테이지 이영경 기자 newstag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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