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음표를 가지고 <돌아온 엄사장>
<청춘예찬>에서 상을 엎고 무심히 쳐다보는 아버지와 눈에 살기가 가득한 아들이 한 이불을 덮고 잘 때, <경숙이 경숙아버지>에서 어메와 경숙이의 눈물 앞에서도 방정맞은 발놀림으로 노래를 부르는 아베를 볼 때, <맨드라미 꽃>에서 열 일곱 억센 사투리의 주혜가 잔심부름을 하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담배를 피워 물 때, 가슴을 짓누르는 답답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울지 않고 기꺼이 숨을 쉴 수 있음에 놀란 관객들은, 작가이자 연출가 박근형의 이름을 다시 한번 되새겼다.
막이 오르기 직전까지 나오지 않는 완고와 기꺼이 배우들에게 ‘마음대로 하라’고 하는 연출 스타일은 ‘박근형식’이라는 고유명사를 낳았고, 대학로를 밑바닥에서부터 뒤흔드는 체득적인 그의 힘은 관객들을 충분히 매료시켰다. 그렇기 때문에 2008년 박근형과 극단 골목길의 신작인 연극 <돌아온 엄사장>에는 물음표와 씁쓸함이 가득하다.
2005년 삼일로 창고극장 개관 30주년 기념공연으로 처음 선보인 연극 <선착장에서>의 후속작 격인 <돌아온 엄사장>은 전작의 배경이었던 울릉도를 떠나 포항에 닿은 엄사장과 그 무리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지인의 감투를 위해 앞뒤 안 가리는 엄사장의 활약과 의리와 충성심으로 똘똘 뭉친 영필 외 일당들의 의기투합은 거침없는 사투리와 개성 자체인 인물들의 열연으로 펼쳐진다. 여기에 엄사장의 아들 고수의 등장은 일편의 스토리에 또 다른 길을 내어 주고 있다.
하지만 뜨끔한 오늘의 편린과 뻔한 이야기는 분명 다른 법, 대부분의 관객들은 돌아온 엄사장이 그려놓을 길을 걷기 두 발짝 전에 이미 눈치 채 버릴 것이다. 인식하지 못했거나, 피하고 싶었지만 어디에도 있는 일상이 가져다 주었던 공감의 힘은, 반 박자 느린 억지 구성과 허한 웃음이 대신하고 있다.
어쩔 수 없이 박근형과 극단 골목길이 먼저 눈에 띄는 이 작품을 두고서 의외성을 상상하는 관객은 거의 없을 것이다. ‘전작을 둔 작품’이라는 부제가 딸린 이 작품에서 우리가 느끼는 낯설음은, 거친 손으로 묵묵히 옆 사람의 손을 잡아주는 뜨끈한 위로를 선착장에 두고 포마드 기름만 잔뜩 바르고 돌아온 것에 대한 아쉬움에 기초한다.
잠자리 선글라스와 흰 장갑만 낀 채 “야 임마” 한 마디 만으로도 그대로 운전기사 영필을 그려내고 있는 김영필과 담배 피며 춤추는 임산부 황마담 역의 황영희, 무엇보다 “이 개시끼야”를 연발하며 무대를 튼실히 장악하고 있는 엄사장 역의 엄효섭 등은 실제 이름이 곧 배역이듯 틈을 찾을 수 없는 연기로 역량의 한계를 언제나 경신한다.
또한 고수가 가진 배우의 힘과 색은, 배우의 가장 빛나는 모습을 잘 잡아 내는 박근형에 의해 무대 위에서 하나씩 드러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비단 첫 연극 무대라도 열정과 의의만이 아닌, 깊고 조심스런 호흡으로 서는 미덕을 고수는 보여주고 있다.
어제의 길고 보람된 하루는 내일 새벽에 뜰 눈꺼풀을 더욱 무겁게 하는 피로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박수 속에 어제를 일궜던 그 성품과 습성은 쉽게 변하지 않음을 믿으며, 계속해서 <돌아온 엄사장>을 반길 많은 관객들의 손짓에 기꺼이 한 손을 더한다.
글 : 황선아 기자(인터파크ENT suna1@interpar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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