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첵] 낡은 의자로 만드는 특별한 무대 미학
무대에 있는 건, 나무 의자 10여 개와 배우들뿐이다. 의상은 무채색의 단순한 디자인이고, 무대 배경은 그저 빈 공간이다. 하지만 이 무대는 이상하게 밀도있게 느껴진다. 배우들의 움직임이 정교해지고, 의자의 조합과 해체가 일어나면 무대는 ‘머릿속’에서 구체화 되고, 동시에 관객은 무대에서 일어나는 의자의 배열과 교차만으로 등장인물의 불안함을 강하게 느끼기 시작한다.
신체언어극 [보이첵]이 다시 관객 앞에 섰다. 창단 10주년을 맞은 사다리움직임연구소의 대표적인 레파토리로 2000년 초연돼 11명의 배우와 11개의 의자, 강렬한 음악과 신체언어가 어우러진 독창적인 접근으로 꾸준한 사랑을 받아온 작품이다. 요절한 독일 작가 게오르그 뷔히너의 미완성 희곡을 움직임과 오브제를 이용한 참신한 재해석으로 지난해에는 해외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가난하고 힘없는 자에 대한 억압, 절제된 이미지로 표현
[보이첵]의 주인공은 군대 상사들에 따라 좌지우지 되는 가난하고 힘없는 군인이다. 그는 상사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모욕을 저항하지 못하고 받아내고 의사에게는 생체실험으로 학대 당하기도 한다. 그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고 삶의 희망 조차도 가질 수 없는 나약한 인가 보이첵. 점점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던 그는, 연인 마리가 돈 때문에 악대장과 관계를 맺는다는 걸 알고 마리를 죽이고 자신도 죽음을 택한다.
[보이첵]에서 소품은 의자 11개가 전부다. 상사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생체실험을 당하는데다 장교에게 연인까지 뺏기는 보이첵이 정신착란에 빠져 파멸해 가는 과정을 배우들의 정교한 움직임과 낡은 목재의자만으로 표현한 것이다.
특히 의자는 인물의 불안한 심리상태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이 작품의 특별한 소품이다. 첫 장면부터 의자가 분해되고 허물어지면서 앞으로 일어날 파멸을 암시한다. 이것들은 배우들의 소품이 되기도 하지만 쌓이거나 허물어지고, 정렬하면서 인물을 조정한다. 의자의 배치와 활용은 무한히 확장되는 공간을 표현하고 끊임없이 생성되는 억압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인물이 의자와 합체되어 보이첵을 억압하고, 불완전하게 합쳐지거나 비워두면서 불안함을 극대화 시키면서 시각적인, 절제된 스토리텔링의 극치를 선보인다.
모던하고 상징적이지만 난해하게 느껴지 않는 건 이 작품이 지닌 가장 큰 미덕이다. 의자의 배열뿐만 아니라 배우 움직임, 음악, 조명으로 답답함, 불안함, 무한함, 고통과 고민을 시각적으로 펼쳐보이기 때문이다.
해외 러브 콜 잇달아
배우들의 섬세하고 정교한 움직임과 강렬한 피아졸라의 음악이 대사보다 먼저 다가오는 것도 이 작품의 백미다. 특히 [보이첵]은 2000년 초연이래 대부분 같은 배우들이 무대를 소화하고 있기 때문에 완벽한 호흡을 어렵지 않게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보이첵]은 지난해 8월 영국 에딘버러 페스티벌 프린지에 참가, 작품 선정에 까다롭기로 유명한 오로라 노바 극장에 동양 작품으로는 최초로 입성해 오전 10시 30분이라는 공연시간에도 연일 매진 사례를 기록하면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이에 따라 헤럴드 엔젤어워드와 토탈 씨어터 베스트 피지컬 씨어터를 수상하는가 하면 영국BBC 방송이 선정한 ‘올해의 에딘버러 페스티벌 탑 10’에 선정되는 수확을 거뒀다. 이 작품은 올해 들어서도 영국 국제마임페스티벌에 초청돼 공연을 가졌으며, 이어서 많은 해외투어공연이 예정돼 있어 그 인기를 실감하는 중이다.
이번 국내 공연은 소극장을 벗어나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관객을 만나고 있다. 절제되고 모던한 신체언어극이지만 어렵게 접근하지 않아도 된다. 기승전결이 있는 기존 연극만을 고집하는 관객에게도 꽤나 흡인력 있게 다가간다는 사실이 이 작품이 가진 진짜 힘이고 매력이므로.
글: 송지혜(인터파크ENT 공연기획팀 song@interpar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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