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속의 요정] 김성녀, 그의 곰삭은 연기에 잠겨..

한 모녀의 집 벽 속에는 요정이 살고 있다. 이 요정은 밤마다 몰래 나와 딸 순덕이에게 아름다운 민요를 가르쳐주고 친구가 되어준다. 순덕이는 이 요정을 ‘스테카치’라고 부른다. 요정이 불러주는 러시아 민요 ‘스텐카라치’를 4살 짜리 아이의 서툰 발음으로 표현한 것이다. 사실 ‘스테카치’는 순덕이의 아빠다. 일제해방과 6.25전쟁 중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인 그는 ‘빨갱이’ 낙인을 찍혀 벽 속에서 숨어살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이 조용해지면 나오자고 했지만 그는 무려 40년의 세월을 벽 속에서 산다. 사춘기 딸이 가져다 준 꽃과 단풍 같은 ‘빛’이 유일한 기쁨으로 세월을 견디게 해준다. [벽속의 요정]은 지독한 이데올로기에 피해를 입은 한 남자와 그의 가족에 관한 이야기다. 무려 40년 동안 밝은 빛을 포기한 채 살아가지만 아내와 딸이 있고 서로를 의지하고 사랑하기에 그는 살아간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배우는 김성녀,한 명이다. 마당놀이에서 친근하고 구수한 입담으로 빼놓을 수 없는 배우가 된 김성녀는 그의 첫 모놀로그 드라마에 도전해 박수를 받고 있다. 이 작품에서 김성녀는 마당놀이를 벗어난, 이를 뛰어넘는 연기로 관객의 마음을 휘어잡아 역시 김성녀란 말이 절로 나오게 만든다. 무대에는 그 혼자뿐이지만, 작품에 빠져들다 보면 어느새 엄마 역, 아버지 역, 어린 순덕이 역, 외할머니 역이 따로 있는 듯, 그렇게 흘러가는 걸 느낀다. 곰삭고 곰삭은 연기는 가족간의 사랑과 숨막히는 이데올로기를 무리하지 않게 끌어내 눈물을 흘리게끔 만들고, 나이를 알 수 없는 청아하고 맛깔난 노래소리는 마음을 울린다. 이 작품에서 특히 인상깊은 장면은 순덕이, 아버지가 밤마다 짜둔 베로 웨딩드레스를 해 입고 아름다운 자태를 벽 속에 있는 아버지에게 선보이는 장면이 아닐까 한다.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하는 아버지가 눈물나고 서러워 그 앞에서 가장 먼저 웨딩드레스를 선보이는 장면은 관객의 진심을 건드리고 눈시울을 붉게 만든다. “살아 있다는 건 정말 좋지라?” [벽속의 요정]에서 아내가 남편에게 한 말이다. 정말 살아있다는 아름다운 것임을 이 연극은 내내 속삭인다. 요즘처럼 각박한 세상에 가족간의 끈끈한 애정이라는 가치를 되새길 수 있는 연극이 있다는 건 반가운 일이다. [벽속의 요정]은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일본작가가 쓴 작품을 우리나라 역사에 맞게 각색한 작품이다. 하지만 각색했음에도 불구하고 어김없이 들어맞는 해방과 전후 배경이 감탄을 자아낸다. 또한 중간에 아버지가 딸에게 들려주는 인형극 또한 아기자기한 재미를 선사한다. 살아있어서 좋고 가족이 있어서 행복하다는 것. 새삼스럽게 되새길 수 있는 작품이다. 물론 이는 김성녀의 농익은 연기가 있어서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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