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Factory.71] 당신이 사라진다, 연극 ‘있.었.다’
이것은 존재와 소멸의 근거에 관한 우회적이면서도 직설적인 이야기다. 이것은 내가 나를 잃어가는 과정에 대한 불쾌한 목격담이다. 이것은 내가 실종시킨 것들의 간접적 반란이다. 연극 ‘있.었.다’는 소멸, 실종, 부재 등 무無로 가득하다. 죽음과는 다르다. 우리는 연극에서 나열된 부재의 대상들에게 애도를 표할 수 없다. 그것들을 잃은 것이 나의 무의식적, 혹은 의식적 행위에서 비롯됐기 때문에 ‘나’는 애도할 자격이 없으며 사실 애도할 마음도 없다. 연극은 무표정한 얼굴로 단언한다. 없어지게 하는 것보다 잔인한 일은 없다고.
사람들은 매일 인배를 찾아와 누군가 사라졌으니 찾아달라고 말한다. 귀가하던 여학생이, 퇴근하던 직장인이, 치매증상의 노인들이 없어지더니 이제는 집에 있던 멀쩡한 가족이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나간 후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핸드폰, 신발, 가방 등 모든 게 그대로다. 사람만 없어졌다.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은 사진 한 장과 신고자의 말뿐이다. 단 1그램의 실질적 무게도 갖지 못한 채 언어로만 공간을 떠도는 존재의 가벼움은 영상을 통해 부재와 존재, 그 중간 어디 즈음으로 표현된다. 무대 바닥에는 수많은 실종자의 얼굴이 비춰진다. 수북하다. 사라진 것들이 무심하게 널려있다. 타인을 통해서만 존재를 증명 받을 수 있는 수많은 ‘나’가 소리 없이 절규한다.
딸의 실종에 울먹이던 영호는 돌아온 딸이 전과 다르다며 두려워한다. 결국 ‘이 아이를 좀 잡아가주시면 안될까요?’ 진실을 실토하고 ‘실종담당자인 당신이 날 찾아달라’며 인배에게 도움을 청한다. 딸은 애초에 없어지지 않았다. 사라진 그들 모두를 실종시킨 건 결국 ‘나’ 자신이다. 연극 ‘있.었.다’에서 실종자와 납치범, 피해자와 가해자는 동일하다. 물리적 소멸은 심리적 외면에서 비롯된다. 누군가가 사라지길 원했던 나의 은밀한 내적 욕망이 대상을 사라지게 만든다. 이 연극에서 가장 섬뜩한 것은 시종일관 문 밖에서 찾아달라고 호소하는 소녀의 목소리도, 자신이 실종신고가 되었다는 사실을 전율처럼 맞닥뜨리게 된 영호의 당혹감도 아니다. 소멸의 근거가 무엇인지 파악하고 있음에도 달리 행동을 취하지 않는 인배의 일괄됨이 실종을 가속화시킨다. 부쩍 늘어난 실종자의 대부분이 아이와 여자, 노인임을 감안할 때 부재하는 인배의 아내와 아이 역시 실종됐으며 그의 어머니는 서서히 사라지고 있는 중이다.
“사람들은 언제나 그런 생각을 하지요. 어떤 사람, 어떤 일…. 한 때는 좋아했던 무언가의 흔적 자체가 지우개로 지우듯 깨끗하게 없어졌으면, 그래서 모든 걸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소극장 무대는 굳게 닫힌 여러 개의 문으로 빼곡하다. 눈에 보이는 인물들은 오로지 문 안에 있다. 문 밖에 있는, 문 밖으로 밀려난 자들은 원래 없었던 듯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관객은 문 밖의 그 누군가를 상상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존재가 의심받을 때 할 수 있는 것이 결국 아무것도 없다는 무능력함의 패배를, 인배의 어머니를 통해 체화하게 된다. 가장 소모적이고도 불행한 연습 과정이다. 끊임없이 아들과의 대화를 시도하지만 스스로를 잃어갈 뿐인 노모는 예전의 나를 찾아달라고 호소한다. 인배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다. 그곳에는 소멸이라는 추상적 실재만이 승리하고 있다.
묵직한 화두를 던지고 있는 연극 ‘있.었.다’는 작가 정복근의 진중한 대본과 연출가 서재형의 매끄럽고 현명한 연출로 뛰어난 완성도를 자랑한다. 정복근과 서재형이니 의심의 여지가 없다. 누군가에게서 서서히 잊힌다는 공포가 연극의 전체적 분위기를 압도하며 가장 근원적이고도 거대한 두려움을 불러낸다. 비교적 짧은 러닝타임으로 군더더기가 없는 동시에 모자란 부분도 없다. 남용되지 않는 영상의 활용은 효과적이다. 간결하며 절제된 무대 위의 모든 것이 연극의 본질, 실체만을 드러냈다. 아주 강렬하게.
뉴스테이지 이영경 기자 newstag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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