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물고 피어나는 모든 삶의 이야기, 연극 <레드>

"뭐가 보이지?" "레드요!"
노년을 앞둔 화가의 화폭에서 조수는 생동하는 붉은 빛을 본다. 스승이 보지 못하는 색깔을 볼 수 있는 까닭은 그가 젊기 때문이고, 새로운 예술의 태동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 조수를 바라보며 스승은 어느새 완고하게 굳어버린 자신의 예술세계를 깨기 위해 고뇌하지만, 옛 것이 저물고 새 것이 피어나는 이치는 누구도 거스를 수가 없다.

삶의 모든 순간 일어나는 소멸과 탄생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연극 <레드>가 2년 만에 다시 무대에 올랐다. <레드> 제작진은 지난 20일 강신일·강필석·한지상이 주역을 맡은 이 작품의 전막을 언론에 공개했다.


<레드>는 러시아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활동했던 추상표현주의의 대표적 화가 마크 로스코와 그의 조수인 켄이 나누는 대화로 구성된 남성 2인극이다. 2009년 영국에서 처음 무대에 올랐고, 이듬해 브로드웨이로 무대를 넓혀 토니어워즈 연극부문에서 최우수작품상 등 여섯 개의 상을 받으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2011년의 국내 초연에서도 역시 호평을 이끌어낸 바 있다.


이 연극은 1958년 뉴욕의 한 호화 레스토랑으로부터 벽화를 의뢰 받았다가 갑자기 계약을 파기했던 로스코의 실화를 중심에 두고 있다. 그가 왜 계약을 파기했는지에 초점을 두고 가상인물인 켄과의 문답을 통해 로스코의 고뇌와 망설임을 드러낸다.

극중 미술사조에 관한 어려운 말이 종종 오고 가지만, 사실 <레드>는 태어나 저마다의 청춘을 누리고 또 나이 들어가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난 네 심장을 멈추게 하려고 그림을 그린다"는 로스코의 엄숙한 작가정신은 젊은 조수에게 답답하게만 비춰지고, 조수는 스승을 깊이 존경하면서도 그 틀 밖의 새로운 세상을 꿈꾼다. 모든 부모와 자식, 신세대와 구세대의 갈등을 담고 있는 모습이다.

로스코 역을 맡은 강신일 역시 이 점을 강조했다. 그는 "미술에 대해서 잘 몰라도 상관없다. 이 작품은 미술뿐 아니라 연극에 대해서, 우리네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말은 굉장히 고고하게 들리지만, 사실은 굉장히 통속적이어서 더욱 재미있고 유쾌한 작품이다"라며 부담 없이 연극을 즐길 것을 권했다.


초연에 이어 두 번째로 로스코로 분하는 강신일은 지난 번 공연보다 더욱 깊이 인물에 공감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초연 때는 오기와 자신감이 약간 있었는데 이번에는 약간 겁이 났다. 극중 로스코가 "빛이 없다는 것, 죽어간다는 것이 두렵다"는 말을 하는데, 거장의 내면을 다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나도 그런 두려움을 조금 이해할 것 같다"며 "초연보다 더 감동적인 공연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2년 전 공연이 너무 짧게 끝나서 아쉬웠다"는 강필석은 강신일과 함께 두 번째로 <레드>에 출연하게 됐다. 그는 "초연 때는 캐릭터를 잘 이해하지 못해서 선배에게 죄송한 부분이 있었다. 작품과 함께 저 역시 이번에 제자리를 찾은 것 같다"고 말했다. 강필석과 함께 조수 켄 역을 맡은 한지상은 "작품이 너무 좋아 2년 전부터 같이 했었더라면 하는 질투심이 날 정도다. 앞으로 한 달간 <레드>의 세상을 흠뻑 누리고 싶다"고 전했다.

지난번 이해랑 예술극장에서 펼쳐졌던 <레드>는 올해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으로 무대를 옮겼다. 이에 대해 강신일과 강필석은 "작품이 제 집을 찾은 느낌"이라고 입을 모았다. 강신일은 "객석을 포함한 모든 공간이 로스코가 그림을 그리는 스튜디오라는 느낌을 준다"고 만족감을 표했다. 배우들이 역동적인 붓질로 하얀 화폭을 채우는 장면도 이 작품의 또 다른 매력이다. 공연은 내년 1월 26일까지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볼 수 있다.


(왼쪽부터) 강신일, 강필석, 한지상

글: 박인아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iapark@interpark.com)
사진: 배경훈(Mr.Hodol@Mr-Hod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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