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 아버지' vs '우울증 어머니'…누가 더 불행한가

연극 '아버지' '어머니' 교차공연 보니… 프랑스작가 플로리앙 젤레르 대표작 연극계 최초 교차공연 방식으로 선봬 '아버지' 박근형 "배우로서 도전의지 불태워" '어머니' 윤소정 "행복 잃은 간절...
바로 우리 아버지·어머니의 치매와 우울증을 돌아보게 하는 연극 ‘아버지’(왼쪽)와 ‘어머니’가 한무대서 번갈아 공연한다. 치매 아버지를 연기하는 박근형은 “배우는 ‘그 역할에 성공했다 실패했다’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했고, 우울증 어머니를 소화하는 윤소정은 “어느 한 장면에서라도 고통·슬픔을 느낀다면 그걸로 소중한 시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사진=국립극단).


[이데일리 이윤정 기자] 1. “안느의 남편이라고? 언제부터?” “10년이 다 돼 가요.” 80세의 앙드레는 혼란스럽다. 조금 전까지 분명 딸 안느와 함께 있었는데 다음 장면에선 낯선 여자가 그를 아빠라고 부른다. 앙드레는 치매를 앓고 있다. 간병인 앞에서 전직 댄서였다며 탭댄스의 스텝을 밟기도 하지만 사실 그는 엔지니어였다. 언제부턴가 딸이 간호사가 되고 있던 가구가 없어지는 등 분명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앙드레의 시각에서 보면 어떤 것이 허구이고 진실인지 헷갈린다.

2.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한 여성이 소파에 앉아 있다. 남편에게 “당신 오늘 하루 뭐 했어?”라는 질문만 벌써 세 번째. 남편과 실랑이를 하던 안느의 표정은 아들이 등장하자 금세 화색이 돈다. “널 보는 건 언제나 나의 행복이야. 귀여운 내 아들.” 엄마에게 짜증스럽게만 대하는 아들이지만 그녀의 무한사랑에는 변함이 없다. 안느는 자식에게 집착하는 ‘빈둥지증후군’을 앓고 있다. 남편이 떠날지도 모른다고 불안해하고, 이미 떠난 자식을 그리는 과거의 기억에만 집착하고 있다.

어쩌면 현대인에게 치매는 암보다 더 큰 공포로 다가올지 모른다. 그런 공포를 치밀하게 다룬 연극 두 편이 동시에 관객을 찾아왔다. 가족 안에서 벌어지는 기억과 망각, 편집과 애정을 경계성 치매의 틀 안에서 살펴낸 ‘아버지’와 ‘어머니’다. 국립극단이 배우 중심의 연극으로 도전한 두 작품은 프랑스작가 플로리앙 젤레르의 대표작이다. 오는 8월 14일까지 서울 중구 명동 명동예술극장에서 연극계 최초로 교차공연 형식으로 펼친다. 평일에는 하루씩 번갈아 공연하고 주말에는 한꺼번에 두 작품을 올리는 독특한 방식이다.

두 작품 모두 90분 내외의 짧은 극이지만 노령화·치매·빈둥지증후군·우울증 등 현대사회의 사회·심리적 병인을 심도깊게 다룬다. 김윤철 국립극단 예술감독은 “연달아 관람하며 두 극을 비교해 보면 작품이 가진 의미가 강력하게 드러날 것”이라고 의미를 뒀다.

△1인칭으로 느끼는 혼란…‘치매 아버지’ 박근형

연극 ‘아버지’는 치매에 걸린 아버지 ‘앙드레’의 관점에서 딸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을 치밀하면서도 재치있게 묘사했다. 한 인간의 기억과 현실이 맞부딪치면서 개인이 소멸해가는 과정을 치매환자의 시각에서 바라봤다. 그는 항상 파자마를 입고 있고, 자신의 손목에 시계가 온전히 있는지 늘 강박적으로 확인한다. 갑자기 모르는 남자가 찾아와 딸의 남자친구라며 조롱하듯 그의 뺨을 때리기도 한다. 이 모든 상황을 앙드레의 시각인 ‘1인칭 시점’으로 그려냈다.

박정희 연출가는 “기억을 상실해가는 사람의 시선을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 시간을 파편적으로 흐르게 했다”며 “가구가 하나둘 없어지면서 마지막엔 빈 무대가 되는데 이를 통해 한 인간이 소멸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원로배우 박근형(76)이 앙드레 역을 맡았다. 2012년 ‘3월의 눈’ 이후 4년 만의 연극 출연으로 명동예술극장 무대에 서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박근형은 “과거와 현재의 기억이 겹쳐져 나중에는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게 되는 상황에 공감이 간다”며 “앙드레의 혼란스러운 시각을 표현하기 위해 엄청난 연기의 폭을 보여줘야 한다. 배우로서 도전의지를 불태우게 하더라”고 말했다.

연극 ‘아버지’의 한 장면(사진=국립극단).


△반복되는 장면 속 고독…‘빈둥지증후군’ 윤소정

연극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한 어머니 ‘안느’가 남편과 아들이 멀어져가면서 겪는 정체성의 혼란과 불안감을 실감나게 표현한다. 안느는 남편에게 새로운 여자가 생겼다고 생각하는 와중에 아들마저 여자친구를 만나 자신을 떠나는 상황에 처한다. 가족에게 헌신하며 오로지 사랑을 쏟는 것에 자신의 존재의미를 부여하며 살아왔지만, 자식도 남편도 이제 곧 떠날 거라는 불안감에 빠져들자 우울과 광기의 경계에서 방황하기 시작한다.

이병훈 연출은 “현실이라고 생각했던 것마저도 ‘환상이었나’ 할 정도로 어머니의 의식이 점차 붕괴해 가는 과정을 그렸다”며 “같은 장면이 반복되기도 하고 전혀 생각지도 않은 어떤 것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극을 보는 관객 스스로가 퍼즐처럼 연결고리를 맞춰가야 한다”고 설명했다.

배우 윤소정(72)이 빈둥지증후군을 앓는 안느를 연기한다. 윤소정은 “극 중 안느는 평생 남편과 아들을 위해 살아왔지만 그것은 희생이 아니라 즐거움이었다”며 “그렇게 모든 것을 쏟아부은 남편과 아들이 자신을 떠나면서 행복을 잃어버린 그녀의 간절함이 가슴에 와닿았다”고 요즘 안느에 빠져 사는 심정을 전했다.

연극 ‘어머니’의 한 장면(사진=국립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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